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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황후 보우 대사 발탁, 불교중흥 서산.사명대사 활약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156)
오늘의 한국불교는 조선시대가 되면서 초토화됐다는 역사적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편 생각하면 고려 시대 불교 승려들이 너무 안이하고 타성에 젖은 면도 없지 않다고 본다. 정치적 이유로 숭유억불이라는 유교적 이념으로 조선이 유교 입국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불교 자체에도 크나큰 책임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조선불교를 지킨 것은 왕실의 여인들이었다.
조선의 첫 번째 왕비 신덕왕후부터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왕비들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왕비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신앙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들이 사찰에 시주한 내역이나 불사에 참여한 기록들은 사지(寺誌)나 불화(佛畫)의 화기(畫記) 등을 통해 전해진다. 조선 후기 왕비들의 불사가 주로 사찰 내에 기도처를 마련하거나 절에 물품을 시주하는 등의 소극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데 반해,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왕비들의 불사는 사찰 창건이나 불경 간행 등의 대규모 불사로 진행되었다. 또한 일부는 직접 불교정책에 관여할 정도로 적극적인 신앙행위를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불법 수호에 앞장선 이로는 정희왕후, 소혜왕후, 문정왕후를 꼽을 수 있다.
탁효정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 전기의 불교정책은 고려 불교계가 지녔던 경제적 토대를 몰수하고, 종파와 사찰의 수를 줄이는 동시에 출가사문의 길을 봉쇄하는 등 억불정책으로 일관되었다. 왕실 상장례에 남아있던 불교식 의례들도 사림들의 정계 진출 이후 대부분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왕실 내의 불교신앙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 전기 왕실에서 불교가 계속 신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왕조개창자인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상당수의 왕들이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였다는 점이다. 불교신자가 아닌 왕들도 모후나 비빈들의 영향으로 불교에 매우 친숙한 상황이었다. 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종과 세종, 세조도 불교를 깊이 신행하였다. 세종은 재위 초까지만 해도 스스로 불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유교적 성군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재위 중반 이후 불경을 즐겨 읽기 시작했고, 1448년(세종 30)에는 내불당을 건립할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다. 세종의 내불당 건립은 조정 대소신료들은 물론 성균관 유생들과 사부학당 학생에 이르기까지 유학자들은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세종은 세자에게 선위를 하겠다는 강수까지 두면서 내불당 건립을 강행하였다.
세조는 왕자시절 《석보상절》을 펴내고 모후 소헌왕후를 위해 용문사를 중창할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세조의 대규모 불사는 계속 되었는데, 금강산의 유점사, 장안사, 건봉사, 속리산 법주사, 양양 낙산사, 양평 상원사 등의 명산대찰을 왕실원당으로 지정하였고, 1465년(세조 11)에는 도성 내에 원각사를 창건하였다.
세조비 정희왕후가 주도적으로 불사를 벌인 기록은 주로 대비와 대왕대비 시절에 나타난다. 왕비로 있을 당시에는 남편 세조가 호불군주로서 불사에 앞장섰기 때문에 정희왕후가 불교를 옹호하거나 불사를 주도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이라 하겠다.
중종비 문정왕후 윤씨는 조선의 역대 왕비 중에서도 가장 불사를 많이 한 왕비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불사들은 대부분 대비 시절에 이루어졌다.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맡았다. 이 시기에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를 등용해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한 작업들을 진행시켰다. 선교양종의 부활, 양종 도회소(兩宗 都會所)의 설치, 승과의 복설, 도첩제의 부활, 정업원의 복설 등 지난 100여 년간 조선의 유학자 관료들이 왕실과의 투쟁 끝에 이루어낸 억불책들이 문정왕후의 섭정 기간 동안에 상당 부분 복구되었다.
비록 문정왕후 사후에 그의 불교중흥책은 모두 폐기되었지만, 이 시기 조선불교계가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불화들 가운데 최고의 수작들이 16세기 왕실발원 불화라 꼽힐 정도로 문화적으로는 ‘조선불교의 르네상스’가 이루어졌으며, 당시 승과를 통해 배출된 서산휴정, 사명유정 등의 승려들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불교계의 주요 법통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다수의 왕실여성들이 출가를 했다. 태조의 며느리 소도군부인 심씨, 세종의 며느리 수춘군부인 정씨, 단종비 정순왕후, 연산군의 후궁 숙의 곽씨 등이 정업원이라는 왕실 비구니사찰을 통해 출가를 했다. 정업원을 통해 출가를 한 왕실여성들의 공통점은 조선 전기에 빈번했던 정치적 사건에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연루되었다는 점이다. 역적의 부인 혹은 역적의 며느리가 된 이들은 내명부의 품계를 박탈당했고, 관비가 되거나 사사될 상황에 놓여있었다. 1․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등 조선 전기에 빈번하게 발생한 정쟁들은 다수의 여성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실록에 등장하는 8명의 정업원 주지 가운데 비구니 해민과 유자환 부인 윤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몰락한 왕족의 부인이거나 며느리였다. 이들은 정업원의 승려가 됨으로써 정치적 보복을 피할 수 있었다.
왕실여성의 출가는 신라와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고대부터 내려온 유습이었다. 그중에는 자발적으로 출가를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여성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출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승과는 고려시대 이후 승려를 대상으로 실시했던 과거이다. 고려 광종 때에 과거제를 창설할 때 마련되었다. 교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교종선(敎宗選)과 선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선종선(禪宗選)이 있었다. 승과 합격자에게는 대선(大選)이라는 법계(法階)가 주어졌고,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의 순서로 승진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억불숭유정책이 강화되면서 중종 때에 폐지되었다가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재개되었으나 다시 폐지되었다. 승과에 관한 《경국대전》의 규정은 조선 말기까지 변동 없이 그대로 존속되었다.
조선전기 왕실불교는 후기에 비해 구도적 성격이 매우 강했다는 점이다. 조선전기 궁 안에서 다수의 출가자가 배출되었던 점이나 이들의 불사의 목적이 하화중생의 실천이었다는 점은 왕실여성들의 구도 의지가 상당히 강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조선전기 왕실의 불교신앙이 매우 깊고, 수준 또한 높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에 대한 사회통제 시스템이 강화되면서, 왕실여성들의 신앙활동도 소극적으로 변모해갔다. 하지만 조선 전기 왕실여성들이 마련한 토대들은 조선 후기에도 불교가 자생할 수 있는 중요한 자양분으로 역할했다. 보검스님<인도 한국 절 공덕원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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