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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은 멍청한가? 아름다운 영혼인가? ”

신민형 | 기사입력 2026/02/23 [15:40]
사람 창조 부정하는 헛똑똑이 휴머노이드 로봇과 순진무구 손주들을 보며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은 멍청한가? 아름다운 영혼인가? ”

사람 창조 부정하는 헛똑똑이 휴머노이드 로봇과 순진무구 손주들을 보며

신민형 | 입력 : 2026/02/23 [15:40]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은 수십년전 나를 감동시켰다. 주인공 올렌카는 첫남편 연극 극작가와 살 때는 세상에 연극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가 죽고 목재상인 두 번째 남편과 지낼 때는 대화의 중심이 목재의 관리로 변했다. 그가 병으로 죽은 후 군소속 수의관을 만날 때는 동물들 전염병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는 여자가 된다. 수의관이 부대이동으로 떠났다가 결혼해 어린아들을 데리고 오자 올렌카는 그 가족을 자신의 집에 살게하고 자신은 작은방으로 옮긴다. 이후 그녀는 수의관의 아들을 자기 자식처럼 여기며 아이의 세계로 빠져든다. 아이들에게 교육과정이 너무 힘들다며 비판하는 생활이 행복하기만 하다.

 

귀여운 여인을 다시 읽을 때마다 올렌카의 행복해 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으며 사람은 이렇듯 매 순간 순수하게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누군가의 작품해설이나 평가로 인해 생긴 소신이 아니다. 작품을 접하고 순간적으로 느낀 감동이 지속되었고 올렌카에 대한 다른 평가는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 내 주변 환경과 교육의 영향이 그러한 사고를 형성시켰을 테지만 내 믿음의 확실한 원인을 몰랐다. 그러나 그 믿음도 이유도 모르게 바뀌어 갔다. 올렌카의 적응 잘하는 순종적, 긍정적 사고가 어느 사이에 멍청하고 수동적인 삶을 연상시키게 됐다. 올렌카에 대한 내 소신의 변화같은 상반된 평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로선 참 신선한 발견이어서 흥미로웠다. 

 

▲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과 영화 ‘귀여운 여인’. 영화의 ‘귀여운(Pretty)’은 매력적인 외모를표현하는 영어 형용사이고 소설의 귀여운(Dushink)는 ’맑은 영혼‘을 표현하는 러시아어로 그 의미에 차이가 있다. 입센 ’인형의 집‘ 노라는 두 ’귀여운 여자‘와 다른 가부장적 사회에 대항하는 여성형이다.  © CRS NEWS

 

올렌카는 입센의 인형의집에 나오는 노라와 비교되며 무능력하고 주관없는 여자로 비춰졌다. 노라가 폭력적 가부장사회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페미니스트의 모습은 현대여성은 물론 남성들도 공감케 했다. 그에 반해 올렌카는 타인에 의지, 자신의 사고조차 멈춰버린 명청한 전근대적 여성이 되어갔다. 똑같은 제목의 영화 귀여운 여인’(1990년 작품)에 나오는 창녀 비비안(줄리아 로보츠)의 당당한 자아찾기와는 거리가 먼 가련하고 수동적인 여인으로 폄훼됐다. 현대판 신데렐라 비비안은 현실성 떨어지지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여성상이 올렌카보다 매력적이었다.

 

나도 은연 중 그러한 시대 사고에 물들어 간 것이다. 한 때 자신감 넘치는 페미니스트들과 교류하며 그들과는 다른 올렌카 같이 순종적이고 순수한 아내를 풍자한 적이 있다. 부모에 효도하고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아내에 고마움을 표하진 못할망정 착한 여자 콤플렉스라고 지적 했으니 두고두고 후회한다. 똑부러진 여자들에 잠시 한눈 팔았던 것이 혹 아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현재의 내게도 상처가 된다.

 

영화의 귀여운(Pretty)’과 소설의 귀여운(Dushinka)’은 그 의미부터 다르다. ‘Pretty'예쁜‘ ’매력적인등 외모를 표현하는 영어 형용사인 반면 ’Dushinka‘맑은 영혼을 표현하는 러시아어이다. 톨스토이는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을 분명하게 평가해준다. 톨스토이는 체호프가 올렌카를 풍자하려고 썼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여성의 가장 숭고한 영혼을 그려냈다고 평했다. 그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그와 일체화되는 올렌카의 헌신성을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보았으며 자아찾기나 지성보다 높이 샀다. 올렌카야말로 가장 선하고 긍정적인 여인이라는 것이다. 수동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사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성스러운 공감 능력을 갖춘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에게 올렌카는 맑은 영혼을 추구하는 주체성 갖준 귀여운 여인이다.

 

지금은 나도 수십년전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을 읽고 감동받을 때로 돌아왔다, 올렌카와 아내를 재평가하게 되었음을 다행스럽게 느낀다. 또한 나는 내가 귀여운 여인같이 귀여운 사람이었음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어릴 적 외할머니의 정화수 앞 기도에 호응하고 곰방대 담배 냄새를 즐기는 귀여운 아이였다. 국민학교 시절엔 구호물품 나눠주는 교회에서 예수님을 찬양하고 미국을 선망하는 귀여운 어린이였다. 김일성은 뿔달린 사람으로 여기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모범적 학생으로 공교육에 아무런 의심이나 의혹을 갖지 않고 지냈다. 그러한 교육으로 공산주의보다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청년으로 자라났으며 특정 좌우이념과 인물에 솔깃해 신봉하던 때도 있었다. 이것저것 다 무의미하다며 불교적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 생각과 주관없이 산 것이 아니다. 그때 그때 시대에 순응하며 선하고 긍정적으로 지낸 귀여운 사람이었음을 자부하고 싶다. 

 

▲ 세계적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생각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내적 성찰을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결론을 냈다고 한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가운데 회의도 하는 휴머노이드 로봇도 귀엽게 느껴진다.

 

최근 화학자이자 세계적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생각하는 로봇-큐티편을 읽으며 호모노이드 로봇과 귀여운 여인’ ‘귀여운 사람을 연관시켜 보았다. 큐티는 인간이 자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로봇보다 나약하고 효율성 떨어지는 인간이 로봇을 만들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틀동안 내적 성찰에 집중해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사람의 말에 순종적이었던 귀여운 로봇이 나름의 생각과 주관을 가진 AI 로봇으로 변하고 있다. 완성된 제품으로서의 로봇의 역할엔 충실하면서도 그러나 나라는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갖는다. 사실 인간이 고안한 AI가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들었는지 인간이 만들었는지의 1원인을 분간할 수 없지 않은가. ‘휴머노이드 로봇귀여운 로봇을 연상하면서 사람과 신과의 관계를 보는 듯해 웃음이 나왔다. 사람이 그렇듯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가운데 회의도 하는 휴머노이드 로봇도 귀엽지 않은가.

 

지난 설날 손주들과 광교호수공원을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손주들이 내 느린 걸음에 보조를 맞추느라 공원길을 왔다갔다 하면서도 끊임없이 재잘거리는게 즐거웠다. 그러다가 엉뚱한 질문을 던져 나를 당황케 했다. AI 시대가 되더니 초등학생 지식도 무섭게 성장하는 듯했다.

 

▲ 손주들과 광교호수공원 산책을 하다가 ‘빅뱅과 우주탄생’ ‘인간창조’ ‘하나님 존재’에 대한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AI 시대만큼 종잡을 수 없는 아이들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상황에서나, 누구에게나 공감, 감사하고 가족과 주변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 CRS NEWS

 

할아버지, 호수와 땅은 어떻게 생겨났어?”라는 손자의 질문, 이어지는 지구는?”이라는 손녀의 물음에는 교과서에 나오는대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주탄생과 빅뱅, 하나님에 대해 물을 때에는 당황했다. 빅뱅에 대해선 나로선 확인할 수 없어 과학자들의 상상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대뜸 하나님도 상상에서 나온거야?”라는 질문엔 말문이 막혔다. 특히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찬송가를 신나게 부르는 외손주들에게 그렇다고 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창조론과 부활을 믿는 손주들한테도 혼란을 주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손주들이 성장해 혼란스럽지 않게끔 하는 내 대답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의 혼란스러움도 정돈해주는 것이었다. 맑은 영혼 올렌카라면 어떻게 이야기하고 행동할까를 떠올려 보았다. 러시아정교회 신자인 올렌카가 만약 당시 조선에 살았더라면 무속신앙과 불교에 심취했을 것이고 서유럽에 살았더라면 개신교 신자로서 진심이었을 것이다. 영혼이 맑은 순수한 사람은 몰입을 잘한다. 그 시대에 따라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순수한 초심에 그녀의 남편과 연인에 공감했듯이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향복해 했을 것이다. 또한 인형의집노라영화 귀여운 여인’(1990년 작품)비비안의 처신에 모두 공감했을 것이다. 순종적인 로봇과 생각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에도 공감했을 것이다. 자신의 공감력이 멍청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주체적이듯이 모든 것들이 주체성을 갖고 있다고 인정했을 법 하다.

 

설날 식탁에서 기도랄 수도 있는 내 감사의 말을 나 스스로 새겨가며 애들에게 들려주었다. 종잡을 수 없는 예측 불가의 AI 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상황에서나, 누구에게나 공감, 감사하고 가족과 주변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것뿐이라는 올렌카의 마음을 담았다.

 

내년 설엔 첫 손녀 서윤이가 중학생이 됩니다. 올해 막내 외손자 해준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내년 설엔 아내가 고희입니다. 아들과 딸 부부가 모두 40을 넘겼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 별다른 탈없이 지내왔습니다. 기적이고 선물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삶을 개척해나가며 애들 교육에 신경써야 하는 40대의 고충과 스트레스는 큽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AGI 시대에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손주들도 끝없는 경쟁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 노부부만 그들 덕분에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지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AI 시대 예측가이자 과학자인 아이삭 모프나 레이커즈와일, 기업인 테슬라는 곧 인간노동은 AI 로봇에게 맡기고 기본소득으로 취미생활을 즐기는 지상낙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10대들은 영생도 누릴 수 있다고 예언합니다. AI 로봇이 인간을 앞서는 초지능과 감성을 갖추는 상황도 예견합니다.

 

모두 긍정적으로 낙관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도 역경과 갈등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만이 이를 극복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 가족이 예측불가능한 미래에 스트레스 받고 갈등을 겪는다 하더라도 기적과 선물같은 삶에 감사하며 주변에 대한 충만한 공감, 사랑, 연민으로 살아 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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