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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⑬모든 민족과 바벨(1)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22/11/21 [14:23]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⑬모든 민족과 바벨(1)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 | 입력 : 2022/11/21 [14:23]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11:9)

 

홍수 후에 함과 후손들로부터 시작해서 바벨탑을 쌓은 세대들까지의 모습을 보면 인간의 죄악의 역사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바벨탑 사건을 통해 피상적으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흩으셨다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의 본문을 살펴보면 인간의 마음에 스며든 죄악으로 인해 안타까워하시며,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창세기 9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는 말씀처럼 노아의 세 아들들로 인해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918절을 보시면,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장차 닥칠 일을 염두에 두고, 함의 아들 가나안이 미리 언급이 됩니다. 왜 함의 아들 가나안을 미리 언급할까요?

 

창세기의 저자 모세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면 만나게 될 가나안 사람들이 왜 그렇게 깊이 타락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했는지를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 부패의 뿌리인 가나안의 아비함에게로 독자들을 이끌고 갑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9:20,21)

 

이 말씀에서 포도주가 성경에 처음 소개되면서 그 파괴적인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노아가 포도를 심은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포도나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발효되지만 않은 것이면 포도즙은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여기 21절의 포도주는 히브리어로 야인”(Yayin)인데, 포도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야인은 성경에서 주로 발효되어 취하게 만드는 음료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문제는 노아가 이 음료를 마시고 취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수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던 믿음의 사람이 이렇게 어이없이 넘어지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말 속담에 노루 친 막대기 3년 국 끓여먹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과거에 잘한 일, 성공한 일을 가지고 사골국 끓이듯이 우려먹고 또 우려먹는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이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과거에 뜨거웠던 믿음의 경험이 오늘 나를 계속 이끌어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죽노라” - 매일 매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굴복하고 맡기는 경험을 통해서 승리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사실 노아의 실수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표를 보시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노아의 술취함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노아의 술취함

첫 시작(창조)

1:1~2:3

새로운 시작

9:1~17

과일을 먹음

3:6

포도주를 먹음

9:21

벌거벗음을 깨달음

3:7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발견함

9:22,23

벌거벗음을 가림

3:7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가림

9:23

가인의 저주

4:11,12

함의 후손의 저주

9:24,25

셋의 후손의 축복

4:25,26

셈의 후손의 축복

9:26,27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9:22)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함이 취한 행동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아들이라면 마땅히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 드렸어야 합니다. 셈과 야벳의 대응을 통해 보더라도 그것이 정상적인 자녀의 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함에게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기서 하체라는 말의 히브리어 에르와아라에서 파생된 말인데, 넓은 의미에서는 벌거벗은 상태를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로는 성기, 생식기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보고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와야르인데,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흥미를 가지고 주목해 보았다라는 말입니다.

 

또한 두 형제에게 알리매에서 알리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동사는 와야게드인데, 이 말은 누설했다라는 말입니다. 함은 단순한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갖고 말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리거나 숨겨주기 보다는 드러내고 흉을 보는 죄를 범했습니다. 함은 형제들까지도 아버지의 수치를 목격하고 쾌감을 느끼도록 충동질하였습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9:23)

 

하지만 23절 말씀을 보시면 셈과 야벳은 함과는 대조적으로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도록 조치를 취합니다. 모세는 함의 행동과 대조하기 위하여 이들이 아버지의 몸을 덮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이 말씀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최초의 효도의 기사인데, 비록 십계명이 성문화되기 이전이라 할지라도 부모에 대한 존경이 가장 기본적인 도덕 중의 하나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노아는 술에서 깨어나 이성을 되찾은 이후에 자기가 잠자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9:25)

 

함의 후손은 이 말씀처럼 그의 형제인 셈과 야벳에게 종들의 종의 위치에 서도록 저주를 받게 됩니다. ”종들의 종이란 말을 원어로 보면 최상급의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 말은 가장 비천한 종을 의미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함의 후손은 저주를 받고 아프리카로 가서 흑인의 조상이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흑인은 저렇게 저주를 받아서 피부가 검어졌구나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본문을 이용하여 누군가를 향한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어야 하겠습니다.

 

노아는 홍수 이후 350년을 살고 950세에 죽었습니다. 노아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셈과 야벳을 축복하고, 함을 저주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홍수 심판 이후 새롭게 출발한 노아와 세 아들의 마지막 사건은 여전히 인류 안에 죄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의인으로 칭함받은 노아였지만 술취함의 실수를 범하였고, 함이 아버지를 멸시한 것은 그들 이후로 등장할 자손들이 다시금 하나님을 멸시하는 불경건한 역사가 반복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데, 노아의 세 아들에 대한 인류번성의 기록이 전개됩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르는 5장의 계보에 이어 창세기 10장은 노아에서 시작해서 세 아들들로부터 이어져 내려가는 인류의 뿌리 및 기원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창세기 91절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이며, 또한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919절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의 역사성을 강조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수명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분명히 존재했던 실제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둘째, 그것은 고대에서부터 저자가 살던 시대까지의 연속성을 보여줌으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연결을 확고히 합니다. 셋째,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로 인한 저주의 비극적인 효과, 그리고 그 저주가 뒤이어 등장한 세대들에게 끼친 치명적인 결과를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창세기 10장의 계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 10장에서는 70개의 명단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장에 나오는 계보는 먼저 세 개의 줄기로 퍼져있고. 그 다음에 다양한 종족의 근원이 되는 70개의 가지로 세분되어 있는데, 야벳의 계보가 14, 함이 30, 셈이 26명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숫자는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완전수라는 유대인의 개념을 따른 것으로 보여집니다.

 

창세기 4627절을 보시면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뿌리가 되는 야곱의 집을 소개하면서 70명이라고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249절에 보시면 이스라엘의 70장로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몇 명을 보내셨습니까? 누가복음 101절에 보시면 칠십 인을 세우사그들을 각 동네와 지역으로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7’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는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그 숫자 자체가 충만하다’, ‘맹세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언약적 관계의 표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10장은 단순히 노아자손 70명의 이름의 목록이 아니라 ‘70’이라는 숫자를 통해 우리에게 완전한 구속의 역사를 가르쳐주며, 이 복음이 전해져야 할 대상은 모든 민족 전체를 포함한다는 것을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일람표는 인류의 단일성을 선포하며, 모든 사람들이 공통의 근원에서 내려왔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의 지리적인 위치나 그들의 신체적인 모습, 또는 그들의 민족적인 특성들이 지금은 다양하지만, 노아와 그의 세 아들들에게로 그들의 근원을 추적해 올라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명부는 다음 장에 설명된 언어의 혼잡으로 인하여 인류가 분산된 이야기를 지지해 주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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