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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⑭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바라나시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3/04/03 [07:55]
갠지스 강물에 까르마(業)를 정화하는 순례자들의 성지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⑭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바라나시

갠지스 강물에 까르마(業)를 정화하는 순례자들의 성지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3/04/03 [07:55]

어떤 종교도 사람들에게 백 프로 만족을 주지 못한다. 백 퍼센트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속세의 인간들은 영원한 행복과 위안을 추구하며 산다. 세속의 삶은 그야말로 고통이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일찍이 인간존재의 실상을 간파해 내고, 과감하게 도전했다. 탈출구가 없을까 하고 구도의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 한국 불자들이 갠지스강 조각배 위에서 ‘인간과 신, 그리고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조용히 관조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배 뒤편으로는 시신을 화장하는 화장터가 있고 또 한 쪽에서는 속세의 업장을 씻어내는 정화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결국 고행을 택하게 되고 6년이란 수도를 통하여 내면을 정화하고 본성을 통찰하여 우주와 통해서 등각(等覺)에 올라 깨달은 자가 되었다. 깨닫고 나서 붓다도 바로 이곳 갠지스 강변을 찾아 왔는데, 자신의 깨달은 법을 설할 상대를 찾기 위함이었다. 강변에서 조금 떨어진 사르나트(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을 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사르나트를 가기 전에 이곳 갠지스 강변을 찾게 되고 힌두신앙과 문화를 접하면서 인도에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 사바예토의 욕망을 갠지스 강물에 던져버리고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는 사두.  © CRS NEWS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현장은 없다. 생과 사의 현장을 바로 보여주면서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조용히 삶과 죽음을 관조(觀照)하게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곳은 아마도 이곳 바라나시의 강가()가 아닐까 한다.

 

인도인들에게 특히 힌두교도들에게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은 성지다. 이곳은 신성한 곳으로서 순례지이며, 죽음을 현장에서 보게 되고 죽는 자를 애도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숙연한 인간 실존 그 자체를 체감하게 만든다.

 

종교는 달라도 이곳에 오면 다 힌두교도처럼 신을 생각하게 되고 죽음이란 어디를 향하여 가는 것일까 하는 철학적 물음을 하게 된다. 아무 욕심 없어 보이는 사두의 눈빛에서 영성을 발견하게 되고 무소유의 삶을 사는 성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또 이 삶의 현장에서 처절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인간 실존을 자각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한다.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면, 죽음도 영원도 금방 사라지고 삶의 무게가 압박해 온다. 이럴 때 사람들은 어딘가 의지하고 싶고 빌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 가족이 잘되고 나도 잘되고 사회와 국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리게 된다. 

 

▲ 갠지스 강물에 업보를 씻어내며 새 삶을 향한 의지를 다지는 정화의식을 하고 있는 여인들.  © CRS NEWS

 

저마다 촛불을 강물에 띄어 보낸다. 어떻게 보면 부질없는 행위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의식(儀式)이 된다. 종교적 의례(儀禮)라는 것이 사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의 충정에서 발로된 하나의 의사표시가 체계화된 법식일 뿐이다.

 

바라나시는 인도는 물론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속적으로 거주하는 도시 중 하나이다. 아주 옛날 붓다 당시의 이름은 카시라고 불렀다. 사실, 바라나시는 여러 종교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아소카 시대에는 불교의 쉬라마나(유행승)들이 명상과 요가를 주도하면서 담론을 이끌었던 수행장소였다. 힌두교도들의 성지로 자리 매김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8세기 아디 샹카라라고 하는 베다 학자에 의해서 시바 신을 숭배하는 종파가 확립됐다.

 

이전부터 바라나시는 힌두교의 헌신, 순례, 신비주의로 넘쳐나는 중심지였지만, 샹카라를 위시한 힌두 성자들에 의해서 바라나시는 더욱더 힌두 성지로 부각되었다. 또한 신비주의 시인이면서 성자였던 카비르(Kabir)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 베를 짜고 있는 성자 카비르.  © CRS NEWS

 

카비르는 시인이면서 성자였다. 그는 박티 운동을 주도했다. 박티란 구원을 얻기 위해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박티운동을 주도한 이유는 폐쇄적이고 개인에게 머물던 힌두교의 사회

 

적 헌신을 위한 일종의 종교개혁성 운동이었는데, 큰 반향을 일으킨 중세 힌두교의 중요한 종교 운동이었다. 박티운동은 기원후 6세기부터 발생했으며, 15세기부터 인도 동부와 북부를 휩쓸었고 17세기까지 절정에 달했다.

 

바라나시를 찾는 순례자나 관광객들은 갠지스 강변에서 영혼을 정화하고 난 다음에는 허전함을 달래기라도 한 듯, 촉감이 부드러운 바라나시 비단을 찾는다. 바라나시 실크는 예부터 명성이 자자한 명품에 속한다.

 

▲ 금 은색 명주실로 두껍게 짠 양단.  © CRS NEWS

  

바라나시를 찾는 한국인은 대부분이 불자들이다. 한동안은 바라나시 실크가 인기가 있었으나, 최근에는 비단 쇼핑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갠지스 강변을 보고나면 바로 사르나트(녹야원)로 향한다. 물론 녹야원을 보고 나면 깨달음의 현장 보드가야 대탑(大塔)을 향해야 하므로 갈 길이 빠듯해서도 비단 가게는 그냥 지나치게 된다.

 

바라나시는 두 개의 강 이름이 합성되어 생겨난 이름이다. ‘바루나강과 아시라는 개울이 합하여 바라나시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주 옛날에는 카시라고 불렀는데,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의하면 이 도시는 산스크리트 어근 kaś- ‘빛나다에서 카시(Kashi)로 언급되었다고 한다. 바라나시를 빛의 도시’,‘저명한 도시로서 빛나는 도시로 알려졌다. 붓다 시대에는 카시를 배움의 자리라고 부르면서 순례했다.

 

나렌드라 모디 수상은 바라나시를 영성의 도시로 다시 부흥되기를 바라는 의회결의까지 하여 종교성을 부각하고 있다. 바라나시는 스쳐서 지나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도시이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현대판 쉬라마나가 되어 갠지스 강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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