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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력을 상실한 승단의 비극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154)
조선 시대의 불교는 고려 말기의 불교를 계승하였다. 불교는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인하여 이른바 많은 법난을 겪었다. 왕조가 바뀌면서 국교나 다름없던 불교는 그만 유교의 성리학에 자리를 내줘야 했다.
성리학(性理學)은 12세기에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학의 주류 학파이다. 성리학의 어원은 정이가 주창한 성즉리(性卽理)를 축약한 명칭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하고, 송나라 시대 유학이란 뜻에서 송학(宋學), 송나라와 명나라에 걸친 학문이라고 해서 송명이학(宋明理學)이라고도 하며, 송나라 시대 이전 유학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새로운 기풍의 유학이라는 뜻에서 신유학(新儒學), 정호(程顥)와 정이(程頥)에서 주희로 이어지는 학통이라는 뜻에서 정주학(程朱學), 정주 성리학(程朱性理學), 정주 이학(程朱理學)으로도 불리고, 이학(理學) 또는 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특히 중화권에서는 송명리학(宋明理學), 서구권에서는 신유학이라고 주로 칭한다. 학문 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기수양을 위한 학문이다.
조선의 정치는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아 사대부를 근간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로서 운영되었다. 조선의 국왕은 이론적으로 전제군주의 지위를 지녔으며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양반 관료와 타협하여 정치를 운영하였다. 양반 관료는 초기에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어 갈등을 보였으나 중기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였고 이후 여러 정파로 나뉘어 경쟁하는 붕당 정치를 형성하였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사색당파로 굳어지던 붕당 정치는 성리학의 학풍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 예송논쟁(禮訟論爭)이나 호락논쟁(湖洛論爭)과 같은 주제가 정치의 첨예한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세도 정치가 등장하면서 붕당 정치 체제는 쇠락하였다.
조선시대 불교는 고려시대 말기의 왕성했던 불교가 그대로 계승되는 듯했으나 갑자기 정치체제 이념이 유교의 성리학으로 바뀌면서 큰 혼란을 야기하게 되었다. 한창 번성하고 있던 불교의 모든 종단이 위축 일로를 걷게 되어, 마침내 5교양종이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바뀌게 되었다. 세종(世宗) 6년(1424)에 7종을 폐합하여 선교양종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왕명에 의한 것으로 조계종·천태종·총남종(摠南宗)을 선종으로,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합하여 교종으로 폐합하고, 흥천사(興天寺)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로 삼았다.
조선의 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에서도 많은 고승이 나타났는데 무학(無學) 자초(自超, 1327∼1405)를 비롯하여 호불론(護佛論)의 하나인 현정론(顯正論)을 제시한 함허(涵虛)· 기화(己和, 1376∼1433) 등이 있다. 명종(明宗)때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도움으로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는 불교 부흥의 꿈을 실현시키려 했으니, 그는 판선종사(判禪宗師)가 되어 도승법(度僧法)과 승과(僧科)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과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이 등용되어 각각 선·교 양종의 판사(判事)가 되었다. 이와같이 억불 정책 속에서도 조선의 불교는 인재를 발굴하여 계속 법맥(法脈)을 유지시키며 발전시켰다.
고려시대에 창종된 천태종이 언제 두 개의 종파로 갈라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406년(태종 6) 3월 의정부계청(議政府啓請)에는 11개 종파의 이름이 있는데, 거기에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과 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의 이름이 있어 천태종이 둘로 나누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종파는 1407년 초 조정에 의하여 다시 하나의 천태종으로 합쳐지게 된다.
한국불교사에서 조선시대 불교의 침체와 함께 선교 양종(禪敎兩宗)으로의 통합은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고려 시대만 해도 불교 종파는 다양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불교의 여러 종파는 세종 6년에 기존의 불교 종파들이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통폐합되었다.
고려 말기에 나타난 불교의 폐단으로 인해 조선 시대에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이 강조되어 불교는 많은 법난을 겪었다. 이에 따라 한창 번성하고 있던 불교의 모든 종단이 위축 일로를 걷게 되어, 마침내 5교양종이 세종 6년에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 태종 6년(1406) 3월의 의정부(議政府) 상계(上啓)에는 조계종(曹溪宗)·총지종(摠持宗)·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천태법사종(千台法事宗)·화엄종(華嚴宗)·도문종(道門宗)·자은종(慈恩宗) ·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남산종(南山宗)·시흥종(始興宗) 등 11종(宗)의 명칭이 보이는데, 다음 해 의정부 계서(啓書)에는 조계종·화엄종·자은종·중신종·총남종·시흥종의 6종명만 보인다.
이에 의하면 태종 6년 3월까지는 11종이 있었으나 곧 총지종과 남산종을 합쳐서 총남종으로 만들고, 중도종과 신인종을 합하여 중신종으로,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을 합쳐 천태종으로 만들어, 조계종·천태종·총남종·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의 7종으로 폐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세종 6년(1424)에 예조(禮曺)의 계청(啓請)에 의하여 7종이던 종단을 폐합하여 2종으로 하였다. 즉 봉은사(奉恩寺)를 본사로 하여 조계종·천태종· 총남종을 선종(禪宗)으로 하고 봉선사(奉先寺)를 본사로 하여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합하여 교종(敎宗)으로 하여 선·교 양종(兩宗)으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양종 각각 18개사, 합하여 36개사만 남기고 모든 사원을 폐지하였다. 이때 흥천사(興天寺)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로 삼았다. 도회소는 승려의 인사와 승과(僧科)를 취급하였다. 요즘같으면 총무원의 기능을 하였다고 보면 되겠다. 보검스님<인도 한국 절 공덕원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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