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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탄의 승원 불교 공동체 왕성

보검 스님 | 기사입력 2024/08/19 [08:06]
10세기 이슬람 칸국의 공격 받고, 종교바뀜

호탄의 승원 불교 공동체 왕성

10세기 이슬람 칸국의 공격 받고, 종교바뀜

보검 스님 | 입력 : 2024/08/19 [08:06]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86)

 

불교라는 종교의 특징은 수행공동체라는 점이다. 아무리 이론이 뛰어나고 종교적 교리가 체계적이라고 할지라도 교리적 실천이 없다면 불교의 성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함께 모여서 수행하면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종교의 3대 요소는 무엇인가? 재론의 여지 없이 교조 교리 교도이다. 

 

▲ 호탄에서 발굴된 3-4세기 경의 불두(佛頭).  © CRS NEWS

 

 

그러므로 모든 종교가 공통된 과제이지만, 특히 불교라는 종교에 있어서 교도들의 공동체가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불교의 교도는 출가 교도와 재가 교도로 나눠 볼 수 있다. 세계불교계에서 이 출가 교도 수의 증감에 대한 이슈가 가장 심각한 나라는 한국이라고 본다. 불교의 출가 교도의 공동체인 승가 집단에 있어서 남방 상좌부인 테라와다 나라들이나 바즈라야나(金剛乘) 나라인 티베트 몽골리아 부탄 라다크 등은 비교적 출가 교도 수에 대하여 크게 문제점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말하자면 출가 교도의 공동체인 승가가 아직은 건실하다고 본다. 동아시아 대승불교로 일컬어지는 중국 한국 일본 대만 베트남 등에서 가장 취약성을 노출하고 있는 불교가 바로 한국불교 승가이다. 

 

▲ 호탄(和田)의 벽옥으로 만들어진 염주.  © CRS NEWS

 

비록 1천 년 전의 사막의 오아시스 나라들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긴 하지만, 우리는 타림분지의 호탄 불교에서 많은 것을 암시받게 된다. 외적 요인에 의해서 호탄 불교가 무너지고 말았지만, 호탄 불교는 한때 승가공동체가 너무나 강성했다. 호탄불교사를 리서치 해 보면 호탄의 수도원 공동체는 호탄 불교 문화의 핵심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증거는 중국의 인도 구법승 법현 법사의 기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법현법사는 4세기 경, 4개월간 머물렀던 경험을 여행기에 기록했다. 법현 법사는 호탄을 경유하여 인도로 들어가서 스리랑카에까지 갔다가 뱃길로 중국으로 귀향했지만, 법현 법사가 이곳 호탄에 들렸을 때 호탄 불교 승가공동체는 너무나 건실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무렵에는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불교 승려들을 위하여 호탄 승가에는 객실(客室)이 잘 준비되어 있음을 밝혀 주고 있다.

 

▲ 서티베트 구게 왕국의 톨링 수도원.  © CRS NEWS

 

법현 법사의 기록에 의하면 순례 승려들은 순례를 계속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수도원에서 제공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마티(호탄에 있는 수도원) 성벽 안에서 그는 수도원 내의 조용하고 규율 있는 생활 방식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승려들이 식당에 들어갈 때 그들의 태도는 경건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는다. 모두가 완전한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발우나 다른 그릇이나 기타 도구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손으로 사인을 해서 의사를 소통한다.“라고 했다.

 

▲ 고대 호탄의 투오풀루케둔 사원 유적.  © CRS NEWS

 

고마티(Gomati)와 고시르사(Gosirsa) 수도원은 법현법사와 현장 삼장 법사의 기록 덕분에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왕국은 한때 100개가 넘는 수도원의 본거지였으며 5,000명 이상의 승려를 수용했다. 최근 고고학 증거는 현대 도시인 호탄에서 남쪽으로 약 28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오늘날에는 무너진 벽, 도자기 파편, 큰 건물 꼭대기만 남아 있지만, 멜리카와트 유적지에는 한때 왕실 행정 건물과 수도원이 복합적으로 자리해 있었다. 호탄의 종교 및 정치 문화의 진원지인 멜리카와트는 한때 이 지역에서 번성했던 불교 문화에 대한 주요 고고학적 단서로 우뚝 서 있다.

 

호탄 불교 전통을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된 또 다른 사원은 투오풀루케둔(Tuopulukedun)으로, 이 지역에는 현재까지 호탄 지역에서 발견된 불교 사원 중 가장 잘 보존된 곳 중 하나가 있다. 원래 7세기에 건설된 투오풀루케둔 유적지는 2010920일부터 8월까지 발굴되었다.

 

목조 및 흙으로 지어진 사원의 유적은 길이가 40m x 20m로 외부 흙층이 있는 나무 프레임 위에 지어졌다. 사원 내부에는 부처와 그의 제자들을 그린 잘 보존된 조각품과 프레스코화 조각이 놓여 있다. 사찰의 네 벽 전체에는 대승 경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공들여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다소 제한된 공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자들은 이 지역의 다른 어떤 사원보다 사원 내에 밝은 색상의 프레스코화가 풍부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려진 내부 중앙에는 60피트 높이의 고타마 싯다르타의 석상이 서 있었다. 더욱이 부처님과 그의 보살의 동상과 조각은 사원 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조각상과 프레스코화는 실크로드에 있는 호탄의 편리한 위치 때문에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받은 다양한 영향을 반영한다. 조각상은 박트리아와 그리스-불교의 영향을 반영한 반면,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나중에 티베트와 중국 불교 수도원에서 발견된 것의 전주곡이었다.

 

▲ 호탄 지역의 폐허가 된 사원과 현관의 유적  © CRS NEWS

 

호탄 불교는 외국인 승려들의 순례를 돕는 것 외에도 호탄 문화의 구조 자체에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이는 번성하는 지역 수도원 공동체의 건설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호탄 시민들이 불교 신앙을 그들의 삶에 통합하도록 장려했다. 행렬 의식이 거행되는 6월 첫 2주 동안은 특히 그렇다. 호탄 왕족부터 일반 상인과 노동자까지 모두가 수도에 모여 이 2주 동안 왕의 새 수도원(법현)으로 마차를 제공했다. 법현스님이 일곱 가지 귀중한 물질(, , 청금석, 수정, 루비, 다이아몬드 또는 에메랄드, 마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아낌없이 채워져 있었다. 측면에는 두 보살과 함께 부처상이 눈에 띄게 표시되어 있으며 2주간의 휴일 동안 하루에 한 대의 마차가 운반되었다고 한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 인도 힌두 유랑 승려와 포즈를 취하다.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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