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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주님 영접’하는 기쁨으로, 나는 ‘아내가 즐거워’하는 기쁨으로

신민형 | 기사입력 2024/05/15 [19:50]
전환의 시대…다양한 가치와 종교, 인간을 통합할 새로운 선지자는?

아내는 ‘주님 영접’하는 기쁨으로, 나는 ‘아내가 즐거워’하는 기쁨으로

전환의 시대…다양한 가치와 종교, 인간을 통합할 새로운 선지자는?

신민형 | 입력 : 2024/05/15 [19:50]

일상 속 종교이야기


지난해 크리스마스이자 결혼 42주년을 기념해 아내가 다니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주 예수를 영접하는 기쁨이지만 나는 아내가 즐거워하는 기쁨으로 벌써 5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아내는 그동안 교회에 거부감을 가졌던 남편의 동반 뿐 아니라 불교 성향이었던 결혼 11년차 며느리까지 교회출석을 예고하자 더욱 신이 났다. 며느리는 수년 전 중병을 앓을 때 아내가 건네준 기도서를 최근 읽으며 아들과 손녀까지 대동해 출석하겠다고 고백했다. 그사이 삶의 고통, 죽음과 구원, 신과 인간 등의 문제에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도 했을 법 하다. 아내는 마침내 자신의 드러내지 않은 기도로 그들이 하나님께 인도받았다는 보람이 대단하다.

 

나도 아내가 더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기위해 며느리에게 우리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차원 높은 교훈을 많이 준다는 등 그들의 교회출석을 부추겼다. ‘어버이 주간을 맞아 교회에서 노인들에게 선물한 카네이션꽃을 찍어 올리며 교회의 정겨운 모습도 가족 카톡방에 올렸다.

 

아닌게아니라 우리교회목사의 설교는 기복과 헌금을 내세우지 않고 삶과 생활의 윤리와 가치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여타 교회와 다른 설득력을 갖고 있다. 젊은 신자들이 열심히 메모하며 경청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도 솔깃하게 듣고 아내와 예배 후 점심을 들며 설교 내용을 복기한다. 물론 그의 오로지 예수로 결말나는 설교엔 다소의 거부감은 여전하다.(목사는 당연히 설교의 핵심으로 여기지만)

 

그러나 단연코 나는 성실한 개신교인이 될 수 없다. 주변에서는 나의 착실한 교회출석을 보며 나 역시 자연스레 독실한 신자가될거라고 단언하지만 내가 그동안 젖어왔던 종교관, 가치관, 삶과죽음관으로선 불가능에 가깝다. 

 

▲ 부처님오신날 성모를 모신 사찰 길상사의 모습과 어버이주간때 카네이션을 선물한 교회예배의 모습. 각 종교의 장점과 단점을 두루 거론하며 일률적인 가치체계가 사라진 전환의 시대임을 느낀다.  © CRS NEWS

 

특히 내 종교관은 각 종교인에게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부처님오신날에 한 친구가 성모상이 있는 길상사의 정경을 찍어 보냈다. 이에 함께 경축을 못할지언정 우선 비빔밥 공양했냐?”를 묻고 그곳엔 성모님도 모셔 보기 좋은데...아마 통일교 문선명이 그 모습 보면 부처님과 성모님 두분도 천상 기쁨 누리시라고 영혼 결혼 시킬건데~”라는 댓글을 달았다. 불교와 천주교 신자에겐 얼마나 불경스런 말인지 생각못하고 자연스럽게 불쑥 튀어 나왔으니 내가 근본적으로 이단아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찌보면 신은 죽었다며 선언한 이단적 니체보다 더 불경스럽게 비아냥댄 것이랄 수 있다. 니체는 자신의 신만 인정하고 다른 신은 부정하는 일신론을 인류의 가장 큰 위험요소라 했는데 나에겐 참으로 매력적인 언급이다. 그는 절대신의 개념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근원이라며 1000년 이어져온 기독교 사상의 점령을 비판했다. 생로병사의 고통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창조적인 의지를 알려 주었다. 그의 자유의지는 이후의 철학,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나에게도 전달된 것 같다.

 

이러한 자유 의지와 해석은 전국시대 장자(BC 369~ BC 289년경)에게서도 발견된다. 장자는 당시 유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가르침 따위는 하잘 것 없는 것이라며 자연과 무()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 장자와 니체, 이탁오(사진 오른쪽부터)는 2000여년을 거치는 동안 그 시대의 절대적 가치에 반기를 든 자유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닮은 꼴 사상가이다. 비판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변화이외는 영원한 것이 없음을 강조한 사상가이자 선구자이다. 오늘날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주장과 생각들이 거침없이 등장하고 있어 가히 백가쟁명의 시대, ‘대전환의 시대’라고 할 것이다.

 

장자와 니체는 2000여년 사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치된 사상을 읽을 수 있다. 니체의 초인(위버멘쉬)’와 장자의 진인(眞人)’ 개념은 절대적 가치를 거부하고 인간 개개인의 의지와 삶을 존중하고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장자의 만물순환’ ‘와 닮은 꼴이다.

 

선과 악, 삶과 죽음, 진리와 진리 아닌 것, 윤리와 비윤리, 정상과 비정상, 옳고 그름의 기준을 허물고 다양함과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인간이 자기와 자기것만의 잣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틀을 만드는 것을 비판했다. 그리고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기존의 가치관과 틀을 벗어날 것을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고수되온 가치관이 사람을 속박했고 그러한 선입견 속에 갖혀 노예처럼 구속되어 산다는 것이었다.

 

종교적, 관습적 틀과 속박이 시대의 규율로 자리잡은 시대에서 장자와 니체같은 시대의 이단자가 있었음이 다행스럽다. 그들은 이단자이자 시대를 뛰어넘은 선지자였다.

 

또한 시대적 종교적 가치체계에 편안히 안주하는 사람들 틈에서 핍박을 받으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이단아들은 장자, 니체 이외에도 무수히 있어왔다. 단지 그 시대에서 도태됐고 역사에서 묻혔을 뿐이다.

 

그 일례로 오랜 세월 역사에서 잊혀젔다가 훗날 재평가된 명나라의 사상가 이탁오(1527 ~ 1602)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유교적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 죽은 이탁오는 유교적 권위에 대한 맹종을 거부하고 자아중심의 혁신사상을 제창했다. 당시의 금욕주의·신분차별을 가치로 삼은 예교(禮敎)를 부정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한 이단아이자 선지자였다. 장자보다 1800년 후, 니체보다 300년 앞선 닮은 꼴 사상가랄 수 있다.

 

오늘날에도 현재 종교와 관습의 가치체계에 거부하면 이단아 취급을 받긴 하지만 장자, 니체, 이탁오처럼 비판과 핍박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다양한 사람과 생각, 자유의지들이 넘쳐난다. 한편 혼란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런 시대적 조류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심지어 석가, 예수, 마호메트 등 성인들이 우주(외계인)에서 보내온 DNA라고 주장하는 단체도 활발히 활동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한 라엘리안 무브먼트는 “AI가 활성화되어 로봇이 대신 일해주는 낙원주의가 도래한다는 비전을 펼쳐 보여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밖에도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주장과 생각들이 거침없이 등장하고 있다. 기독교에선 말세라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백가쟁명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이 변화되고 있다. 가히 종교와 가치관, 진리, 삶과 생활의 대전환의 시대라고 할 것이다.

 

예수와 석가, 공자같은 성인이 세상의 틀을 정비한 전환의 시대를 가져왔듯이 이렇듯 우후죽순 생성되는 다양한 가치와 종교, 인간과 생활관습을 새로운 질서로 통합할 새로운 선지자가 또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장자와 니체는 한결같이 영원한 것은 없다며 변화의 영원성을 주창했다. 실상 세상에 영원히 머물러 있었던 것은 없었다. ‘영원하다는 것이 주는 의미도 사라졌다. 예수와 석가, 마호메트도와 공자도 만인을 통합하는 영원한 절대 가치를 창조하지 못했다. 장자와 니체의 사상도 영원하지 않다. 그들이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 기독교, 불교 신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사고와 가치관, 생활습관도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다. 내가 오늘 글에서 피력하고 있는 상념, 단상들도 당연히 변화할 것이다. 절대적 진리도 없다. 이런 상념으로 세상을 보는 고정 틀에서 해방되어 다양한 사람들의 종교와 가치관, 생활들을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인정할 수 있을 때 그에 따른 자유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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