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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⑩ 재해석된 나바야나(新乘)의 인도불교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3/03/06 [09:25]
암베드카르 박사에 의한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종교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⑩ 재해석된 나바야나(新乘)의 인도불교

암베드카르 박사에 의한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종교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3/03/06 [09:25]

새 수레로서의 현대 인도 불교는 기존의 불교 전통과는 조금 다른 이념과 목소리를 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붓다나 암베드카르 박사의 사회 정치적 관점이 일치하는 면도 없지 않다. 붓다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왕과 금력(金力)의 정점에 있던 재벌가와의 관계가 밀접했다. 왕권의 보호와 재정적 후원을 동시에 받는 종교지도자였다.

 

▲ 나그푸르의 딕샤부미(귀의의 땅) 성소를 찾는 인도 비구들과 재가신자들의 발 길이 그치지 않고 있다.  © CRS NEWS

  

현대 인도 불교에서 보살로서 추앙 받고 있는 암베드카르 박사는 인도의 식민 시대와 독립 이후 초기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도 지도자였다. 그는 해외에서 공부하고 1920년대에 인도로 돌아와 정치 운동에 참여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인도사회의 고질적인 불평등 계급인 카스트로 따진다면 지정카스트로서 하층 계급에 속했다. 인도인의 가족 구성은 그 수가 매우 많다. 암베드카르 박사는 열네 번째 자녀였다.

 

법학자로서 인도 정치권력의 정점에 서긴 했지만, 지정 카스트가 그의 발목을 잡았고, 자신은 물론 그의 주변 하층 계급들에게도 엄청난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이 존재함을 알고서 그는 개종을 결심하게 된다. 그의 개종초점은 하층 카스트로서의 우울한 계급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정치적 권리회복이었다. 그 자신부터 하층 카스트를 벗어나려면 종교적 편견에서 공동체를 해방시켜야 했다. 그것은 힌두교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선택으로서 다른 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그는 나바야나(Navayana, 새 수레)의 형태로서의 불교를 선택했다.

 

암베드카르 박사의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던 마하트마 간디와는 종교적 관점이 너무나 달라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암베드카르 박사는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마하트마 간디는 극구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암베드카르 박사는 하물며 인권주의자인 마하트마 간디마저 종교적 편견을 갖는데, 보통의 인도인들은 어떻겠느냐는 결론에 도달하고 불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35년경부터 불교로의 개종을 결심하고 그 후 20년 동안 불교 경전을 연구하고 새 수레로서의 나바야나(新乘)불교를 정립하기에 이른다. 그 이론체계로서의 주요 교리서인 붓다와 그의 가르침(The Buddha & His Dhamma)을 저술했다.

 

▲ 1949년 11월 25일 제헌의회 의장인 라젠드라 프라사드(오른쪽)에게 인도 헌법의 최종 초안을 제시하는 초안 위원회 의장 암베드카르 박사(왼쪽).  © CRS NEWS

 

암베드카르 박사는 불교를 연구하면서도 시크교와도 접촉했다. 시크교로의 개종 요청을 받아서 지도자들과 접촉했지만, 결론은 시크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류(二流) 정도의 지위를 얻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1950년 실론에서 처음 개최되는 세계불교도우의회를 참관하기도 했으며, 푸네에 있는 한 불교사찰에 드나들면서 헌신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불교에 대한 책을 쓰고 있으며 곧 완성한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버마를 두 차례나 찾았는데, 버마 랭군에서 열리는 세계불교도대회 참가였다. 1952년과 1954년 두 차례 참석했으며, 1955년에는 인도 불교협회를 발족시켰다.

 

▲ 나그푸르 대규모 개종식에서 연설하는 암베드카르 박사.  © CRS NEWS

 

1956붓다와 그의 가르침(The Buddha and His Dhamma)을 발간한 것이다. 그리고나서 실론에서 인도에 파견된 마하보디 소사이어티(大覺會) 소속인 비구 하말라와 사다띠사를 만나서 자문을 받게 된다. 하말라와 사다띠사 비구는 1957년 영국 런던으로 옮겨서 런던 불교사원을 설립하게 되고, 런던포교의 거점사찰로 성장시킨다.

 

암베드카르 박사는 사다띠사 비구의 조언에 따라서 19561014일 나그푸르에서 개종선언대회를 개최할 것을 계획하고 자신과 그의 지지자들을 위한 공식 공개 행사를 조직했다. 그의 아내와 함께 자신의 개종. 그런 다음 그는 주변에 모인 약 60만 명의 지지자들을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이 개종자들을 위해 삼보(三寶)와 오계(五戒) 다음에 22개의 서원을 규정했다. 그 후 그는 1956년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네팔의 카트만두를 다녀왔다. 이 때 한국의 고승들인 동산스님 청담스님 효봉스님과도 조우했다. 

 

▲ 세계불도대회에 참석한 동산스님 청담스님 효봉스님과 외국 불교지도자들.  © CRS NEWS

  

암베드카르 박사의 유저(遺著)로는 붓다와 카를 마르크스’ ‘고대 인도의 혁명과 반혁명이 있는데, 이에 대한 그의 작업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암베드카르 박사는 그의 최종 원고 붓다와 그의 가르침(The Buddha and His Dhamma)을 완성한 지 3일 후인, 1956126일 델리에 있는 그의 집에서 잠을 자다가 숨을 거두었다. 1948년부터 발병한 당뇨병이 악화되어서 결국 원적에 들고 만 것이다. 암베드카르 박사는 현대 인도불교에서 보살로서 추앙받고 있는 불교지도자이다.

 

요즘 같으면 그의 병은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사인은 약간의 의문점도 있다고 한다. 오늘날 인도의 현대불교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일만큼 크다고 할 것이다. 인도의 불교도들이 의지하면서 삶의 활력 동기가 되는 분이 바로 암베드카르 박사이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공항으로 보검스님을 마중 나온 인도 불자들.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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