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종교는 인간을 무릎 꿇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게 하는 힘
종단을 찾아 다니며 기도
필자 유년시절은 성당에서 노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성당에서 강냉이(옥수수) 죽과 과자를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성당에서 보고 듣는 것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서인지 지금도 하늘만 보아도 기도하는 습관이 되어 버렸다. 성당이나 교회 법당에 앉아 기도하면 마음이 편하고 좋아서 여건이 되는대로 찾아가 기도를 하고 있다. 침묵이 꽉 찬 성당에 앉아 여호와(야훼) 신을 생각하며 종교의 근본 뿌리를 더듬으며 비참한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며 기도한다. 영락교회 예배당에 앉아서는 그 어려운 시기에 교회를 세워 목회한 한경직 목사님의 삶을 추적하기도 하고, 천도교 회당에 앉아서는 최제우 동학창시자의 삶을 공부하면서 이분이 4대성인 이상이 되신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한민국이 세계 모든 민족을 선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깨닫게 했다.
조계사 법당에 앉아서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신도들이 저렇게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이 부담이 많으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의아한 것은 조계사 구내식당 중간에 예물이 차려진 중앙에 조왕신이 모셔져 있는 것이다.
어느 교회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때는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20대로 보이는 청년이 옆 좌석에 혼자 앉아서 전후에 사람이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앉고 기도하는 소리에 필자는 눈을 뜨고 한참을 그 청년을 주시했다, 청년이 일어나 나가는 것을 붙잡고 “누구하고 기도하는데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하나님과 직접 대화했다.”며 당당하게 나가는 것이었다.
돌아서가는 청년의 뒷 모습을 보며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린당할까 걱정했다. 종교에 큰 문제는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한국에는 자칭 하나님이라 하는 사람이 20여명이 있고, 재림주, 메시야, 미륵불, 정도령이라는 사람이 50여명이 종교 신문에 게재되어 있다. 그들을 신봉하는 사람이 200만에서 300만명이나 있다고 한다.
철야기도
철야 정성 400일째인 사람이 필자에게 참석해 달라고 했다. 필자도 40대에 하나님과 통한다는 영능자의 말에 속아 40일 철야기도를 하는 중 힘들어 대낮에 쓰려진 경험이 있어 어떻게 400일이나 철야기도를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고 참석했다. 목사님이 등단하여 호명기도의 기적을 말씀하시고 병원에서 사망선고 받은 남편이 기도 받고 완쾌되었다는 부인의 간증이 끝나고 참석한 신도들을 일어서게 하여 북을 치며 손을 치켜세우며 하나님을 큰소리로 부르며 외치는 것을 반복했다. 그 열기에 취해 사방에서 통곡하며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었다. 필자 좌석 옆 복도에 왜소한 20대로 보이는 여성은 온 몸을 흔들며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쓰러질 것 같아 필자가 붙잡아 내 옆자리로 앉게 하여 진정을 시켰는데도 한참동안 사지를 흔들었다. 아내는 ‘당신이 무언데 성령 역사하는 사람을 못하게 했느냐’고 핀잔을 한다. 필자는 이런 기도를 받는 ‘하나님은 어떤 심정일까’ 생각하며 종교의 근본뿌리를 더듬어 보게 했다.
기도의 근본을 돌이켜 본다
오늘의 종교는 신앙의 이름으로 주술(呪術)을 팔고 있다. 기도는 주문으로 바뀌고, 예배는 효능의 장터가 되었고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성찰이 아니라, 욕망을 관철시키는 주문으로 전락했다. 종교가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는 등불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불안과 탐욕을 이용하는 장사꾼의 시장으로 변했다.
신앙은 본래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자신을 돌아보는 내적 성찰의 행위가 되어야 하는데 오늘의 종교는 그 성찰의 힘을 잃었다. 기도의 내용은 “자기들 진영이 주도권을 잡게 해 달라”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 “병이 낫게 해 달라”, “자녀가 대학에 붙게 해 달라”는 식이다. 하늘을 향한 겸허함보다 계산과 거래의 냄새가 짙다. 그 결과 종교는 믿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영적 소비시장’으로 변질되었고 ‘효능 중심의 신앙’은 결국 주술적 사고로 귀결된다.
기도가 주술이 되고, 목회자가 무속인이 되며, 예배당은 복을 비는 점집으로 변하여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은 더 이상 영적 약속이 아니라 탐욕의 명분이 되었다. 주술화된 종교의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인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데 있다. 이성보다 신비를, 책임보다 기복을 선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비를 팔고 불안을 착취하는 시장
21세기 과학의 시대에도 ‘영적 해결사’들이 넘쳐난다. 종교의 이름으로 굿을 하고, ‘예언 비즈니스’를 벌이며, 하나님의 계시를 팔아먹는다. 이들은 불안한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면서 사실은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을 착취한다. 그 결과 신앙은 사라지고, 신비와 공포를 거래하는 시장만 남는다. 무속적 세계관의 부활은 곧 사회의 퇴행을 의미한다. 신앙이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되고, 인간의 책임이 하나님의 이름 아래 면죄된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정신의 퇴행’ '사회의 병리'다.
주술화된 종교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켜 맹신케 하여 종교 권력자에게 무한한 권위를 부여하고, 신도를 도구로 만들고,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하여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 아래에서 헌금과 봉헌이 강요되고, 그 돈은 종교 권력의 사유물이 된다. 윤리를 붕괴시켜 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부정도 용인되는 풍토가 생긴다. 주술화된 종교가 늘어날수록 사회는 비이성과 탐욕의 늪으로 빠진다. 그 결과 종교는 사회를 구원하는 빛이 아니라, 어둠을 합리화하는 언어가 되었다.
참된 기도는 주문이 아니라 성찰이다
진정한 신앙은 신비의 주문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길이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복을 요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 마음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참된 종교는 인간을 무릎 꿇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게 하는 힘이다. 주술을 버리고 성찰을 회복할 때 종교는 다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다. 기도의 언어도 “나에게 복을 주옵소서”에서 “내 안의 탐욕을 제거해 주소서”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신앙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영적 힘이 된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
오늘의 종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을 속이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종교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위기’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다. 종교가 주술의 그림자를 벗지 못한다면, 신앙은 결코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나의 신앙은 믿음인가, 아니면 주술인가?” 그리고 "나는 진정성 있는 기도를 하고 있는가?” 스스로 자기에게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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