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사철, 남녀노소의 아름다움과 쾌락은 영원히 이어진다
꽃과 性-‘神曲’과 ‘人曲’, 聖과 俗의 즐거움과 조화사시사철, 남녀노소의 아름다움과 쾌락은 영원히 이어진다
봄에만 꽃의 향연이 펼쳐지는게 아니다. 여름 들어선 6월에도 여름꽃 금계국 수국이 산책길을 장식하고 있다. 무더위에 아랑곳없이 화사하고 힘찬 모습이 나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준다.
지난 봄, 친구들과의 카톡방에는 수많은 봄꽃들이 올려졌다. 민들레, 튤립, 연산홍, 할미꽃, 이팝.사과나무.산사.모과나무꽃 등등...생소한 이름의 황매꽃, 송충이나무, 섬초롱, 원추리,금영화, 월계화, 수레국화, 바위취. 풍년화 등의 예쁜 모습도 만나게 해주었다.
젊은 시절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자태를 전달하며 즐겨 감상하던 때가 있었는데 꽃 탐닉은 자연스런 취향의 변화다. 플라톤은 ‘백발의 시기가 되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성욕에서 벗어나게 되어 행복하다“고 했는데 우리가 그 경지에 이른걸까. 쇼펜하우어도 ”성욕이 인간을 망상에 빠뜨리며 성욕이 소멸해야 비로서 완전한 이성을 찾는다“고 했다. 주체할 수 없이 왕성했던 정념의 노예 상태를 떠올려 보면 충분히 공감되는 말이다.
철학자의 성욕에 대한 발언을 카톡방에 올리자 한 친구가 반론을 폈다. 성적 쾌락 추구는 아직 대단히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역시 공감되는 말이다.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성욕은 살아있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정념 억제가 도덕으로 뿌리박힌 유교사회의 김홍도 ‘운우도첩(雲雨圖牒)’에도 노인의 성생활을 묘사한 그림들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 ‘성(聖)과 속(俗)’을 나누어놓고 금욕주의를 강조해온 게 인간의 역사였다. 그러한 도덕률을 만들어놓고 권력과 종교가 그 위세를 유지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인간 본성을 존중한 절제있는 쾌락주의마저 타락, 방탕, 음란이라며 억눌렀다.
성경 속 ‘오난’은 몸 바깥에 사정을 해 하느님에 의해 죽음을 당했으며(창 38:4-10), 그러한 ‘오나니’ ‘자위’ 행위를 죄악과 수치심으로 인식케 했다. 오늘날 자위는 성전문가들에 의해 ‘자기위로’의 행동이라며 권장되지만 여전히 음란하고 비밀스런 행위로 부정시된다. ‘아라한은 몽정도 하지 않는다’는 성스런 주장에 이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초기 불교 부파가 나뉜 것은 성적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은폐하는 부자연스러운 역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에 대한 정치와 도덕, 종교의 억압에 대한 반론은 핍박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면면히 이어져왔다. 그리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지난 4.10 총선 때 한 후보가 ”퇴계 이황은 ‘성관계 지존’이라 한 언급에 유림들아 시국성명까지 발표하는 선거용 해프닝이 벌어졌다. 성명서에서는 “근거가 있을 수 없는 모독”이라며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은 깨끗한 분”이라 강조했다. 이것은 오히려 ‘부부생활 잘 하고 자손을 이어간 분’에 대한 모독적 발언이 될 수도 있겠다. 인간 본능에 대한 위선적 은폐가 아직까지 잔재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월 교리강론서 "성적 쾌락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며 예의 진보적 발언을 했다. 그러나 “정욕은 '위험한 악'으로 이어진다"는 전통적 도덕관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제와 수녀들까지도 포르노에 노출돼 있다“며 포르노 경계령도 내렸다. 한편 사제의 결혼, 동성애 인정에 대해서도 진보적 성향인 듯 하다가 비판을 하는 오락가락 이중적인 태도와 강론을 펼친다는 논란도 생겨났다.
성과 속, 금욕과 쾌락, 선과 악, 자연스런 본능과 무절제한 타락에 대한 과도기적 정리 과정일까. 아니면 줄곧 반복되어 왔고 반복될 논란일까.
단테(1265~1321)의 ‘神曲’과 함께 14세기 이탈리아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보카치오(1313~1375)의 ‘데카메론’은 신곡과 비견되어 ‘人曲’으로 불린다.
신곡은 고대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젊은 시절 짝사랑했던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아 사후세계인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며, 신화 혹은 역사의 인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 그리고 그를 대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당시 기독교 신앙과 윤리 및 철학과 함께 다룬다.
데카메론은 페스트를 피하여 피에솔레 언덕에 모인 젊은 남녀 10명이 10일 동안 각각 하루에 하나씩 총 100편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신곡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게 성과 쾌락, 부패한 성직자 풍자, 야담과 설화, 세속적인 기지와 재치, 술수, 결단, 모험 등 다양한 소재의 현실세계가 재밌고 명랑한 분위기로 소개된다.
대표적인 예로 셋째날 첫 번째 이야기가 나에겐 흥미를 끌었다. 벙어리 행세를 하는 정원사가 수녀원에 들어가 8명 수녀들에 이어 나이든 수녀원장에까지 성적 욕망을 차례로 채워주는 이야기인데 결말이 더욱 재밌다. 벙어리 행세가 발각되지만 추방하기는커녕 수녀들의 행각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벙어리 정원사가 수녀원에서 하느님 은총으로 말문이 텄다“며 성인 반열에 올려 놓아 수녀원 집사로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자 당시 교회 실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여성도 남성처럼 욕정을 갖고 있으며, 자연스러운 욕정을 충족시킬 권리 또한 남성과 똑같이 갖고 있다는 것도 이야기하는 데카메론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또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인간다운 일"이라는 밀로 시작되는 ’데카메론‘은 가히 인간의 사랑과 행복을 말해주는 ’인곡‘이랄 수 있다.
단테의 신곡과는 전혀 딴판의 이야기를 한 보카치오는 그러나 단테를 대단히 존경했다. 100편으로 이루어진 단테의 신곡과 같이 데카메론도 100편으로 구성했으며 죽기 전에는 집필을 그만두고 단테 신곡에 대한 강의를 했다. 신곡과 인곡, 성과 속이 서로 통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단테가 영원한 진리를 상상한 것처럼 보카치오도 역시 영원한 구원을 상상했다고 펑가되고 있다. 단테의 구원은 신앙과 섭리로 이루어지지만 보카치오의 구원은 삶에 대한 사랑과 도전 그리고 그를 통해 쌓아올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지상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한편 단테를 천국으로 안내하는 베아트리체는 가장 고귀하고 순결한 플라토닉 러브의 상징적 여인이다. 동정녀 마리아와 동격으로 그려져 가톨릭의 비판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단테가 에로스의 감정없이 과연 베아트리체를 천국의 안내자로 등장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곡에서 나타나는 플라토닉과 에로스, 성과 속의 결합이야말로 신곡을 인간 세상의 고전으로 자리잡게 했고 신곡과 인곡의 조화를 이루고 감흥도 일으켰을 것이다.
단테, 보카치오 보다 2세기 뒤애 태어난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1533년~1592년)는 그의 수상록(Essais, 1580)에서 신곡과 인곡, 성과 속에 대한 인식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초기에는 스토아학파의 도덕론을 주로 다뤘다. 이성으로써 정념을 다스리는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차츰 회의론으로 기울어진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이나 가톨릭 교회의 교의, 신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선 자연의 행복, 육체적 쾌락을 중시한다. 그는 육체와 정신은 하나인데 어느 한쪽에 치중하면 오류가 생기므로 자연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올바르고 행복한 삶이라고 강조한다. 이 역시 성과 속, 신곡과 인곡의 조화 과정이라 볼 수 있겠다.
몽테뉴의 사상적 편력을 보면서 내 안에 그의 사상적 편력이 한꺼번에 모두 담겨져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이만큼 살아오면서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와 중용도 생각하게 된 것을 행운으로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다양한 사상의 편력과 변화를 거치는 내 모습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고 싶다.
봄 여름 가을 뿐 아니라 복수초, 동백꽃, 모란, 군자란, 포인세티아 등 겨울에도 꽃은 핀다, 영생불멸 하듯 사시사철 아름답게 피고 진다. 마찬가지로 남녀노소 불문, 성적 욕구 등의 즐거움은 끝이 없다.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우주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그 근본물질인 원자로부터 태어나 영혼불멸의 원자로 되돌아간다. 원자로 이루어진 생명으로 잠시 지금의 존재로 복과 기적을 누리다가 다시 근본으로 회귀해 편안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근본물질이 존재하는 한 또 다른 복과 기적이 다시 이루어진다는 행복감에 젖어 든다. 그래서 신곡과 인곡. 성과 속이 자연스런 조화를 이룬 인간 삶과 우주, 자연의 생명이 더욱 소중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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