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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⓾ 홍수(1)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22/10/04 [14:08]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⓾ 홍수(1)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 | 입력 : 2022/10/04 [14:08]

1969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인 필립 짐바르도 박사는 한 실험을 하였습니다. 치안이 허술한 골목에 두 대의 자동차를 보닛을 열어 놓은 채로 일주일을 방치했습니다. 똑같이 보닛을 열어 놓았지만 두 자동차 사이에는 실험을 위한 작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둘 중 한 자동차의 창문을 조금 깨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이 작은 차이는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유리창이 온전한 자동차는 일주일 동안 그 어떤 해나 변화도 겪지 않았던 반면에, 유리가 조금 깨져있던 차는 방치된 지 10분 만에 배터리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곧이어 타이어가 모두 도난당했고, 차는 낙서와 쓰레기 투기로 더럽혀지기 시작했으며, 급격한 속도로 파손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이 차는 거의 고철 상태가 될 정도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차의 유리를 조금 깨 놓았을 뿐인데, 유리창이 멀쩡했던 차와는 달리 오염과 파괴와 약탈의 정도에 있어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만 이 실험은 후에 깨진 유리창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은 사회이론이지만, 실상은 우리가 일상에서 늘 겪는 일이기도 합니다. 조금만 지저분하고 쓰레기가 한 두 개 떨어진 곳이면 금방 쓰레기가 쌓이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고 있는 죄를 즉시 회개하여 그 죄가 처리가 되지 않으면, 그 오물이 있는 곳은 급격하게 또 다른 오물들이 쌓여서 걷잡을 수 없이 오염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죄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에 걷잡을 수 없이 관영하여서, 그 오염의 정도가 얼마나 극심한지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지 않으실 수 없게 된 처지까지 오게 된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가인의 후손들은 점점 난폭해져 갔으며, 셋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영적 유산에 점점 무관심해져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현상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셨습니다. 창세기 65절의 여호와께서...보시고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역사적 개입을 위해서 사용된 말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창세기 1장의 반복구인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와 그 정점인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심히 좋았더라”(1:31)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5절은 죄악이...가득함과...”, 또한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렇게 악하다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이 말이 반복해서 사용된 것은 악의 수위가 어느 정도의 단계까지 왔는가를 말해줍니다.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관영함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물로 잠기기 전에, 이미 이라는 홍수에 의해 깊이 잠겨져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류의 타락과 더불어 심지어는 구별된 셋의 자손들의 부도덕한 행동까지 결국 악이 하나의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여 세상을 뒤덮어 장악한 상태가 홍수 이전의 세상의 모습이며, 온 지면의 타락은 결국 온 지면에 대한 심판을 불가피하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이 말씀에서 방주는 히브리어로 테바입니다. ‘테바직사각형 모양의 상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홍수 기사 외에 이 말이 사용된 것은 출애굽기 23, 5절이 유일합니다. 여기서는 바로의 명령을 피하기 위해 아기 모세를 담아서 나일강 갈대 숲 속에 숨겨두었던 조그마한 갈대상자를 가리키는 데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모세입니다. 모세는 노아홍수 사건을 기록하면서 특별히 자신의 경험과 관련하여 이 테바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테바라는 단어는 애굽어에서 차용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물에서 건짐을 받은 것과 같이, 자신도 같은 운명에서 건짐을 받은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두 사건 모두 테바라는 동일한 단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은 또한 언약궤를 지칭할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무상자라는 이름에서도 보듯이 노아의 방주는 단순한 항해용 선박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배라기보다는 물 위에 뜨는 거대한 상자였습니다. 단지 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방수 역할을 하는 역청만을 칠했을 뿐입니다.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장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하게 수행한 것을 언급함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거대한 방주를 짓는 것은 결코 노아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나무를 베고 날라야 했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노아의 가족들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올 많은 동물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일 역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크고 작은 동물들을 위해 10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에 먹을 음식을 모아 저장하는 일은 가히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한글개역성경에서 “(명하신) 대로는 원문으로는 케콜”, “(명하신) 모든 것대로라는 말입니다. 또한 준행하였더라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아사인데 성취하다“, ”완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사는 구약성경에서 많은 용례를 가지고 사용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하라”(“아사”)는 명령을 자주 받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이 강조하는 것은 분명히 나타나는 순종의 행동을 포함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표현(‘asah)이 언약궤를 만드는 것을 설명할 때에도 사용된 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언약궤를 만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행동을 포함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 말들은 120년에 걸친 노아의 인내와 믿음과 소망이 응축되어 있는 말씀이며, 노아가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온전히 성취하였음을 강조합니다. 노아는 어느 한 부분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어떤 일도 자기 임의대로 변명하지 않고 말씀하신 그대로 준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의 정확한 치수와 건축에 관하여 세부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확실한 지시를 주셨습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그렇게 강력하고 내구성 있는 큰 건축물을 고안해 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설계자이시고 노아는 건축가였던 것입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다 준행하여 자신과 가족, 짐승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 각종 불법과 불경건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찬가지로 절실하게 요구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에 해당하는 단어가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바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창조하시니라바라입니다. 바라는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사용할 수 있는 말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순수한 의미의 창조행위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위에서 언급된 아사는 약간 용법이 다릅니다. “아사는 창세기 1장에서 바라와 상호교대로 사용되어서 창조과정에서 대상들을 조성하거나 만드는 행동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입니다.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16절 말씀에서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에 사용된 말이 아사입니다. 그래서 아사는 이미 창조된 물질로부터 전혀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실 때 사용된 말이라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에서 핵심적인 두 단어가 바로 바라아사인데, 노아의 행동을 표현하기 위하여 다시금 이 아사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홍수의 기사는 단지 심판의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금 재창조하시는 사역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홍수에 관해 기록해 놓은 성경 말씀을 유심히 살펴보면, 창조 이야기 때 사용된 것과 공통된 단어들과 표현들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곱”(7:2,3,4,10), “남자와 여자/암수”(7:2,3,9,16), “그 종류대로”(7:14), “들짐승”, “”, “기는 것들”(7:8,14,21,23), “생명의 기운”(7:15,22)과 같은 구절이 창조기사와 홍수기사에서 함께 연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관심으로 볼 때에 홍수 기사는 창조의 기사와 많은 유사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7:8,9) “8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9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또한 이 말씀 중에서 들어갔으며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바우인데, 3인칭 복수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들어갔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주어는 노아가 아니라 동물들입니다. 이 말은 노아가 동물들을 모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종 짐승들을 방주로 인도하셨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를 돕는 베필을 아담의 갈빗대로 만드시고, 그 여자를 아담에게 창세기 222절에 이끌어 오시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도 바우가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방주로 이끌고 들어가신 행위를 새로운 창조의 행위로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홍수 이야기는 창조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홍수 이야기 속에 나타난 창조의 흔적은 창조하시는 하나님과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이 같은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유사성은 희망의 기별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홍수는 새로운 창조가 되도록 계획되었으며, 이를 통해 세상은 새롭게 존재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홍수 사건은 단순한 멸망의 사건, 심판의 사건을 넘어서서 죄로 인해 홍수를 겪고 있는 세상을 다시 한번 창조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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