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회 승단은 수행자와 노비,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중세 유럽의 장원제 사회
신라 시대 왕실·귀족불교는 서민불교와 접화현상신라사회 승단은 수행자와 노비,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중세 유럽의 장원제 사회장정태의 한국종교학
종교는 전래지역에서 처음부터 왕실, 귀족을 상대로 포교(선교)를 하지 않았다. 서민들에게 전래하고 그것이 세력화되었을 때 국가는 그 종교를 공인이란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기존의 연구자들 일부는 종교의 공인과 전래를 같은 시점으로 주장한다.
먼저 한반도에 불교 전래시점을 살펴보면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임신(신라 내물왕 17, 백제 근초고왕 27 불기 1399, 서기 372) 여름에 진왕 부견이 사신을 보내 순도와 함께 불상, 불경을 고구려에 전했다. 백제 침류왕 원년 갑신(신라 내물왕 29, 고구려 소수림왕 14, 불기 1411, 서기 384) 9월 호승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와 백제의 불법을 전했다. 신라 법흥왕 15년 무신(고구려 안장왕 10, 백제 성왕 6, 불기 1555, 서기 528)에 신라에 비로소 불법이 일어났다. (이능화 1987, 『조선불교통사』,박영사, pp 34-36) 서민들로부터 시작된 신앙의 모습은 왕실과 귀족사회로 전래하면서 합법적 신앙이 된다.
한국불교의 전통모습은 수행과 함께 막대한 농장을 소유한 장원급 부와 그들의 일을 돕는 사노의 존재다. 신라 사회에서 승단은 수행자와 노비 그리고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중세 유럽의 장원제 사회였다.
법흥왕은 이미 폐지된 불법을 일으켜 절을 세우며 절이 완성되자 면류관을 벗고 가사를 입으며 궁에 있는 왕의 친척을 내놓아 절 종으로 삼고 절 종은 지금도 왕손이라 일컫는다. 후에 태종 왕 때에 이르러 재상 김양도가 불법을 믿었다. 두 딸이 있었는데 화보, 연보라 했다. 몸을 던져 이 절의 종이 되었다. 또 역신 문척의 가족을 잡아 와서 절의 노예로 삼았는데 이 두 가족의 후손이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았다. (『삼국유사』 제3권 흥법 제3 「원종흥법과 염촉멸신」조)
의상은 국왕이 의상을 존중하여 장원과 노복을 시주하려 하였을 때 의상은 왕에게 우리 불법은 평등하여 고하가 균등하고 귀천이 동규입니다. 또 열반경에는 팔불정재를 말씀하였는데 어찌 장전을 가지며 노복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빈도는 법계를 집으로 삼고 발우로써 곡식을 얻어 법신의 혜명을 기루어 살뿐입니다“하고 하나도 받지않았다. (송고승전 의상편 제2권 제4 의상전) 의상은 국왕이 내리고자 하는 토지와 노비를 거절하고 있다. 당시 신라의 사찰과 승려 개인은 많은 장원과 노복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시대 일대를 통하여 사원은 귀족적이었다.
이와같은 현상은 조선시대 불교 탄압기에도 일부 남아있다.
오교·양종을 파(罷)하고, 그 승도(僧徒)들은 법(法)을 알고 계(戒)를 지키는 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강제로 환속(還俗)시켜 각각 본업(本業)으로 돌아가게 하고, 전지(田地)는 모두 군수(軍需)에 붙이고, 노비는 관부(官府)에 나누어 예속시키소서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윤3월 22일 신해 2번째 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임금이 또 형조로부터 계주(啓奏)한 바의 법손(法孫)에게 물려 주는 노비(奴婢)는 전부 관(官)에 속하게 하도록 정하자는 뜻으로 계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근년에 사찰에 있던 노비를 모두 관에서 거두어들이나, 승려들이 여러 해 동안 부리던 것을 일시에 모조리 빼앗을 수가 없는 것이니, 뒷날에 군신 가운데 반드시 물의가 있을 것이다. 내가 부처를 믿어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인(仁)하지 못하여 미워하기를 너무 심하게 하면 난이 생긴다. 옛날에 환관(宦官)들을 모조리 없이 하려 하였다가, 변이 난 일이 있으니, 이것이 한 가지 증거가 된다."(세종실록 13권, 세종 3년 8월 3일 계사 4번째 기사 1421년 명 영락(永樂) 1421년 명 영락(永樂) 19년)
세종은 기존의 사찰소유의 노비를 파하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거부하면서 그 이유를 환관을 없앤 후 병폐를 예로 들고 있다. 세종보다 선대 태종은 토지와 노비 처분에서 알 수 있듯 사찰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도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고 이와 같은 흐름은 종교적 권위를 통해 현대사회에서 일정 부분 남아있다.
믿음의 주체가 아니라 종교단체를 이끄는 구성원을 통해 불교의 성격을 규정했다. 연구자들의 공통적 의식은 붓다는 왕자이며 제국의 후계자로 출가라는 어려운 선택을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지금으로부터 2천 5백 년 전 인도의 히말라야산맥 기슭에 도읍한 가비라성에서 태어났다. 가비라성은 그 옛날 가비라 선인이 수행하였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석가>라는 말은 <능하다> 또는 <훌륭하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네 왕자가 세운 나라의 백성을 사카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석가모니를 넣은 아버지는 정반왕이다. 그의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마야부인은 어느 날 6개의 뿔을 가진 빛나는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 구리로 해서 태안에 드는 꿈을 꾸었다. 바라문을 불러 해몽을 했다. 왕자님이 태어날 길조입니다.(武者小路實篤 지음, 박경훈 옮김, 『석가의 생애와 사상』, 현암사, 1990)
종교는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통해 신앙이 되고 점차 상층부로 전래
신라불교의 특징으로 왕실과 귀족불교로 연구자들은 규정하고 있다. 그 근거로 불교를 신앙하는 주체가 왕실 중심, 귀족 중심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와함께 통일신라 이후 저잣거리에서 포교하는 대표적 인물로 원효, 혜공, 혜숙, 사복을 통해 서민 속으로 불교를 포교를 주장하고 있다.
종교는 처음부터 전래지 권력과 손잡는 방식은 극히 드물다, 먼저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통해 신앙이 되고 점차 상층부로 전래한다. 최종적으로 왕실, 주류사회에 소개되면서 공인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래 과정을 무시한 채 불교의 고급화 이미지를 심기 위해 신앙의 주체를 왕실, 귀족 신분으로 규정해왔다. 이와 같은 전통적 연구방식은 현대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국불교에서 연구대상이 되는 승려, 신자들은 대상을 신격화 후 초월적인 존재로 만든다. 태어나는 과정은 물론 어머니 몸에 안착하는 태몽, 성장 과정에서 비범함, 집안은 언제나 좋은 신분을 가진 배경에 좋은 사람으로 묘사한다. 이와 같은 연구방법, 기술은 붓다의 가르침과 달리 세대 간, 지역 간 경제적 갈등을 노출하는 연구방법이 되었다. 현대사회에서도 진행 중이다. 검증되지 않은 이력과 출가자 학력 중시 풍토다.
자장은 김 씨로 본래 진한의 진골인 소판(3급 벼슬이름) 무림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가 요직을 두루 거쳤다.(『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 「자장의 정률」)
궁리가 대사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갈아 입히고 말리게 하였으므로 그곳에서 유숙하였는데, 공주가 과연 임신하였고 설총을 낳았다. (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 「원효불기」)
왕실과 연을 맺은 원효로 묘사되고 있다. 그와 가까운 의상은 진골 귀족이다. 불교공인 이후 왕실과 귀족의 신앙으로 되었고 그 대안으로 서민 신앙의 주창자 원효, 혜숙, 혜공, 사복 등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됨으로 한국불교는 왕실, 귀족불교에서 다시 서민불교로 보는 것이 한국불교의 본 모습에 가감 없는 접근이다. 이 과정에 접화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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