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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과 예수 사이에 얽힌 비극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5/08 [07:29]
성경핵심난제연구

유대인과 예수 사이에 얽힌 비극

성경핵심난제연구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5/08 [07:29]

유대인의 최대 실수는 ‘만인의 하나님’을 ‘민족신 야웨’로 끌어내린 것이고, 예수의 최대 오점은 유대인을 증오한 나머지 사랑의 이중성을 낳은 것이다.     

근래 쏟아지는 종교 뉴스를 보노라면 종교에 회의를 느낄 때가 많다. 사랑과 자비를 부르짖는 종교가 세계 도처에서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우고 있다. 한국에서도 경미한 종교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불씨는 대부분 기독교(개신교)가 지핀다. 기독교는 타종교를 적대시함은 물론, 기독교 내의 다른 분파들과도 끊임없이 분쟁을 야기하고 있다.     

기독교의 이런 성향은 어디서 연유된 것일까. 성서의 구약시대 하나님과 선지자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를 무자비하게 다스렸다. 이스라엘의 존재기반과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바알브올을 숭배하던 이스라엘 백성 24,000명을 염병으로 죽게 했으며(민 25:1-9), 야웨신앙을 가진 이스라엘인과 바알신앙을 가진 이스라엘인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에서 도륙했다(왕상 18:40). 이런 처참한 살상은 이스라엘민족은 다른 신을 믿으면 절대 안 된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 피카소 작 ‘늙은 유대인’     © 매일종교신문

       
유대인 선민의식이 비극 초래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거의 유대민족의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출 3:6)며 유대민족의 하나님임을 천명했다. 아브라함에게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고 말했고,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으며,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 하겠다’(창 12:1~3)며 지극한 애정을 표출했다. 또한 이삭에게도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고 축복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는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창 28:25)며 각별한 사랑을 표시했다. 하나님은 ‘혈육 있는 자들의 행위가 패괴’하다는 이유로 당신이 사랑하는 노아와 그 가족만을 살리고 모든 사람을 홍수로 멸하기도 했다. 유대 정통주의자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확고하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백성인 자신들은 일반 백성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유대인 편애, 비유대인 차별은 실제 하나님의 뜻이라기보다는 유대인들이 ‘만인의 하나님’을 ‘이스라엘 민족신 야웨’로 만든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성격이 짙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와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들을 ‘사탄’으로 규정, 필멸의 적으로 간주한다. 기독교인들의 이런 의식은 어디서 싹텄을까. 유대교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민족적 우월의식(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인들 역시 예수(하나님)로부터 택함을 받고, 구원받았다는 종교적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잠시 예수의 언행을 살펴보자. 예수는 결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담은 4대 복음서는 예수의 유대교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부분 차지한다. 유대교인에 대한 증오와 비하, 차별성 발언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그릇된 신관과 선민의식을 앞세워 예수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에 격분했고, 그의 언행은 다분히 이율배반적이었다. 이를테면,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을 반대하는 유대교인들에 대해서는 증오하였다. 예수의 인류사랑은 실로 측량하기 어렵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마 5:44)고 말했고,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심 같이 너희도 만인을 사랑하라’고 당부했다. 또한 비판하지 말고, 형제와 화목하고, 죄 진 자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권면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과 증오 동시에 심은 예수    
    

반면, 유대교인에 대해서는 증오와 차별로 일관했다. 예수는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규정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양의 옷을 입고 노략질하는 이리로, 불법을 행하는 자로 표현하면서 “세리와 창기가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도 “저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요, 겉은 깨끗하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고,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자”라고 지탄했다. 또한 “독사의 자식들로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으며, 땅 위에 흘린 의로운 피가 다 그들에게 돌아간다”고 저주했던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인들에게 크게 실망했으며, 그 상실감을 제자 사랑으로 채우려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제자 사랑은 지대했다. 너희는 택함을 받았다(마 22:14),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너희에게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 많은 의인과 선지자가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다, 저희는 영벌(永罰)에 들어가나 너희는 영생(永生)에 들어간다, 너희는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며 격려했다.     

사실 예수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저들의 그릇된 시각을 바꿔 보려고 했던 것이다. 제자들에 대한 편애도 어디까지나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이 모든 것이 제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제자들의 마음은 반대자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들끓었고, 교만에 빠지고 말았다. 자식은 부모를 닮고, 제자는 스승을 닮는다고 했던가, 예수 제자들 역시 사랑에 대해 이중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예외일 수 없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사랑과 증오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양날의 칼처럼 한편에서는 사랑을 실천하고, 한편에서는 반대자들을 저주하고 숨통을 끊으려고 한다. 이것은 예수에게서 기인한 것임을 부인하기 쉽지 않다. 소위 정통보수파 기독교인들은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른다. 확고한 종교적 신념(?)으로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경멸하며 적대시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노골화되면 남들로부터 소외되기 마련이다. 남들과 원수가 된다. 기독교인들은 고립무원을 자초하지 말아야 한다. 시대의 중심은 항상 민중임을 잊어선 안 된다.     

종교적 분란을 일으키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은 일종의 왕자병에 걸려 있다.저들은남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를 좋아하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다. 저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예수, 기독교에 대한 비기독교인들의 증오심만 키워줄 뿐이다. 인종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종교든 우월주의는 평화를 저해하는 악마주의에 다름 아니다. 저급한 의식으로 종교간 화합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2천 년 전 유대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다시 상고해 보자.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의식에 젖어 목에 힘을 주며 살았고, 급기야 예수를 핍박해 십자가에 매달았다. 예수의 삶은 혁명적일만큼 유대교 해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이 와중에 사랑까지 왜곡시키고 말았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오늘의 기독교는 2000년 전 유대교와 예수의 전철을 밟고 있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와 ‘오직 기독교’만을 외치며,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독불장군이 되고자 한다. 세인들은 기독교인들의 독선과 아집에 넌더리를 내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고리 잘라내야   

      
기독교인들이 필히 지녀야 할 의식은 선민의식이 아니라 ‘이방인 의식’이다. 진정으로 구원 받고자 원한다면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자기 머리를 쥐어뜯어야 한다. 사도바울처럼 ‘나는 곤고한 자’라고 자탄해야 한다. 한국 가톨릭의 큰 인물 김수환 추기경도 생을 마감하며 자신을 ‘바보’라 표현하지 않았던가. 자기가 죄인임을 인식하면 자연히 낮아질 수 있다. 겸손해야 화목 한다.     

한국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안전판은 없다. 그동안 일부 기독교인들이 단군상이나 불상을 훼손해 타종교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으나, 최근에는 그 도를 넘어 불당 안에서 ‘하나님의 땅’을 선포하는 ‘땅밟기’ 행태까지 벌이고 있다. 이에 불교계도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자세다.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 위원장 혜경 스님은 “한국에서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같은 종교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단언할 수 없다.”며 기독교계에 경고메시지를 보냈다. 한국종교계에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하나님은 인류가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신다. 예수의 사랑도 만인에 대한 사랑일 때 빛이 난다. 이것을 직시한다면, 2000년 내려온 비극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 그 책임이 기독교인들 손에 쥐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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