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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호국불교 상징, 사명대사

보검 스님 | 기사입력 2025/12/28 [18:48]
숭유억불아래 불교 정체성 승려 본분 지킨 명승

조선시대 호국불교 상징, 사명대사

숭유억불아래 불교 정체성 승려 본분 지킨 명승

보검 스님 | 입력 : 2025/12/28 [18:48]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157)

 

한국불교는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했다. 고려 시대의 불교는 송나라로부터 불교를 계속 받아들였다. 그런데 조선이 건국하면서 중국 명나라와는 불교적 입장에서는 다소 소원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가 건국될 무렵, 불교는 ​​중국 땅에서 1400여 년간 존속해오고 있었다. (581~618)와 당(618~907) 시대에 창종된 주요 불교 종파 중 천태종, 화엄종, 유식종, 율종, 정토종, 선종은 송(960~1279)과 원(1206~1368) 시대와 마찬가지로 명나라에도 계속 존재했다. 

 

▲ 승려 출신인 명 태조(明 太祖,1328년~1398년) 홍무제 주원장(洪武帝 朱元璋).  © CRS NEWS

 

명나라 불교는 이전 왕조의 불교와 많은 특징을 공유했다. 그러나 명나라 불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일반화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 불교 승가(sangha) 또는 승려 공동체와 정부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존재했다. 이는 명나라 초대 황제 시대부터 정부가 승가의 모든 측면에 대해 엄격한 행정적 통제를 행사하려 했던 시도, 황실의 지속적이고 때로는 아낌없는 불교 후원, 그리고 개별 승려들이 궁정과 정치에 관여했던 사실에서 드러난다.

 

▲ 티베트 불교에서 여성 부처로 알려진 바즈라요기니의 그림.  © CRS NEWS

 

사실 고려불교는 몽골제국이었던 원나라 불교와는 크게 교류가 없었던 것 같다. 중국불교를 너무나 깊숙이 받아들인 결과로, 원나라 불교는 티베트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인지 그다지 뚜렷한 교류가 빈번했던 것 같지는 않다.

 

▲ 감산덕청 선사.  © CRS NEWS

 

원나라(1271~1368)는 티베트 불교를 후원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티베트 불교 전통이 꾸준히 성장했다. 라마의 후원으로 인해 타락한 형태의 탄트라가 널리 퍼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원나라가 전복되고 명나라가 건국되자 티베트 라마는 궁정에서 추방되었고, 이러한 형태의 불교는 이단으로 비난받았다.

 

▲ 중국불교의 상징인 대만 불광산사 전경.  © CRS NEWS

 

명나라 시대에는 천태종, 화엄종, 유식종과 같은 중국 전통 연구가 부활했고, 대부분의 승려들은 임제종과 조동종이라는 두 개의 주요 선종에 속했다. 이 시점에서 중국 불교는 모든 주요 중국 전통에서 영향을 받아 상당히 종합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명나라 때 감산덕청(15461623)은 중국 불교의 위대한 개혁가 중 한 명이다. 많은 동시대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선()과 정토(淨土)의 이중 수행을 주창했다. 또한 그는 수행자들에게 진언(眞言)과 경전(經典)을 사용하도록 지도했다. 그는 또한 강연가이자 주석가로 유명했으며, 계율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것으로 존경받았다.

 

청나라(1644~1911) 시대에 황실은 티베트 불교의 겔룩파에 지원을 돌렸다. 중국 불교는 청나라의 여러 제국과 내부 갈등, 특히 태평천국의 난(1850~1864)으로 많은 사원이 파괴되고 반군에 의해 경전이 불타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시대에는 또한 아편 전쟁 이후 서방 강대국에 부여된 권리인 기독교 선교사 들이 중국에 도착했다. 

 

▲ 사명대사.  © CRS NEWS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는 당송시대 불교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당송불교의 전통이 한국불교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조선 시대의 불교로 돌아가 보자. 조선에서 숭유억불의 시대가 되면서 중국으로부터 더이상 불교의 새로운 뉴스는 없었고 오히려 성리학에 의한 명나라 사대부의 지성(知性)이 조선의 선비들에겐 더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불교 승려들도 이런 시류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중후기의 불교 승려들은 유교적인 덕목도 함께 기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유학(儒學)은 조선의 지성계를 강타했다.

 

서산대사나 사명대사도 출가 이전에 이미 유생(儒生)으로서의 소양을 어느 정도 쌓았던 분들이다. 서산대사에 대해서는 이미 몇 차례 소개한 바 있기 때문에 사명대사에 대하여 그의 호국 승병장(僧兵將)으로서의 면모를 살펴보자.

 

사명대사(泗溟大師, 1544~1610)는 조선 중기의 고승, 승장(僧將)이다. 속성은 임(),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당호는 사명당(泗溟堂), 별호는 종봉(鍾峯), 본관은 풍천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법명인 유정(惟政)보다 당호인 사명당(泗溟堂)으로 더 유명하고,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 부른다.

 

▲ 1912년 촬영된 사명대사 기적비(紀蹟碑). 언젠가 파괴되었다가,1996년 파편이 건봉사에서 발견되었다.  © CRS NEWS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순안에 가서 청허(서산대사)의 휘하에 활약하였고 청허가 늙어서 물러난 뒤 승군(僧軍)을 통솔하고 체찰사 류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 내려가 전공을 많이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왜군은 불교가 유교 국가 조선에서 억압을 받던 종교이기에 왜와 가깝다고 평가하고 불교 사찰들은 훼손시키지 않고 전쟁을 수행하였으나, 승군이 의병으로 봉기한 시기부터 불교 사찰들을 훼손시키기 시작하였다. 1594년에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하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여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다. 왕의 퇴속(退俗) 권유를 거부하고, 영남에 내려가 팔공(八公용기(龍起금오(金烏)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저축한 후 인신(印信)과 전마(戰馬)를 바치고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를 따라 울산왜성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왜성에 이르러 공을 세워 가선동지중추부사(架善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604(선조 37)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교토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조선인 3500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嘉義)의 직위와 어마(御馬) 등을 하사받았다. 그때는 청허가 입적한 이듬해로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의 영탑에 애도를 표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사명대사는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해인사에 홍제존자비(弘濟尊者碑)가 있다. 승려의 몸으로 국가의 위기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외교) 등 눈부신 활약은 후세 국민이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보검스님<인도 한국 절 공덕원 주지>

▲ 필자 보검스님이 한국불교연구소장 겸 교수로 있는 수바흐르티 대학교 아소카 불교대학 교정에 서 있다.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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