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은 불안...자국민에 화학무기 살포한 아사드는 러시아 망명
시리아 내전 종식에 IS 재건, 난민문제 등에 미국과 유럽 발빠른 대처기독교인들은 불안...자국민에 화학무기 살포한 아사드는 러시아 망명
시리아 내전이 반군 승리로 사실상 종식되자 IS 재건, 시리아 난민문제을 놓고 세계 각국이 발빠른 대처에 나서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은 9일(현지시간) 시리아 알아사드 정권 붕괴와 관련, 미국은 극단주의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가 시리아에 피난처를 재건하는 것을 막을 결의가 돼 있다고 말했다.
블링컨 장관은 이날 워싱턴 DC에서 열린 반부패 옹호자 시상식에서 행한 연설에서 "IS는 이 시기를 자신들 역량을 재확립하고, 피난처를 만드는 데 사용할 것"이라며 "우리는 그 일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때 와해되는 듯 했던 IS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가자전쟁)으로 중동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시리아 사막에서 전투세력을 모으고 테러범을 키우며 이슬람 칼리프국(이슬람 초기 신정일치국)의 꿈을 되살릴 준비를 해왔다.
블링컨 장관은 "우리는 시리아의 분열, 시리아로부터의 대량 이민 발생, 테러리즘과 극단주의 수출 등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갖고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미국은 "어떤 대량살상무기(WMD)나 그 부품도 시리아에 남아 악당들의 손에 떨어지게 하지 않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고 부연했다.
또한 유럽 각국은 시리아 출신 피란민의 망명 절차를 중단하고 있다. AFP 통신이 9일(현지시간) 보도한 바에 따르면 독일 연방이민난민청은 이날 시리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며 시리아 피란민 망명 심사를 보류한다고 밝혔다. 계류 중인 시리아인 망명 신청은 4만 7천270건이다.
영국도 시리아 난민의 망명 절차를 중단했다. 영국 내무부는 "현재 상황을 평가하는 동안 시리아 망명 신청 처리를 일시 보류했다"며 "우리는 새로운 문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망명 신청과 관련된 모든 국가 지침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그리스 정부도 시리아 피란민의 망명 절차를 중단하기로 했다. 프랑스 역시 조만간 같은 조치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오스트리아 내무부는 이미 허가한 망명 자격도 다시 검토하겠다고 했다.
현재 독일에 거주하는 시리아 국적자 약 97만 명 가운데 약 78만 명이 망명 자격을 얻었거나 신청한 상태이다. 유럽에서는 독일에 이어 오스트리아(11만 명), 스웨덴(9만 명), 네덜란드(8만 명) 등지에 시리아 출신 난민이 많이 거주한다. 유럽 각국 우파 진영은 시리아에서 온 피란민을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한편 이슬람 무장 반군에 의해 주요 도시가 점령된 시리아에서 기독교인들이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며 예배를 이어가고 있다,
10일 국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레바논-시리아 개신교 총연합회장인 조셉 카사브 목사는 8일(현지시간) 전 세계 기독교인에 보내는 기도요청에서 “무장반군 세력이 정부 통제권을 넘겨받은 뒤 첫 주일 기도회엔 참석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며 “들려오는 총성은 전쟁이 아닌 축하 총성이지만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이 두려워하고 있다”고 했다. 카사브 목사는 “앞으로 많은 도전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언젠간 시리아의 기독교인이 억압이나 박해 없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슬람 수니파 무장조직인 하야트타흐리르알샴(HTS)은 제2의 도시인 알레포에 이어 수도 다마스쿠스까지 점령하고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몰아냈다고 이날 발표했다. HTS는 극단주의자와 달리 기독교인 등 소수 종교인을 포용하겠다고 했지만, 현지 교계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보장받기엔 여전히 이르다고 보고 있다.
2011년 내전 발발 이전 시리아 기독 인구는 22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슬람 극단주의자 박해 등으로 최근 30만명까지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30년간 집권한 부친 하페즈 알 아사드 전 대통령에 이어 시리아를 세습 통치한 아사드 대통령은 우군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통치하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1965년 다마스쿠스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아사드는 부친이 권좌에 올랐을 때 불과 5살이었다. 일찍부터 군대와 정치에 관심을 보인 형제·자매들과 달리 과학과 의학에 관심이 많은, 온순한 아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형이자 장남인 바셀 알 아사드가 부친의 후계자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청년이 된 아사드는 권력에서 멀어져 다마스쿠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1980년대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안과의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이곳에서 나중 아내가 되는 아스마 아크라스를 만났다.
그러나 1994년 바셀이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하페즈 전 대통령은 다혈질이고 충동적인 성향이 자신과 닮은 막내아들 마헤르를 후임자로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마헤르의 나이는 27세에 불과했고, 고령이었던 하페즈 전 대통령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영국에서 안과의사로 일하던 바샤르를 급히 불러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2000년 하페즈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시리아 의회는 대통령 출마 연령을 40세 이상에서 당시 알아사드의 나이인 34세 이상으로 하향 조정했다. 그해 대선에 단독 출마한 알아사드는 99.74% 득표율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임기 초반 알아사드는 아버지와 다른 정치를 펼 것이란 기대를 받았다. 정보통신 기술에 관심이 많고, 외국어에 능통하며, 자본주의와 세계화를 수용하는 유학파 대통령에 시리아 국민들은 희망을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2011년부터 이런 환상은 깨지기 시작했다. 아랍권을 휩쓴 민주화 혁명 ‘아랍의 봄’이 시리아에 번지면서다. 알아사드는 시위대를 “테러 세력”이라고 몰아붙이며 군중에 무차별 발포를 명령했다. ‘피의 독재자’, ‘시리아의 학살자’라는 오명에도 알아사드는 자국민에게 염소·사린가스 등 화학무기까지 살포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이 같은 당국의 강경 진압으로 촉발된 내전이 14년째 이어졌다.
이 무렵 이슬람국가(IS)가 등장한 것도 알아사드 정권에는 호재였다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반군을 “극단주의 세력”으로 규정하면서, 자신이 이들로부터 국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선전전을 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아 인권네트워크(SNHR)에 따르면 2011년부터 올해 6월까지 시리아 정부군에 의해 숨진 민간인(20만1290명)은 IS 공격에 의한 사망자(5058명)보다 40배가량 많았다. 반군이 수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다음날인 8일 시리아 시민들은 알아사드 대통령의 초상화를 짓밟고 불태우며 환호하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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