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구원 모두 힐링의 역할, 자존심과 자존감은 ‘self-respect’ 같은 뜻
깨달음과 구원, 자존심과 자존감깨달음과 구원 모두 힐링의 역할, 자존심과 자존감은 ‘self-respect’ 같은 뜻
아내 출석교회에 무종교인 내가 따라나선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설교 말씀 듣는 것이 좋아 내가 앞장설 때도 생겼다. 차분하면서 때론 열정적인 담임 목사의 설교도 좋지만 하절기 휴가를 맞아 외부에서 초빙된 목사들의 설교는 색다른 교훈과 맛이 있다. 집밥만 먹다가 별식, 외식을 드는 기분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안목, 설교방식과 태도가 다양하다. 그러나 그 말씀이 지향하는 의미는 같다. 바른 삶과 생활을 하고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자는 것에 귀결된다. 굳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더라도 새겨들을 말씀이다. 어느 설교나 삶과 생활, 사람을 사랑하자는 종교의 상징적 표상이 담겨있다. 성경의 비유가 무한대로 확장돼지만 적절하게 풀이되고 받아들여진다.
나는 나대로 설교말씀을 들으며 기독교 교리로서가 아닌 모든 종교의 표상과 상징으로서 해석한다. 그래서 기독교신자가 아닌 내가 불당에 들어가 스님의 법문을 듣거나 백팔배를 올리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때론 호수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명상을 하는 가운데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 것과 같은 희열을 느낀다.
모든 종교가 교리과 의식은 제각각이지만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위로받는다는 것에선 일치된다.
기원전 2000년 나타나 인류 최초의 정통종교라 할 수 있는 힌두교에서부터 삶과 죽음, 그리고 그 너머의 우주와 세계, 영혼을 탐구하며 ‘베다’를 전승했고 그를 통해 삶과 카르마를 벗어나는 해탈의 방법을 가르쳤다. 500년 후 힌두교에 뿌리를 둔 불교는 석가모니를 통해 그 교리를 진화시켰고 이후 많은 예언자와 현인들이 종교를 창시했는데 세부 교리와 실천방법은 달랐지만 그 상징적 표상과 근본적 정신은 같았다. 하물며 인간사회가 형성될 때부터 발생한 토속, 민속신앙 역시 추구하는 종교적 표상과 상징은 다를 바 없음을 느낀다. 한민족의 성주신, 주왕신, 뒷간신 등의 숭배와 그에 따른 관혼상제 의례가 얼마나 인간의 종교적 믿음을 열렬히 추구했는지도 알 수 있다.
서양종교에서는 구원(salvation)을 선호했고 동양종교에서는 깨달음(enlightenment)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그 근본은 같을 수 밖에 없다. ‘깨달음’으로서 삶의 구원을 받는가 하면, ‘구원’이란 깨우침을 얻기도 한다. 구원이나 깨달음 모두 생로병사 고통의 치유(healing)가 된다. ‘왜 태어나, 어디로 가는가‘의 공통된 물음을 갖고 각기 색다른 해법을 내놓은 게 종교라 할 것이다. 그 창시자는 예언가일 수도 몽상가일 수도 있으며 혹은 창조적 예술가로서 모든 사람들을 ’힐링‘하는 긍정적 역할을 함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부정적 측면이 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목표와 기치는 내걸었지만 자연스럽게 지배세력의 권세를 정당화시켜 온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초 종교 힌두교는 지배세력 아리아인의 권세를 공고화하기 위해 카스트제도를 만들었다.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귀족)- 바이샤(평민)- 수드라(공인)의 계급에다 불가촉천민인 달리트를 두었고 브라만은 피부색이 옅은 아리아인이 도맡았다. 그리고 이렇게 굳혀진 차별은 ’카르마(업)에 의한 바꿀 수 없는 신분‘이란 종교적 믿음으로 세뇌시켰다 이후 정치와 연계된 종교의 역사가 그랬다. 조선의 반상제도, 중세의 봉건제도와 노예제도 등 굳혀진 차별로 이어졌으며 권세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과 분쟁을 불사했다. 프롤레타리아와 만민을 위한 투쟁을 내세웠던 마르크스레닌주의도 결국은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1984‘에 나타나듯이 더욱 지독한 독재주의 핍박으로 나타났다. 깨달음과 구원을 통한 삶의 치유(힐링)란 정지종교적 의미가 변질된 것이다. 목사들의 우스갯소리로 “장로와 권사가 예수 대하기보다 힘들다”라는 말이 있는데 또다른 종교직분(계급)의 폐해일 것이다. ’가스라이팅‘하는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행태도 이에 못지 않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과 구원보다는 세속의 권세와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과 구원을 통해 힐링을 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본적 종교적 심성 또한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근래 독서를 통해 힐링을 한다. 과거 인류보다 보다 긴 수명을 누리며 많은 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 책읽기에 몰입하는 즐거움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다. 내 조상들처럼 일찍 죽었다면 세상 보는 넒은 시야와 폭, 깊이를 어떻게 맛보았을까를 생각하며 감사함을 느낀다.(이러한 절실한 감사함은 거듭되는 목사의 설교말씀에서 배운 교훈이다)
인문, 철학, 과학 그리고 문학작품 등 모든 책에서 저자가 일평생 쌓아온 지식과 연구열은 내가 도저히 범접할수 없는 경지임을 깨닫는다. 그들의 작품 구상과 구성에서 천재성을 읽는다. 무엇보다 각 분야를 통섭해 정리, 해석해주는 식견과 통찰력은 놀랍다.
산책 중 사색에서 불현듯 깨우침을 얻었다며 희열을 느끼지만 그 역시 나만이 독특한 생각이 아니라 이미 뛰어난 저술가. 작가가 기존에 펼쳐놓은 생각임을 알게 된다.
그 상상력과 창의력에 주눅이 든 나는 그 흉내조차 어렵다. 글쓰기도 더욱 어렵다. 그래서 내 칼럼을 쓰면서 나름대로 자존감을 드러내는 내 이야기를 곁들이고 있다. 그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지만 나만 겪을 수 있는 생활체험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이 펼치는 방대한 지식과 사색의 한구석만큼은 표현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다. 나의 생각과 철학을 그들 깊은 지식과 통찰처럼 정리할 수는 없으나 이제 내 나름의 힐링과 구원을 내 피부로 느껴보자는 것이다. 살아온 만큼의 성숙한 심성을 갖춰보자는 희망이다. 남들보다 잘 쓰고, 잘 보이고 싶다는 욕망, 욕심은 없어졌다.
자존심(自尊感)일 것이다. 혹자는 자존심은 ‘약자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드러내는 심리’란 부정적 평가를 한다. 그리고 자존감(自尊感)은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며 높은 평가를 한다. 그러나 고집불통의 자만과 오만을 드러내는 자존심이 아니라면 자존심도 주변과의 비교를 통해 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는 심리라 할 수 있다.
자존심 자존감이 영어로 둘다 ‘self-respect’로 표현되듯이 같은 뜻인 것이다.마치 동양종교, 서양종교가 각각 깨달음과 구원을 중시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모두 지유(힐링)의 능력을 발휘하는 같은 종교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자존심, 자존감이 없다면 자기비하, 자기경멸과 열등감에 빠지기 쉽다. 그로 인해 타인에 대해서도 부정적 생각과 복수심까지 일게 만든다.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려면 자신부터 사랑해야 한다. 자존심, 자존감으로 자신을 긍정해야 남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으로 자신을 힐링하며 사랑하고, 또한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하는 것이 바로 어느 종교와도 맥을 같이하는 삶의 의미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나도 비록 하찮은 지식과 명상이라 할지라도 나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주변에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죽음에 대비하는 것일게다.
나이 들어 맘껏 독서할 수 있고 이만큼이나마 삶의 통찰을 하게 된 것에 무한히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감사하는 마음을 내 안에만 품어놓지만 말고 주변 사람의 힐링에 보탬이 되도록 살아야 할 것이다. 대자연과 우주, 하느님에게 감사를 되돌려 보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 깨달음 역시 아내 출석교회에서 초빙된 미국 사역 목회자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를 인용한 설교말씀에서 얻은 것이다. 그는 ‘감사와 사랑은 ’PAY BACK’ 아닌 ‘PAY FOR’ 하는 것이라 역설했다. 그의 설교에 감사하는 한편 내가 그 말씀을 실천할 다짐을 하게 된 것에도 감사한다)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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