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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재산과 노비 몰수, 재정적인 이득을 취하려던 숭유억불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155)
조선 시대 배불정책은 불교 종파와 사찰의 폐합을 강행하였고, 사찰의 수와 종파를 축소시킴으로써 많은 사찰 재산과 노비를 몰수하고 재정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숭유억불의 의도와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억불 정책(抑佛政策) 또는 배불 정책(排佛政策)이라고도 하며,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은 조선왕조(1392∼1897)가 500년 내내 불교를 탄압한 정책이다. 고려말 및 조선 초에 정도전이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여 억불론을 주장했고 조선 건국 초기에는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를 정하는 데 공헌하는 등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숭불정책이 유지되었지만, 태종이 정권을 잡으면서 억불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불씨잡변》은 14세기 말에 정도전이 쓴 책이다. 불교와 그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도전이 주자학의 입장에서 불교의 교리를 반박한 것으로 모두 1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도전은 주자학의 입장에서 불교의 윤회설, 인과설, 자비설, 지옥설 등 교리가 민심을 현혹시키는 사교(邪敎)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데, 특히 선종(禪宗)과 같은 것은 민심을 현혹시키는 마종(魔宗)이라고 비판하였다.
목차를 보면, 1장. 불씨윤회지변(佛氏輪廻之辨, 불교의 윤회설을 논변함), 2장. 불씨인과지변(佛氏因果之辨, 불교의 인과설을 논변함), 3장.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辨, 마음과 본성에 대한 불교 이론을 논변함), 4장. 불씨작용시성지변(佛氏作用是性之辨, 작용을 본성이라 여기는 불교 이론을 논변함), 5장. 불씨심적지변(佛氏心跡之辨, 불교의 마음과 마음의 흔적에 대해 논변함), 6장. 불씨매어도기지변(佛氏昧於道器之辨), 7장 불씨훼기인륜지변(佛氏毁棄人倫之辨), 8장 불씨자비지변(佛氏慈悲之辨), 9장 불씨진가지변(佛氏眞假之辨), 10장 불씨지옥지변(佛氏地獄之辨), 11장 불씨화복지변(佛氏禍福之辨), 12장 불씨걸식지변, 13장 불씨선교지변, 14장 유석동이지변(儒釋同異之辨, 불교가 도(道)와 기(器)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논변함, 15장 불법입중국(佛法入中國), 16장 사불득화(事佛得禍, 부처를 섬기는데도 오히려 화를 입는다), ⑰ 사천도이담불과(舍天道而談佛果, 하늘의 도리를 버리고 오직 불과(佛果)만을 논한다), ⑱ 사불지근연대우촉(事佛至謹年代尤促,부처를 섬기기를 지극히 삼가고 공경하게 하였으나, (그가) 세상을 산 기간은 오히려 매우 짧았다), ⑲ 벽이단지변(闢異端之辨, 그릇된 사설을 가려내어 배척하는 논변)의 19편(雜辨 15편, 前代事實 4편) 등이 수록되었고, 권말에 정도전 자신이 다시 부설을 첨가하였다.
《불씨잡변》을 통한 정도전의 불교에 대한 철학적 비판은 불교의 교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반한 것은 아니었다. 즉, 유교적 편견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억측과 독단이 많다. 그러나 성리학이 전래된 초기에 이미 이기론적 관점에 입각해 불교의 교의를 파악하고 유가적 관점(儒家的觀點)을 제시하고 있는 점은 조선조 유학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그의 불교관은 이후 조선조 유가들의 불교에 대한 일반적 태도를 결정짓는 것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불교 정책은 억불로 요약된다. 조선 정부는 성리학을 경국이념으로 내세웠고, 유학자들은 불교를 이단으로 취급하였다. 불교를 억제하는 것이 정도(正道)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믿었다. 연산군, 중종에 이르러서는 불교는 공식적 폐불(廢佛)이 단행되었다. 이는 불교의 존재를 부정하고 승려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었고, 공인되지 못한 불교는 법제의 밖에서 스스로를 보전하여야 했다. 그렇지만, 불교가 조선정부의 강제적 압제에 의해 쇠퇴 일로를 치달았다고 해서 불교가 결국 파국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명종 대에 일시적으로 양종(兩宗)과 승과(僧科)가 재개되었고, 이를 계기로 내실을 다진 불교계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승군(義僧軍)을 일으켜 국가의 위기 극복에 큰 공적을 쌓았다. 이후 불교는 사회적 효용성을 인정받으면서 사찰을 중건하고 교학과 수행에 힘썼으며 민간 신앙을 포섭하여 폭넓은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연산군은 비구니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켰다. 세종 25년 5월에도 이와 비슷하게 결혼하지 않으면 형별을 내린 전례가 있었다. 본래 정업원은 비구니 승려가 단종의 명복을 비는 절이었다. 또 연산군은 자기 아버지의 후궁들이 비구니가 되었다고 아예 그 절의 모든 비구니를 노비로 만들어 버렸다. 참고로 고려 시대에는 절에도 노비가 있었는데 조선 왕실의 비보 사찰 흥천사, 조선 태조가 창건한 흥덕사, 세조가 흥복사(興福寺)터에 지은 대원각사가 폐사되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숭유억불 정책을 펴고 유교식 의례가 정비된 이후에도 왕실에서는 원당을 짓거나 천도재를 지내는 등 불교를 통한 내세추복의례를 이어나갔다. 또한 국상의례에서 7․7재가 폐지된 이후에도 왕실 비빈들은 선왕이나 요절한 왕자들을 위한 천도재를 계속 설행하였다. 이 때문에 왕실에서 불사를 담당할 사찰이 필요했다. 조선시대 내내 왕실원당이 지어졌던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초의 왕비와 후궁 등 대부분의 비빈들이 고려의 귀족 집안 출신이었고, 이들의 불교신앙이 아들과 딸, 며느리에게로 계속 전승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비들이 사찰을 창건하는 등 불사를 벌였고, 태종대부터 성종대까지 잇따라 선왕의 후궁들이 집단 출가를 했다는 사실로 볼 때 조선 전기 대부분의 비빈층이 숭불 성향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의 폐쇄적 환경과 여성들의 독실한 불교신앙은 불교가 왕실 내에서 조선시대 내내 지속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보우는 조선 전기 봉은사 주지, 판선종사도대선사, 선종판사 등을 역임한 승려이다. 1509년(중종 4)에 태어나 1565년(명종 20)에 사망했다. 유학자들과도 깊이 사귀었고 재상 정만종과의 교유를 통해 문정대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선교일체론을 주창했고 일정성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기도 했다. 선교양종을 부활시키고 도첩제와 승과를 다시 실시했다. 1565년 4월에 회암사 중창사업을 마치고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를 열었지만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제주목사 변협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 보검스님<인도 한국 절 공덕원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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