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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나라 때 불교 전파-인도 사상이 중국 땅에 들어오자 충돌

보검 스님 | 기사입력 2024/12/23 [07:49]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104)

중국 한나라 때 불교 전파-인도 사상이 중국 땅에 들어오자 충돌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104)

보검 스님 | 입력 : 2024/12/23 [07:49]

전한(前漢: BC 206~AD 8) 시대 중국과 서역 여러 나라를 연결하는 동서 교역로가 개척되었는데, 이 교역로가 중국에 불교가 전래 되는 계기였다. 중국과 서역을 연결한 교역로는 전한의 무제(武帝: 재위 BC 141~BC 87)가 처음 개척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교역로는 당대 최고의 문명이 발달하였고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던 두 지역인 중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 명나라 화가 구영이 그린 공자님의 성스러운 사적도  © CRS NEWS

  

중국의 유교나 인도의 브라만교는 민족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여 국경을 넘어 다른 민족에게 전해지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전통적인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극복하며 탄생한 불교는 보편주의적 성격이 있었으므로 특정 나라나 민족에 얽매이지 않은 채, 인근 여러 나라로 포교와 전도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불교는 이미 기원전 250년경의 아소카왕(재위 BC 265~238) 시대에 인도의 북쪽 국경을 넘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그 후 차츰 중앙아시아의 사막에 흩어져 있던 다수의 오아시스 국가에도 들어갔다. 이에 따라 중국과 서역 사이 개통한 동서 교역로를 통한 불교의 중국 전파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었다.

 

▲ 베다 브라만 리시: 인도 종교에서 리시는 유능하고 깨달은 사람.  © CRS NEWS

 

인도의 리시는 다양한 베다 경전에서 언급된다. 리시는 베다의 찬송가를 지은 것으로 믿어진다. 힌두교의 베다 이후, 전통은 리시를 강렬한 명상을 거쳐 최고의 진실과 영원한 지식을 깨달은 위대한 요기또는 성자로 간주하며, 이를 찬송가로 지었다. 이 용어는 빨리어 문헌에서 이시(Ishi)로 나타난다. 불교에서 그들은 부처, 벽지불, 아라한 또는 높은 지위의 승려가 될 수 있다.

  

▲ 태국 난(Nan)의 왓 수안 탄 절의 루에시(Ruesi) 동상.  © CRS NEWS

 

루에시는 인도의 리시와 같은 은둔 성자이다. 미얀마에는 라세로 알려진 사람들이 있다. 리시 악카타(빨리어)는 태국에서 프라 레우시 아코트로 알려져 있으며, 불교 자타카 경전에서 보살로 언급되고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서 고행을 수행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에서 중요한 루에시이다. 루에시 숭배는 동남아시아 불교에서 주목할 만한 수행이기도 한다. 인도의 리시발음은 태국에서 루에시라는 이름이 되었다.

▲ 노자가 소를 타고 있는 모습.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CRS NEWS

 

중국에는 노자 장자 공자와 같은 성인이 있다고 한다면, 인도에도 리시라는 성인이 있었다. 그러나 브란만교의 성인인 리시는 인도 밖을 겨냥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브라만교와 반대의 축에 서 있던 불교 교주인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국경을 넘었다.

 

불교가 인도의 정통 6파 철학과는 다르게 인도의 비정통파 철학 체계라고 하지만, 이미 인도 북서부에 진출한 지가 몇백 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또한 중국은 서역을 이미 개척하여 무역로가 열렸던 것이다.

 

중국 옛 기록에는 서력기원 전후 불교 관련 기록들이 있다.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서융전(西戎傳)에는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전한(前漢: BC 206~AD 8) 말기의 애제(哀帝: 재위 BC 7~BC 1)의 원수(元壽: BC 2~BC 1) 원년인 BC 2년에, 박사제자(博士弟子)인 경로(景盧)가 대월지(大月氏)왕의 사자였던 이존(伊存)으로부터 부도경(浮屠經: 불경의 다른 말)을 구전(口傳)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후한서(後漢書)에는 후한(後漢: 25~220) 명제(明帝)의 영평(永平: 58~75) 8년인 기원후 65년에 명제의 이복 동생인 초왕 유영이 그의 봉토인 팽성(彭城: 지금의 장쑤성 쉬저우 시)에서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뜻이 깊은 말들을 읊조리고 부처의 인사(仁祠: 사찰의 다른 말)를 존중하며 상문(桑門: 승려·사문·출가자의 다른 말)과 우바새(優婆塞), 즉 승려와 재가신자를 존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  © CRS NEWS

 

황제는 중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帝王)으로,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린 오제(五帝)의 첫 번째 왕이다. ‘황제(黃帝)’라는 명칭은 재위 기간(재위: 기원전 2698년경~기원전 2598년경) 중 황룡이 나타나 토덕(土德)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 사실상 신화로 여겨졌던 삼황과 달리 황제를 필두로 한 오제는 실존한 제왕들로서 추앙되었으며 황제는 중국 문명의 시조로 여겨졌다. 도교의 시조로 추앙되기도 한다.

 

중국에는 불교가 전래 되거나 수용되기 이전에 이미 고급문화와 사상 철학이 존재하고 있었다. 중국불교사에서 언제 어떻게 불교가 최초로 중국 땅에 정착되었는가?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게 된다면, 여러 설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불사(佛寺)를 기준으로 할 때, 착융의 불사 건립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착융(笮融161~195)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종교 지도자로, 서주라는 지역에서 불교 세력을 펼쳤다.

 

▲ 착융(笮融161~195년)  © CRS NEWS

 

착융은 처음에는 도겸을 섬겨 광릉·팽성·하비에 양식을 실어나르는 일을 감독하였다고 한다. 그는 불교 사원을 크게 일으켰다. 사원은 누각이 겹겹이 있고 각도를 만들어, 3천 명이 들어갈 수 있었다. 또 황금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비단옷을 입혔다. 근처 지방에서 불교에 관심이 있는 자들로 불경을 듣고 불교를 받아들이게 하니 그 수효는 5천 명에 이르렀다. 매번 욕불(浴佛)할 때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술과 음식을 많이 차리고 수십 리 길에 자리를 깔아 두니 1만 명이 와서 보고 먹었다고 한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코리아 대표>

▲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 나식 현지 신문에 보도된 보검스님.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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