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신약성서에 영항 준’ 법화경이 유독 한국서 관심받지 못하는 이유

장정태 논섫위원 | 기사입력 2024/11/27 [10:02]
일본 계통의 종단이란 인식, 배불정책 ‘천태종과 조계종의 억지합병’ 영향

‘신약성서에 영항 준’ 법화경이 유독 한국서 관심받지 못하는 이유

일본 계통의 종단이란 인식, 배불정책 ‘천태종과 조계종의 억지합병’ 영향

장정태 논섫위원 | 입력 : 2024/11/27 [10:02]

 

장정태박사의 한국종교학

 

일본불교의 특징의 하나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많은 경전 가운데 하나의 경전으로 종단이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단이 일본에 대표적인 종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장을 지내신 무진장 큰스님는 그러나 우리나라는 법화신앙을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순수한 의미에 법화신앙을 하는 전문 종단이 없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일본의 법화신앙을 하는 한 곳을 예로 살펴보면,

 

▲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단이 일본에 대표적인 종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일련정종은 니치렌(일연)의 직제자였던 닛코를 원류로 하는 종교로 소의경전은 법화경이다. 사진은 일련정종 총본산 다이세키지. 일련종정 홈페이지 캡처

 

일련정종은 니치렌(일연)의 직제자였던 닛코를 원류로 하는 종교다. 교조 니치렌 소의경전은 법화경이다. 일본의 일련종 및 일련종계 관계단체는 일련정종을 파문한 적도 있다. 1991년 일련정종은 창가학회를 파문했다. 창가학회는 일련정종과 완전한 결별을 하고 독립된 종교단체가 되었다. 교주 니치렌은 법화경의 제목을 따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독송하는 창제행을 통해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성을 몸에 나타내어 이번 생애에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경의 제목을 부르는 행위와 관련 근현대 불교사에서 법화신앙의 등장시기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선교양종으로 병합되면서 그 법맥이 사라지고 이후 일제하에서 법화사상 불모지인 한국에 법화계가 등장하게 되었고 해방을 거치고 50.60년대가 되면서 종단이 성립하게 된다. 이들 종단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일본과의 교류도 잦고 일본색을 많이 띠고 있지만, 나름대로 한국의 독자적인 법화신앙을 주장하며 성립됐다.

 

법화단체의 출범에는 김정운이라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인물이 있다. 1898년 수원시 복수동에서 태어난 승 김정운은 19세 때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 후 21세 때 수원의 용수사에서 임성진 화상을 은사로 수계 득도하였다. 그는 1924(26) 법화사상에 귀의하여 1927년 복수동에 법화계 최초의 사찰인 묘수사를 세웠다. 김정운이 법화사상의 체계를 세우는 데는 일본인 승려 安田上田의 도움이 있었다. 당시 국내에는 일본불교의 각종 유파가 들어와 성행하고 있었고 법화계의 단체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 불교계에서는 천태나 의천의 법맥이 전하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법화경 공부를 하려면 일본인 사찰밖에 없었다 한다. 이러한 일본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어 현재도 법화계에 왜색이 깔려있음을 느끼게 한다. (한국청년승가회, 한국불교종단조직실태조사보고서,1986, pp. 247-248)

 

법화계 종단의 특징으로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경전 제목을 염송하는 제목 봉창혹은 구창이라는 염불 수행하다. 이는 일반적으로 여타 불교종단에서 신앙대상인 불보살님의 명호를 염송한 데 비해 경전 제목을 염송하는 점에서 특이한 수행의식이 아닐 수 없다. (차용준, 종교문화의 이해(4) 전북대학교 출판부, 2002, p.693)

 

이법화는 자신의 저서 창가학회를 절복한다에서 창가학회를 외도, 사도로 치부하고 비판한다. 백의민족의 나아갈 길은 지금은 대 변혁시대이다! 일련정종 창가학회의 사교성을 여실히 밝힌 정의의 과연 일어 음으로 제목을 불러야 하나? 는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사회에서 법화신앙이 사라지게 된 원인과 관심을 받지 못한 이유는 조선에서 불교탄압과 함께 일본인들의 법화신앙 형태에 그 원인을 유추할 수 있다. 이기영은 법화경강의에서 일본의 법화계열 종단은 전투적으로 보았다.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법화경에 대하여 언급하고 해석을 가한 것은 아마도 원효대사의 법화종요가 될 것이다. 그 뒤에 불교 교학 면에서 본다면 대체로 천태종의 교리를 따른 것은 당연 지세라 하겠다. 특히 고려 대각국사에 따라 천태종이 성행되기는 했으나 일반 서민층에까지 깊이 신앙으로 전파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조 태종 7년 또는 8년에 이르러 왕명에 의하여 천태종이 조계종과 억지로 합병을 당했는데 이것은 배불정책 최초의 특징이라 하겠다. 이로 말미암아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수행은 그 자취가 사라졌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법화, 법화경의 신앙,영산법화사 출판부, 1978, pp 2-3)

 

조선 초기 한글을 창조하신 세종대왕께서 제일 먼저 불경을 한글로 출간하신 것은 너무나 유명하고 뜻깊은 일이며, 그 당시 법화경이 출간된 것은 물론이다. 이 법화경은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요, 모든 보살의 스승이요, 모든 중생의 스승이요, 또한 중생의 복전이요, 중생의 지침이며, 말법의 구원의 경이니 현세 행복의 근원이다. 또한, 대승의 근본이며 만법의 귀일처이니 공덕의 어머니요 중생의 어머니다. (이법화 역, 묘법연화경,불교교단 영산법화사 출판부, 1986, p.491)

 

대구지역에서 오랫동안 법화신앙을 한 재가수행자 한 분이 있다. “인생(人生)이 내 마음대로 안 되더라 그 답이 법화경 수행에 있다.”

 

법화경은 사람이 왜 고통을 당하는가, 어떻게 하면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해탈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는 인류의 교과서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이며 더 나아가 우리들의 이야기다.”

 

()법화교단 총장 최광영이 오래전부터 신문광고 한 카피 내용이다. 그는 주로 대구, 부산지역에서 활동 중이다. 개인적으로 1980년대 초 서울에서 몇 차례 만났다. 법화경수행에 이처럼 자신에 찬 사람은 일찍이 만나보지 못했다. 내 주변에 있는 대부분 사람은 경전을 보면서 그곳에서 알음알이만 찾을 뿐 우리 삶에 나침판을 경전에서 찾지 않고 있다.

  

▲ 신약성서가 불교의 법화경 및 기타 불경의 영향을 받아 히브리식으로 번안된 기록에 가깝다고 밝히는 내용을 담은 민희식 교수의 ‘법화경과 신약성서’

  

80년대 법화경을 통해 불교를 재해석하는 붐이 일시적으로 일어났다. 민희식 교수의 법화경과 신약성서는 신약성서가 불교의 법화경 및 기타 불경의 영향을 받아 히브리식으로 번안된 기록에 가깝다고 밝히는 내용이 담긴 책이다. 그 외 저서는 성서의 뿌리, 예수의 어린 시절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예수는 처음에 인도 중부 오리사주의 코나라크 주변의 힌두교 사원에서 약 2년간 그리고 베나레스 힌두교 성지에서 6년간이나 오랫동안 연수하고 그 교리를 완전히 통달한 연후 이를 비판하다가 그만 박해를 받아 불교로 전화하여 불교 공부를 한 후 다시 카슈미르의 라다크 티벳으로 갔다. 불교를 공부할 때의 예수 이름은 이사(ISSA)’라고 불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없었다. (민희식, 조병선 대담, 법화경과 예수,부림출판사, 1987, pp. 14-17) (이 책 pp.14-45에 걸쳐 두 사람의 대담은 이어지고 있다.)

 

법화경은 보물로 지정된 23개가 있다. 그런데도 한국 불자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아울러 종단 설립이 쉬워지면서도 법화계 종단 설립이 미흡 점도 함께 살펴보았다, 조심스럽지만 한 원인으로 일본에서 유입되면서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점도 있다. 결국, 한국사회, 불교 신도 단체 사이에는 법화경은 일본이나 일련스님 계통의 종단이란 인식이다. 이와같은 오해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당분간 종단 혹은 신행단체는 활동이 어려울 것이다.

▲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 CRS NEWS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