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영성, 이성으로 이해, 해석, 제시하기 보다는 삶 자체를 감성으로 긍정하자"
지성과 영성이 감성과 만날 때 완성되는 삶과 행복"삶을 영성, 이성으로 이해, 해석, 제시하기 보다는 삶 자체를 감성으로 긍정하자"
하늘소풍길 단상
도서관 서고 한 구석에 자리잡고 책을 통해 세계와 우주를 여행하며, 세상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크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다니는 행복, 성애의 쾌락, 골프 당구 여행 등 취미에 매료된 일상의 만족, 종교에 심취된 구도자로서의 그윽한 경지 등에 못지 않다.
도서괸 수만권 장서에 파묻혀 시간가는 가는 줄 모르고 삼매에 드는 행복을 왜 못느꼈을까. 한때 수천권의 책을 장식용으로 보유했을 뿐 소화하지 못했던 데서 벗어나 이제 모두 폐기한 뒤에야 느끼는 홀가분함이자 풍족감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서 삼매경도 일순간에 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경지를 벗어나면 여전히 반복되는 피곤한 상념과 번거로운 일상에 젖어든다.
나이 70이 ‘종심(從心)’이라며 무슨 일을 해도 거리낌 없고 초연해졌다고 자부했지만 몸이 노곤해지던가 미세한 헛구역증이라도 나타나면 곧 초연함이 무너지고 만다. 잠깐이면 처리할 사소한 일도 짜증나고 번거로워진다. 실타래처럼 얽힌 듯한 상념들로 허무 불안 허전 어수선함 우울함이 자리잡는다.
책이나 설교, 법문으로 익힌 짧은 종교적, 철학적, 과학적 지식으로 그러한 마음을 다스리지만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대범한 평정심은 오간데 없고 뿌연 마음이 뒤덮는다.
140억년 형성되온 우주를 생각해본다. 수천억 은하가 있으며 빛으로 10만년 걸리는 크기의 우리 은하만 해도 2천억-4천억개 별이 있고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인 안드로메다 빛으로 250만년 걸리는 곳에 있다니 가만히 생각하면 아득하고 현기증이 난다. 나의 지병이었던 지구가 팽팽도는 ‘메니에르병’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주의 티끌만도 못한 지구, 그 가운데서도 먼지와 같은 나의 존재가 아등바등 하는 것 같다. 8000세대를 이어온 호모사피엔스의 역사, 단군 5천년 200세대, 평산신씨 1200년 후손 37대도 큰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 상념을 하면 잠시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나와 우주를 일체로 보는 담대한 착각도 생긴다. 순간적인 엑스터시다.
종교인들은 예수와 부처님에 찬양과 기도를 드리면서 엑스터시를 경험한다. 무당들도 접신의 엑스터시 상태가 된다. 무종교인이 상상할 수 없는 경지다. 그러나 기도와 찬양, 굿판을 벌이는 공동체를 벗어나면 번거롭고 피곤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식도락가, 성애추구 괘락주의자, 취미생할에 몰입된 사람들도 그때그때의 만족에 그친다. 무념무상의 오르가슴이 지속될 수 없듯이.
그렇다고 마냥 엑스터시를 거부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 목적은 아닐 것이다. 시지프스가 영원토록 바위 굴리는 형벌을 받았지만 그 형벌을 꿋꿋이 감수하는 삶을 살듯이 뭔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실존의 부조리를 절감한 근대 철학자들은 한결같이 삶의 무의미를 강조하면서도 결국에는 삶의 의미를 긍정하며 사랑과 평화, 행복을 추구하지 않았던가.
“우주에는 아무 목적이 없고, 삶도 궁극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며 그러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삶의 무상함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삶은 여전히 살 만하다.”고 강조한게 그들 깨워있는 철학자들이다. 종교인들이 종교에서 구원과 행복, 깨달음을 추구한 바와 다를 바 없다.
위대한 종교인, 사상가, 철학자들이 세상을 이해, 해석하고 제시하는 것은 제각각이지만 종국에는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행복을 갈망했다. 인간으로서 존재, 육체와 목슴이 있는 한 살아야 하는게 궁극적 목적이자 본능이기에.
최근에 도서관서 읽은 책중에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나의 이러한 단상과 상념과 일치하는 듯헤 엑스터시의 순간을 맛보았다.
싯다르타는 고행과 세속의 삶을 이어가며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다. 창부, 상인, 뱃사공과의 관계에서 세속의 즐거움과 구도자로서의 커다란 배움을 터득했다. 쾌락을 맛보며 세상이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꼈고 시간의 초월해 흐르는 강물과 같이 존재와 비존재, 즐거움과 고통이 모두 같은 것임을 이야기했다. 다만 그가 고타마(부처)를 만나 부처를 한없이 존경하면서도 그를 떠나 자신의 구도자적 성취를 이룬다는 결말에서 헤세의 고집스런 사상을 읽을 수 있었다. 부처를 믿는 듯 믿지 않는 자세인 것이다. 부처를 비판하고 거부하기엔 부담이 생겼던 모양이다.
실상 위대한 종교인, 철학자, 사상가, 과학자들은 너무 깊고 확고한 지식에 매몰되어 자신들만의 논리를 편향되게 전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들 모두 삶의 의미와 구원,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그 방식에서의 차이 때문에 분파와 갈등, 우월감과 차별의식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싯다르타’에서의 창부, 상인, 뱃사공은 구도자, 철학자, 과학자만큼의 영성과 지성, 지식은 없었다. 그러나 삶의 충실함과 지혜는 같았고 육체와 뇌에서 받아들이는 감성은 앞섰다고 할까? 죽음보다 강하게 집념으로 일하며 사랑했고 때론 너그러워지고 행복하려고 노력했다. 세상을 이해, 해석하고 삶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못했지만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떠난 삶 자체로 보여주었다.
나 또한 책 속의 쬐끄만 지식과 지성, 영성에 매몰되어 있느니 일상 삶에 파묻혀 강물처럼 흐르는데로 생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성과 지식, 영성보다 중요한 것은 생활 속에 녹아든 감성일 것이란 생각이다.
각 종교의 구도자적 정신과 함께 육체와 뇌를 충족시키는 식도락, 성애, 취미 등 세상 모든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얕잡아 보지않고 사랑하고 감동하는 감성이 뭣보다 필요하다. 그러면 반복되는 피곤한 상념과 번거로운 일상도 커다란 허무 불안 허전 어수선함 우울함 없이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독서 등 일상, 종교적 영성에서의 엑스터시도 한층 기쁘게 누릴 것이다.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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