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우리는 보지 못하는가.”
필자 역시 한때 하나님을 간절히 뵙고 싶어 기도했습니다. 그때 깊은 내면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희 어미 아비를 보라.”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고, 마음은 닫혀 있었다는 것을. 다시 기도했을 때 응답은 짧았습니다. “너희 영이 성숙해지면 열린다.”
세상의 나이와 영적 성장은 무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든이 넘은 사람도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일 수 있고, 이름난 종교 지도자라 해도 미성숙할 수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습니다. 이 문은 하나님도, 그 누구도 대신 열어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묻다
“정말 하나님은 계신가?” 이 질문은 철학자나 신학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누구나 삶의 한계 상황에 직면하면 필연적으로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과거 종교 신문사 대담에서 한 수행자(도인)가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
필자는 답했습니다. “모든 존재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저는 그 근원을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또 다른 이가 물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십니까?”
잠시 생각한 후 말했습니다. “없다고 단정하기보다, 있다고 믿으며 살아보는 건 어떻습니까? 만약 죽은 후 정말 계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말이 하나님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증명이 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하나님을 부정하기보다 질문을 품고 살아갈 충분한 이유는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고통’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쟁과 탐욕 같은 고통은 인간의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물론 모든 고통이 인간 때문은 아닙니다. 재난과 질병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고통의 원인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어떻게 응답하느냐’입니다. 누군가는 외면하고, 누군가는 서로를 구합니다. 바로 그 선택에서 인간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구조적인 불의 역시 무관심과 침묵 속에서 공고해집니다.
하나님은 재난 자체보다, 그 속에서 인간의 양심을 통해 물으십니다.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고통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영혼을 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세상을 만드셨는가?”
어쩌면 이 질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향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통제하신다면, 세상에는 죄도 없겠지만 동시에 ‘자유’도 사라질 것입니다. 사랑도, 책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프로그램된 존재가 될 뿐입니다.
사랑은 강요되지 않는다
자유는 축복인 동시에 위험입니다. 선과 악 모두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신은 침묵하신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듣지 않는 것은 인간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 속에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외면하지 말라. 침묵하지 말라. 너희의 영을 성숙시켜라.”
결론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외면한 것입니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전에 먼저 자신이 ‘닫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눈과 귀와 마음이 열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길 위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안 계셔서가 아닙니다. 인간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열려 있습니까, 닫혀 있습니까?” “영이 성숙해지면 열린다.” 이 말씀 속에 이미 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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