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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1만2천 밤 자고새면 무얼 이룰까···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3/12/09 [16:54]
씨알사상 지상중계● 다석의 생명관

인생 1만2천 밤 자고새면 무얼 이룰까···

씨알사상 지상중계● 다석의 생명관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3/12/09 [16:54]
 으로 보여준 다석의 생명사상


▲ 다석 유영모     ©

다석은 여러 각도에서 생명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생각이 곧 기도’라는 그의 말을 떠올릴 때 생명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느 할일 없는 사람의 심심풀이 공상이 아니다. 다석은 마치 자신의 삶 전체를 생명이라는 놀음판에 판돈으로 걸고 죽기살기의 모험을 벌이듯 치열하게 살다 갔다. 그의 생명사상은 단순한 생명에 대한 이론이나 학설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쳐 증거하고 증명한 한 편의 생명증거이다. 그의 삶이 곧 그의 생명사상이었던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한 인간의 사상이 곧 그의 삶’인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다석 생명사상의 독특함은 한마디로 영성차원에 있다. 21세기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과 상생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영성적 차원이다. 다석은 유럽이라는 절대중심에서 벗어나 지구 위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삶의 원칙을 찾느라고 일생을 바쳤다. 다석은 그 해법을 위해 평생 노장사상, 불교사상, 유교사상, 그리스도교 사상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사유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다석은 이러한 세계철학적인 문제를 풀어갈 해결의 실마리를 바로 한국인의 영성적 심성, 자연친화적 생활방식, 통합적 사유얼개, 우
▲ 이기상 교수     ©

리말의 상생적 문법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석은 “글자 한 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 있고, 말 한마디에 영원한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천지인 합일의 영성적 세계관에 주목한다.


다석의 일생은 참생명을 찾아 나선 구도의 삶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지 고민하며 그것에 대해 깊이 사색했다. 그의 생각의 한 올을 그가 1918년 잡지 『청춘』에 기고한 <오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석은 여기에서 “산다는 것은 때와 곳을 옮기면서 곧 내 생명을 변증하면서 일을 하는 것이니, 나와 남과 물건 세 편이 연결하는 가운데 생명이 소통하면서 진리를 나타내며 광명(光明)이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석은 산다는 것이 주어진 공간(빔-사이)과 시간(때-사이)에서 나와 남과 물건을 연결함으로써 생명이 소통하여 진리가 나타나도록 함이라고 이야기한다. 젊은 다석은 생명력을 발휘하여 나와 남과 물건을 연결시키는 일(작업)을 통하여 인간이 하루 동안에도 열 백 세계를 가를 수 있다고 노래한다. 그러면서 그는 삶의 실상을 ‘오늘 여기 나’에서 볼 것을 종용하며 “오늘 오늘 산 오늘!”이라고 외치고 있다.


다석은 1923년 『동명』에 발표한 <자고 새면>에서 “인생 1만 2천 밤을 자고 새면 과연 무엇을 하는 것인가? 무엇을 이룬 것인가?”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한다. “오직 생명이니라. 사는 것이니라. 모든 것이 참되게 살기 위하는 것뿐이니라. 정말 과거에 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지금 나의 목숨을 이룬 것이라’ 대답하겠노라.”


산다는 것은 내생명 변증하는 것
식탐·색탐 버려야 참생명을 얻어



다석은 자신의 오늘의 삶이 우주적 생명사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다. 그는 하나의 원인이 하나의 결과를 단독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천만의 멀고 가까운 인연을 따라서 하나의 결과 또는 천만의 결과를 맺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무슨 공적을 개인 한 사람이 이룬 것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어떤 죄과가 어떤 한 사람만의 행위라고만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석은 말한다. “지금의 나는 천고 만유를 인연한 업과(業果)”며 동시에 “억조 후생의 일인(一因)이 되는 것이니” 어찌 그 의의가 깊지 아니하며 책임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내 한 몸이 존재하기 위하여 6, 70년 전에 반드시 4대 조부모될 인물이 생활에 분투하였을 것같이 50대 전이나 백 대 전에는 무량수의 사람들이 인(因)을 닦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신비한 가치를 볼 때 무량수가 곧 하나의 수(數)요, 하나의 수가 곧 무량수인 것을 증험으로 알 수 있다.”라고.


청년 다석은 생명의 신비를 몸과 얼(정신)로 느꼈다. 몸으로서의 ‘나’가 지금까지의 모든 생물, 무생물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바로 지금의 ‘나’가 우주적 생명사건의 첨단(끝)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나’는 이어이어 나에게까지 이어져온 우주적 생명줄을 계속 잇기 위해 생명사건을 지펴나가는 땔감이 돼야 할 사명을 타고났음을 깨달았다. ‘나’의 생명(生命)에서 오늘을 살게 써서 생의 대명(大命)을 이루라는 하늘의 뜻(천명, 웋일름)을 읽어낼 수 있을 때 내가 하늘로부터 받은 바탈 곧 사명을 다하는 것임을 체험한다. 이러한 다석의 생명체험은 그의 훗날의 삶을 이끄는 길잡이가 된다.


다석은 생명이라는 현상을 ‘몸을 살러 하늘의 명을 성취하는 사건’으로 보고 있다. 몸이라는 상대생명을 제물로 바쳐 하나인 한얼이라는 절대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몸으로서의 내가 죽고 얼로서의 내가 한얼과 하나가 되는 것이 나의 삶의 본디 의미이다. ‘생명(生命)’은 본래 그 낱말의 뜻이 ‘살라는 웋일름[하늘의 뜻]’으로서 그 말 속에 두 차원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다석은 생물학적 차원의 식과 색을 버려야만 하늘의 뜻을 따르는 참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세상은 잘못되었다. 삶의 법칙이 잘못되었으니 못되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삶의 법칙을 식색(食色)으로 생각하고 있다…구원이란 외적인 제도를 고치자는 것이 아니다. 내적인 얼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 식색이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사는 것이다. 본 생명인 얼은 한없이 풍족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르지 않는다.”


다석은 식색의 물신(物神)을 초월하지 못하면 우리의 정신생명이 자라지 못한다고 본다. 언제나 먹을 것을 삼가고 남녀를 조심해야 한다. 후손 끊어지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정신 끊어지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몸생명 보존에만 넋을 잃지 말고 얼생명을 찾는 데 정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딱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생명은 참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 쉬는 얼생명이 참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면 코로 숨 쉬지 않아도 끊어지지 않는 얼숨이 있을 것이다.”


내가 가서 살집 짓는 것이 이세상의 삶
모든것 살리고 섬기며 사는 우주인돼야


다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이란 하느님의 숨어 쉼”이라고 말한다. 마치 나무에게서 태양이 숨어 쉬는 것이나 같다. 가을이 되고 봄이 되는 것은 태양의 숨쉼이다. 태양의 숨쉼에 따라 나무가 자라나고 나무가 시든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도 태양의 숨쉼이다. 그런데 사람의 숨쉼은 동물의 숨쉼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숨쉼이 겹쳐 있다.


다석은 성령의 바람을 범신(汎神)으로 보고 범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운동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령의 바람으로 정신적인 숨쉼을 한다. 성령이 바로 우리 맘의 얼이며 참나다. 다석은 성령과 통하는 사람은 모든 생명에서 하느님의 마루(뜻)를 읽어내고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여 말로 세워(말슴) 말로 쓰면서(말씀) 하느님의 소식을 전해주며 말숨을 쉬는 말씀[말숨]살이를 산다고 말한다.


다석은 또 “말씀이 곧 하느님이다. 우리생명은 목숨인데 목숨은 말씀하고 바꾸어놓을 수 있다. 공자를 『논어』와 바꾸어 놓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생각이 끊이지 않고 말씀이 끊이지 않는 것은 누에가 실을 뽑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숨이 말씀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된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이다. 실을 뽑았으면 죽어야한다. 죽지 않으려는 억지 마음은 버려야 한다. 죽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실을 뽑아라. 집을 지어라. 생각의 집, 말씀의 집, 사상의 집을 지어라. 내가 가서 있을 집을 예비하는 것이다. 내가 가서 있을 집을 지어놓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거저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씀의 집을 지으려 왔다. 실 뽑으러 왔다. 생각하러 왔다. 기도하러 왔다. 일하러 왔다. 말씀의 집을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석에 의하면 시작했다 끝이 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끝을 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다. 낳아서 죽는 것은 몸이요, 죽어서 사는 것은 얼이다. 얼은 제나(몸나와 맘나)가 죽어서 하는 생명이다. 다시 말해 형이하(形而下)에 죽고 형이상(形而上)에 사는 것이다. 단단히 인생의 결산을 하고 다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회개요 회심이다. 얼에는 끝이 없고 시작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삶이 하늘로부터 받은 바탈을 태우며 전체인 빈탕한데에로 돌아가는 참생명이다.


다석은 노장사상과 무속종교가 몸나에만 관심을 보였다면, 불교는 지나치게 맘나에만 치중하였고, 유교는 너무 맘나의 공동체인 ‘가(家)’에만 신경을 쏟았다.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역사관 속에서 제나의 구원에만 유의하였다고 지적한다.


다석은 이 모든 ‘나’의 차원들을 나름대로 다 살리면서 궁극적인 참나인 ‘얼나’로서의 삶에 정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몸을 건강하게 보존하며 ‘몸성히’, 마음을 놓아 보내며 ‘맘놓이’, 자신의 속알(바탈)속에 새겨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그 뜻을 태우며(=바탈태우, 뜻태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온 우주, 모든 빔, 모든 사이 속에 없이 계시며 모든 생성소멸과 변화를 주재하는 하느님의 성령인 한얼과 소통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살리고 섬기며, 자신을 나누며 비우는 우주적 ‘살림살이’를 사는 우주인이 될 것을 다석은 우리에게 조용하게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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