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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안에는 부처님, 산신 등이 머물고 석공을 만나면 몸을 나투신다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4/11/13 [08:46]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바위 안에는 부처님, 산신 등이 머물고 석공을 만나면 몸을 나투신다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4/11/13 [08:46]

한국의 석공(石工)과 불교문화

 

석수(石手), 석장(石匠)으로도 불리는 석공은 돌을 다듬어 석조물을 제작하는 장인이다. 사찰이나 궁궐 등에 남아있는 불상, 석탑, 석교 등이 이들의 작품이며, 삼국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채로운 석조문화재가 전해지고 있어 우리나라의 석조물 제작 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석재 대부분은 단단한 화강암이 차지하고 있기에 화강암이 주재료로 사용되었고, 자연스레 단단한 화강암을 깎기 위해서 수준 높은 석조 제작 기술이 발전하게 된다. 풍화작용에 강한 화강암은 결이 치밀해 조각하기 어렵다. 그래서 한국의 석공예는 섬세한 조각보다는 선으로 특징을 잡아 표현하는 원만한 조각이 주를 이룬다. 거친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돌에 새긴 부드러운 선은 한국 석조문화의 독특한 특징이다.

 

석공들이 지녔던 뛰어난 예술감각과 창의성이 빚어낸 석조문화유산은 오늘날까지 세계 석조문화사에서 보기 드문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다. 한국의 석공들은 망치, 정 등을 사용해 거칠고 단단한 돌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수준 높은 석조문화를 꽃피웠다. 인류가 자연에서 채득한 물질 중 그 연원이 가장 오래된 돌은 여러 문화유산 중에도 연원과 양적인 면에서 가장 풍부하다. 주로 사용되는 돌은 화강암으로 강도와 내마모성이 좋고, 빛깔이 아름다우며 광택이 뛰어나다. 또 흡수성이 작고 돌결이 치밀하며 석질이 굳고 내구력이 있어서 가공했을 때 아름다움도 탁월하다. 흔히 석공들은 돌마다 품고 있는 모양새가 있어 그것을 보고 그대로 조각해 내는 것뿐이라고 겸손히 얘기하고는 한다.

 

 

▲ 인왕산 바위에 세겨진 불상(사진 위)과 바위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무속인. 허공기도는 물론 바위 안에 있는 부처를 향한 기도다.  © CRS NEWS

 

산길을 걷다보면 큰 바위아래 기도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미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위 안에는 부처님, 산신, 칠성 등이 머물고 있으며 인연있는 석공을 만나면 그 분들은 몸을 나투신다. 결국 우리가 우리의 견해를 가지고 기복신앙이라고 하지만 기도객은 우리보다 영적 능력이 탁월한 분들이다. 우리가 몰랐던 부처님, 산신이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과 언젠가는 인연있는 석공을 만나면 만 중생을 위해 나투실 것이란 믿음이다. 자식을 위한 기도를 하는 이면에는 어서 사바세계에 오시라는 염원을 담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산길에서 흔히 만나는 기도객들은 단순히 가정의 평화와 남편의 승진 ,자식들의 무탈을 기도하는 이기적인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바위속에 계신 부처님이 오셔서 이땅에 부처의 나라, 부처의 가피가 나와 우리라는 공동체가 함께 불은(佛恩)이 충만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올리는 지극정성의 기도다.

 

불상과 불탑을 조각하는 석공들은 단순한 기능공에 그치는 자들이 아니다. 석공은 불상과 불탑을 단순한 조각품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신앙과 숭배의 대상임을 분명히 인지한다. 자신이 행하는 작업이 커다란 공덕이 되리라 생각하여 작업에 들어가기 전 예의를 갖추고 지극한 마음과 정성으로 돌 안에 깃들어있는 부처님과 불탑의 모양을 찾아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석조물에 스며든 석공들의 땀과 노력은 불국사의 석가탑을 만든 아사달과 아내 아사녀의 이야기처럼 서민들에게 감동을 전해준다. 석공들이 공덕을 쌓으면서 남긴 불상과 불탑들은 오늘날 국보와 보물이라 불리며 우리들의 곁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백제의 미소 마애불

 

우리나라의 석조불상 중 특기할 만한 것이 바로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노출된 바위 면에 조각된 불상을 말한다. 조각된 면이 깊이 들어간 불감(佛龕)이나 사람의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큰 석굴 사원의 벽에 새겨진 것도 이 범주에 속할 수 있다. 마애불의 기원은 서기전 32세기경 인도에서이다. 아잔타(Ajanta)나 엘로라(Ellora) 등의 석굴 사원의 외벽과 입구 주벽에서 볼 수 있다. 중국에서도 운강(雲岡)·용문(龍門) 등의 석굴 사원에 많은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마애불이 제작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많은 수가 산재해 있다.

 

▲ 서산 용현리의 마애여래삼존상(사진 위)와 영험한 기운으로 무속행위가 빈번한 곳인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현존하는 마애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충청남도 서산 용현리의 마애여래삼존상(국보)이다. ‘백제의 미소라고도 불리는 이 마애불은 층암절벽에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백제의 마애불로 태안마애삼존불(보물)이 대표적이며, 신라의 마애불로는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과 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보물)을 비롯한 많은 마애불들이 있다. 특히 경주남산 일대에 많은 수가 존재한다.

 

마애불은 자연의 바위 면을 이용하므로 대부분 규모가 큰 작품이 많다. 또한 법당에 안치하는 불상과는 달리 경관이 수려한 자연 속에 위치하고 있어 외경심과 경건함을 더욱 고취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으므로 그 제작이 성행했다고 생각된다. 단단한 바위를 정교하게 깎아 불보살님의 아름다운 미소를 표현해낸 석공들의 기술에 실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 석조문화의 최고봉 석굴암의 본존불 및 전경, 주존불상과 주실 안의 존상들

 

석조문화의 최고봉 석굴암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조문화유산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을 제일로 꼽을 것이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세계에서 유일한 화강암으로 인위적으로 석굴로,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이 모셔져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 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은 이러한 문화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1995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석굴암의 본존불상이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는 걸작이라면, 불국사는 신라의 이상향인 불국토를 현세에 드러내고자 의욕적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불국사는 석굴암과 동시에 만들어졌는데, 불국사의 축조를 시작하고 지휘한 사람 역시 석굴암을 만든 재상 김대성이었다. 효심이 깊었던 김대성은 현생의 부모를 기리며 불국사를 세웠고, 전생의 부모들을 기리며 석굴암을 지었다. 이승에 불국토를 실현하는 것은 신라인의 오랜 꿈이었고,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바로 불국토라고 믿었다. 때문에 불국사라는 이름 자체도 신라인들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다. 불국사는 말 그대로 부처님 나라의 사찰을 뜻한다. 이것은 곧 불국사가 부처님의 나라가 현세에 실현된 낙원이라는 의미다.

 

▲ 석공인 고달과(高達) 소달(蘇達) 형제의 전설이 전해져 오는 여주 고달사지 승탑.

 

여주의 석공 소달과 고달

 

여주에도 석공인 고달과(高達) 소달(蘇達) 형제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두 형제는 본래 석공으로 각기 고달사와 흥왕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달사(高達寺)는 신라 경덕왕 23(764)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하고, 고달원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 즉 도봉원(道峰院), 희양원(曦陽院), 고달원(高達院) 중의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이었으므로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인 여주 고달사지 승탑을 비롯한 보물들이 남아있는데, 이들 석조유물들은 하나같이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사지의 규모로 보았을 때 창건 당시 고달사가 얼마나 광대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데, 사지에 남아있는 석조물과 관련해 석공 고달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달사를 지을 당시 석조물들은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고달은 고달사를 창건하며 절을 이루는데 정성을 다한 나머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자신의 가족들이 죽는 것도 모르고 온 원력을 모아 절을 이룩한 고달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여주에는 고달사와 더불어 형제와 같은 절로 소달이 건립하였다고 하는 흥왕사(興旺寺)도 있다. 본래 상왕사(霜旺寺)라고 불린 이 사찰은 고달의 형제인 소달이 세웠다고 하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형제지간이었던 고달과 소달은 고달사와 상왕사를 세웠는데, 각기 품은 뜻이 달라 고달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찰을 세웠으며, 소달은 진리의 도량으로 생각하며 오래도록 중생을 교화하는 절을 세웠다. 이러한 원력의 차이 때문인지 고달사는 현재 남아있는 사지만 보더라도 그 규모가 굉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반해, 흥왕사는 상대적으로 자그마한 모습을 하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두 사찰의 규모와 명성에 꽤나 차이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고달이 세운 고달사는 일찍이 폐사되었고, 소달이 세운 상왕사는 여전히 중생들에게 불법을 베풀면서 법등을 이어나가고 있다. 두 사찰의 현재 모습을 보며 부처님이 설하신 무상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동시에 여주에서의 불법이 끊이지 않도록 사찰을 세운 소달과 고달 형제의 은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망치와 정으로 단단한 돌을 다듬으며 불탑을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였던 석공들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보살에 대한 신앙과 사명감을 가지고 계속해서 돌 속에서 부처님과 불탑을 꺼내기를 반복하였다. 이렇게 쌓인 공덕은 지금 우리 후손들에게도 베풀어져 석굴암을 비롯한 세계문화에 빛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석공들의 은덕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공덕을 추모하며 석공예술을 널리 전파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칼럼은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이 소달문화연구원(원장 지행스님)이 주관하는 제12회 석공문화축제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 장정태 박사의 강연 모습.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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