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티아 안세고, 쿠샨의 로칵세마(지루가참) 등의 불교 학승들 쿠차에 불교학 전수
고대 불교학 센터 천산 남로 쿠차파르티아 안세고, 쿠샨의 로칵세마(지루가참) 등의 불교 학승들 쿠차에 불교학 전수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88)
항상 하는 말이지만 불교가 인도에서 생겨났지만, 불교는 동점하는 과정에서 성장 발전하기도 했다. 모든 사상이 완숙한 상태에서 전달되고 수입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불교의 경우는 좀 달랐다. 불교가 중국까지 오는 동안 불교는 인도 북부 간다라에서 헬레니즘과 한번 사상적 충돌을 하였다.
다음에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사막 오아시스 나라에 와서도 불교는 변용되고 발전하면서 축적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타림분지의 타클라마칸 사막 오아시스 불교 왕국 가운데서도 쿠차 불교는 다른 왕국보다도 앞서갔음을 알게 된다. 오랫동안 쿠차는 타림 분지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오아시스였다. 중앙아시아의 대도시로서 실크로드 경제의 일부였으며 소그디아, 박트리아 등 중앙아시아의 나머지 지역과 접촉했으며, 따라서 남아시아, 이란, 중국 해안 지역의 문화와도 접촉했다. 쿠차의 주요 인구는 토하라인 또는 토카라인으로 알려진 타림분지의 고대 인구의 일부였다.
이들은 타림분지의 북쪽 가장자리에서 발견된 인도유럽어인 토하라어를 사용하던 민족으로 알려지고 있다. 토하라인은 고대 북유라시아인에서 유래한 인구인 초기 아파나시에보 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 중국 자료에서는 쿠차 북서쪽에 있는 일리 강 지역에 파란 눈과 붉은 머리를 가진 우순(오손족) 인구가 언급되어 있다.
‘토하라인’이라는 이름은 20세기 초에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 박트리아에 살았던 토카라인과 이들을 동일시한 학자들에 의해 붙여졌다. 이 식별은 일반적으로 오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타림의 토하라인을 박트리아의 토카라인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해 왔는데, 그 이유는 주로 이들이 상당히 다른 동부 이란 언어인 박트리아어 이외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하라’라는 이름은 타림 분지의 인도유럽어족 언어와 그 화자들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용어로 남아 있다. 그들의 실제 민족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아그니, 쿠치, 크로란 또는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 알려진 쿠치야의 아그니야라고 불렀을 수 있다.
중국 한나라 때 서역을 개척했던 장건도 기원전 2세기에 중앙아시아를 방문하기 위해 서쪽 지역을 여행했으며 쿠차에 들렀다. 중국 연대기에는 오순왕과 결혼한 한나라 공주 시준(세군)공주가 기원전 64년에 한나라로 보내진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도중에 쿠차에 들렀을 때, 오순왕과 결혼하기로 결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서(서기 111년 완성)에 따르면, ”쿠차는 ‘서부 삼십육국’ 중 가장 큰 나라였으며, 인구는 81,317명이었고 그중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사람은 21,076명이었다. 쿠차 왕국은 북부 실크로드의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여 번영을 가져왔고, 쿠차를 부유한 무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24년에 쿠차는 공식적으로 중국 조정에 복종했고, 127년에 중국은 타림분지 전체를 정복했다. 쿠차는 중국 한 왕조의 서부 보호령의 일부가 되었으며, 실크로드에 대한 중국의 통제는 예술 교류와 중앙아시아의 불교 전파를 촉진했다. 2세기에는 로마에서까지 사신이 이 지역을 방문했으며 파르티아의 안세고 쿠샨의 로칵세마(지루가참) 등의 불교 학승들이 쿠차에 들려서 한동안 머물렀고, 불교학을 전수했다. 인도에서는 축삭불과 같은 수많은 위대한 불교전교사들도 방문했다. 서기 150년경에는 서부 지역의 중국 세력이 쇠퇴하고 타림분지와 그 도시 국가가 독립을 되찾기도 했다.
”도처에 요새화된 도시가 있고, 그 성벽은 삼중으로 되어 있고, 내부에는 수천 개의 불교 사리탑과 사원이 있다. (...) 왕궁은 웅장하고 천상의 거처처럼 빛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화가 꽃피웠고, 인도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쿠차 승려이자 번역가인 쿠마라지바(344~413 CE)에 의해 번역되었다. 쿠마라지바는 카슈미르 출신 아버지와 쿠차 출신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쿠차가 카슈미르와 서방국가들과 유대가 좋았다면, 곤륜산 아래의 왕국들인 선선이나 동쪽의 투루판은 쿠차와 대립하는데, 중국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중국의 장군 여광(呂光)은 전진(前秦, 351~394)의 복건(富建, 357~385) 황제에 의해 군대와 함께 파견되었다. 여광은 383년에 쿠차를 정복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코리아 대표>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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