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을 경계(警戒)하고 조심하라
부처님, 예수님, 동학창시자 최재우님과 다석 유영모님은 종교지도자들과 신도들에게 “신령은 정도의 길이 아니다. 경계하고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는 것을 필자는 종교 근본문제를 공부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오늘날 종교 현장에서는 “신령하다.” “성령 받았다.”는 표현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언뜻 같은 듯 하지만, 이 두 단어의 차이는 종교의 본질을 가르는 결정적 경계(境界)가 있다. 신령은 인간의 감정과 욕망에 반응하는 ‘자연적 영’이고 성령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초월적 영’이다. 그 근원이 전혀 다르다.
신령, 인간의 감응으로 빚어진 영
‘신령’은 한국 전통에서 신성한 존재를 포괄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산신령, 조상신, 무속의 영들처럼 자연과 인간의 혼이 얽혀 생겨난 ‘다신적·혼백적 존재’이다. 신령은 인간의 소망이나 두려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기도나 굿, 부적 등의 ‘주술적 매개’를 통해 효력을 나타낸다. 이 세계에서 신령은 인간의 욕망을 들어주는 존재이며, 그 작용의 중심은 ‘감응과 거래', 즉 인간 중심의 신비 체험이다. 그래서 신령 신앙은 종종 영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이고 주술적’이다. 사람답게 할 수 없다.
성령, 인간을 새롭게 하는 거룩한 숨결
반면 ‘성령(聖靈)’ 은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성령은 신의 본질인 ‘진리와 사랑, 정화의 영’으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힘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성령 체험은 외적 기적보다 ‘내면의 회개와 윤리적 갱신’이다. 그리고 ‘공동체적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난다. 성령은 인간을 도구로 삼지 않고, 인간을 새롭게 만든다. 따라서 성령은 신령처럼 감응의 영이 아니라, ‘진리의 영·구원의 영’으로 작용한다.
경계(警戒)가 무너질 때, 신앙은 주술로 추락한다
문제는 오늘날 일부 종교 현장에서 이 두 개념이 혼동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적과 방언, 예언과 환상을 성령 체험의 전부로 오해하고, 도덕적 갱신이나 사랑의 실천은 뒤로 밀려난다. 이때 신앙은 영적 깊이를 잃고 ‘주술적 효험 신앙’으로 변질된다. 성령의 이름으로 신령을 추종하게 되면, 종교는 하늘을 향한 길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신성화한 ‘주술의 늪’이 된다. 그 결과 종교는 초월이 아닌 거래의 장으로 추락한다.
종교가 회복해야 할 영의 본질
신령은 인간이 만든 영적 그림자이고, 성령은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숨결이다. 신령은 복과 재앙의 중개자이지만, 성령은 인간을 새롭게 하는 창조의 힘이다. 종교가 성령을 신령으로 바꾸어 부를 때, 그 순간 신앙은 하늘의 빛을 잃고 땅의 마술로 떨어진다. 오늘의 종교가 회복해야 할 것은 더 많은 영적 현상이 아니라, ‘성령의 윤리와 성령의 인간성’이다. 거룩한 영은 인간의 욕망을 들어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 욕망을 정화하고 새 사람으로 빚어내는 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신령에 사로 잡혀있는 종교에 의존하여 자신을 잃고 허공을 맴도는 귀신이 되지 말자’는 각오를 현대 종교인들에게 전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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