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모습은 중세교회의 타락상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에 과연 그의 개혁 정신은 살아 있는가. 한국교회야말로 루터의 개혁 정신을 되살려 제2의 개혁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루터가 부패한 가톨릭에 대항해 들고 일어난 무기는 성서였다. 이것은 정당한 무기였다. 그러나 그 해석과 사용법이 잘못되면 후세에 커다란 해독(害毒)을 남긴다는 교훈을 여기서 알게 된다.
성서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책으로서 성스럽고 존귀하다. 하지만 이 성서도 사람의 손에 의해 씌어졌다. 때문에 불완전 할 수밖에 없고, 더군다나 해석에는 불완전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성서로 교회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즉, 무오류 적 교회를 쓰러뜨리기 위해 무오류 적 성서로 맞선 것이다.
사실 성서는 교회보다 훨씬 더 큰 권위를 지니므로 루터의 공격은 주효했고 로마가톨릭은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부패한 가톨릭에 개혁의 불길 던진 루터
그러나 성서가 절대적 진리의 대상일 수 없으며 오직 절대적 진리요 경배할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성서가 존귀하기는 하지만 하나님 자신은 아닌 것이다. 성서 절대주의는 결국 우상숭배의 일종인 성서 숭배 사상을 낳고 말았다.
우상숭배가 해독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에서 이와 같은 성서 숭배로 인한 무서운 해독을 가져 왔으니 그것은 무엇보다 교파 분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루터는 기독교의 분열을 원치 않았으며 오로지 빗나간 기독교와 그 정신을 개신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개혁운동은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서야겠다는 갈급한 마음에서였다. 루터가 오늘 살아 있다면 우선 한국교회의 어지러운 분열상에 가슴을 칠 것이다.
교파 분열이야말로 루터의 개혁에 있어 가장 불미스런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한국교회의 경우, 예수교장로회란 이름만도 200여 개에 달할 정도로 부끄러운 교파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은 중세교회의 타락상과 비교해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게 중론이다.
복음에 순수했던 루터의 개혁 정신은 사라지고 다시금 중세 시대를 방불케 하는 교권주의, 권위주의가 판을 치고 배금주의 역시 만연된 상황이다. 과거 부패의 여러 원인 중 하나인 그 교권주의로 형제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복음의 종, 사랑의 종을 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을 위한다기 보다 신도 수 늘리기와 필요 이상의 대형화 물량화로 치닫고 있고, 강단은 회개 보다 싸구려 축복이 남발하고 있다. 예수 믿어 병 낫고, 헌금 많이 해야 사업 잘되고 돈 번다는 식의 싸구려 축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판 면죄부가 아닌가.
또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차이는 있을지언정 섬김의 직분으로 인식되지 않고 계급으로 인식된 직분으로 군림하려 든다. 이는 중세교회의 부패 중 가장 심각했던 교회제도의 계급화가 오늘 한국교회에 그대로 되살아나고 있는 꼴이다. 뿐만 아니라 세속의 물질만능 풍조가 그대로 교회 안에 흘러들어 교회의 거룩 성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세속을 성화시켜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속에 물들어 가고 있으니 교회 자체의 존재의의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용기 있는 제2의 ‘한국의 루터’나와야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있다.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는 이 세상의 낮은 자리로 오셨다. 예수가 원했던 세상의 어두운 곳, 부패한 곳을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이 어느 때 보다 절실한 때에 과연 교회의 위상은 오늘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가. 사회악에 무기력해진 교회, 그 권위를 상실한 교회 등 오늘의 한국교회는 과연 꺼진 등이요 맛 잃은 소금이란 말인가. 이제 교회는 루터의 개혁 정신을 되살려 교회다움의 자리로 돌아올 때 맛 잃은 소금은 제맛을 내고 꺼진 등불은 어둠을 밝힐 것이다. 모두가 회개의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새로워진 교회의 모습을 보일 때다. 그것은 기독교인 모두가 용기 있는 제2의 ‘한국의 루터’가 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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