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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된 무속은 다양한 사람들이 믿는 종교형태를 갖춘 신앙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4/12/07 [10:03]
한국 무속의 올바른 이해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된 무속은 다양한 사람들이 믿는 종교형태를 갖춘 신앙

한국 무속의 올바른 이해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4/12/07 [10:03]

 

▲ * 무당은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서민으로서 세속의 풍파를 몸소 겪어내는 사제 사진은 영화 만신의 한 장면.

 

●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무속은 한반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문화인류학 전공자들이 몽골 샤먼과 연결하기 전까지 한국의 무속은 지금처럼 그냥 존재해왔다. 그 근원의 문제 이전에 사람들이 사는 공간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된 것이다. 몽골 샤먼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면 몽골 샤먼의 원류, 원형의 문제가 다시 발생하게 된다. 단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환인, 환웅이 살았고 내려온 곳이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묻는 바리새인들의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우리들 마음속에 있으면 된다. 그냥 그대로 바라볼 공간으로 내버려 두는 것과 같은 이유다. 무속의례에서 유사한 몸짓 하나를 찾아 유사성과 원조 논쟁이 필요하지 않다. 

 

과학과 합리성으로 본다면 무속은 미신이고 기성종교는 사이비

-종교란 그 종교인의 입장을 존중하는 틀에서 봐야

 

우리는 불교와 무속의 다툼을 삼국유사 천경림 사건에서 찾는다. 진흥대왕이 즉위한 5년 갑자에 대흥륜사를 지었는데(국사와 향전을 살펴보면 사실은 법흥왕 14년 정미에 개창한 후 21년 을묘에 크게 천경림을 베고 비로소 공사를 일으켰으며, 도량의 재목은 모두 그 숲 가운데서 취하기를 족하였고 계단 돌과 석감도 모두 있었다.(삼국유사 제3 불법을 일으킨 원종과 몸을 바친 염촉조)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 보자 소도적 무속의 신성시한 공간을 불교가 쳐들어 와 차지한 것인지 그곳을 차지하도록 도와준 것은 왕권이다. 권력자가 권력을 이용해 다른 공간으로 활용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왕조시대 그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것은 왕의 소유다. 그 외 사람들은 왕의 땅을 잠시 빌려 경작하고 거기에서 나온 수입 가운데 일정 부분을 소유주 왕은 세금 형식으로 집수하는 구조다. 결국, 현대식으로 보면 건물주와 세입자 관계이며 건물주가 세입자를 교체했다고 보면 된다. 그것을 종교적 갈등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무속은 다툼으로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한 노력보다 자신들의 공간을 내주었다.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해왔다.

 

▲ 무당은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상적인 삶의 희로애락을 철저히 체험하면서 살아간다. 평소에 사람들은 무당을 경원한다. 그러나 삶에 문제가 생겨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때에는 무당을 찾는다. 그림은 신윤복의 무녀도

 

무속은 다양한 사람들이 믿는 종교형태를 갖춘 신앙이다. 이것을 과학의 논리로 이해한다면 비합리적이다. 과학과 합리성으로 본다면. 무속은 미신이고 기성종교는 사이비다.

 

종교란 그 종교인의 입장을 존중하는 틀에서 봐야 한다. 그리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제삼자의 처지에서 본 종교는 비합리적인 교리와 모순이 다수 포함된 미신이다. 그리고 대부분 합리적이지 못한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무속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조건인 사제자(무당)와 무속인들을 찾아 상담과 굿 의례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신도()라고 주장한다, 구술되고 있는 내용을 통해 종교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종교적 요건 가운데 하나를 실례로 살펴보면 잡다한 내용을 조합한 것으로 순수하게 무속인들의 구송 내용이라 할 수 없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기존의 종교를 신앙하는 경우와 종교적 신행보다 사담의 기능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무속의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 무속인 스스로 종교 사제라는 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다른 종교 특히 불교와 습합은 물론 승려와 협업 관계로 의례를 집전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현상 특히 스스로 사제라는 인식이 없음에 대해 일부 연구자들은 그들(무속인)을 깨닫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스로 자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연구자라는 발상은 종교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무당은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서민으로서 세속의 풍파를 몸소 겪어내는 사제이다. 이들은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상적인 삶의 희로애락을 철저히 체험하면서 살아간다. 평소에 사람들은 무당을 경원한다. 그러나 삶에 문제가 생겨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때에는 무당을 찾는다. 무당은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제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서민들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나누는데 바로 이러한 힘이 오랜 세월 무속을 서민의 신앙로 유지시킨 원동력이다. 

 

* 무속을 비아냥대며 상대편 비방하는데 이용하지만 막상 자신도 뿌리깊은 무속에 젖어 있는 정치사회현장을 보게 된다. 무속을 비하하며 자신은 고결하게 만드는 이율배반적 세상에 대해 무속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한마디 거들고 싶다. 무속은 다양한 사람들이 믿는 종교형태를 갖춘 신앙이다. 과학과 합리성으로 본다면. 무속이 미신이라면 기성종교는 사이비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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