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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친 일본 불교 민속학의 창시자 고라이 시게루(五來重)(上)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3/10/17 [08:02]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친 일본 불교 민속학의 창시자 고라이 시게루(五來重)(上)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3/10/17 [08:02]

불교와 민속의 습합현상을 연구, 일본 불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일본사회에서 불교와 민속의 습합현상을 연구한 불교민속학의 개척자 고라이 시게루 (이하 고라이1908-1993)는 일본 근대 불교에서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한 학자다기존의 연구자들이 교단사인물 중심경전을 중심으로 한 연구를 했다면 고라이는 그들과 달리 새로운 분야라고 할 수 있는 민속과 불교의 습합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불교민속학은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라이는 1908년 이바라키현 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인도철학과 졸업후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재입학한 인물로 1993년 12월 서거했다주요 저서는 불교와 민속일본의 서민불교산의 종교 수험도 안내일본불교와 서민신앙고야성장례와 공양유행과 순례시코쿠 순례의 절 ·』 고라이 시게루 전집 12권이 있다. 

고라이는 생전에 修驗道 聖護院 승려들과 수행하면서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와같은 수행 이력 때문에 수험도 소속 교직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편집자 주>

 

▲ 고라이 시게루의 관련 저서들  © CRS NEWS


<연재순서>

()종파에 관계없이 민간신앙이 습합된 일본 불교

()일본불교의 현주소는 장례불교이며 조상공양 불교 

 

일본불교는 불교가 아니다는 주장을 하는 고라이는 그 이유를 일본불교는 많은 교단으로 나뉘어 발전해 왔지만 그 근저에는 종파에 관계없이 민간신앙이 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서민은 불교를 민간신앙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를 공양하는 것은 이른바 불교에는 없는 것으로 일본의 민간신앙적인 것이다. 또한 스님의 장송의례라는 것도 일본인의 영혼 관념을 기초로해서 성립한 것으로 인도와 중국의 불교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고라이가 정의하고 있는 일본 불교의 모습이다.

 

고라이의 이와같은 주장은 단순히 일본 불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국, 일본, 중국 삼국불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중국불교는 도교와 만나 선불교를 탄생시켰다면 한국불교는 한반도내 자생적 고유신앙인 민속종교와 만나 한반도 불교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연구자에 따라 단순히 무속과 습합만을 주장하는 무불습합으로만 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원시신앙이 외래종교와 혼합하여 창조적 형태로 전개되어 가기 시작했다. 재래적인 무속문화가 외래적인 불교문화를 받아들여서 창조적으로 발전하게 됨 무불습합 문화이며 전통적 무속적 풍토위에 성장한 토착화 불교문화였다.

 

이와같은 연구방법론은 한국사회에서 민속연구는 단순한 영역이며 무속이 곧 한국민속학의 연구라는 결론적 방향 설정 이후 일어난 현상이다.

 

민속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민간생활과 결부된 신앙, 습관, 풍속, 전설, 기술, 전승문화 모두를 민속이란 정의보다 협의적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일어난 일시적 현상이다. 한국불교에서 민속종교를 받아들임에 큰 저항이 없었다. 한반도 불교를 단순히 무불습합의 경향으로 주장하는 연구자는 일본의 신불습합’,‘신신습합의 용어적 차용수준에 머물고 있다.

 

불교는 토착신앙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였음으로 당대의 사람들은 낯선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토착신앙의 사고방식 내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도 기존의 신앙을 이용하는 것이 용이하였을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고유신앙인 신도를 만나 신궁사라는 독특한 불교운영 체제를 갖춘 신불습합을 탄생시켰다. 일본불교가 자연스럽게 습합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해 고라이는 서민쪽 농어민,상인 등이 여유롭게 철학사상이나 예술을 논할 수 없다는 상황을 들었다. 이들이 생활상의 불안이나 고통, 고민이 생기면 평소 지탱해온 불교에서 구제를 원했고 주로 장례불교, 기도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같이 일본불교는 민중측의 민간신앙에 대응하는 형태로 성립되어 갔다.

 

일본인은 태어날 때는 신사에 참배하고 추석과 성묘는 사원에 간다. 크리스마스 날, 할로웬, 발레타인에는 선물을 하고 죽을 때 사원에서 장례를 치른다.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 한국을 통해 일본에 도착한 불교는 전래되는 과정에 그곳에서 좋은 것을 흡수한 결과 기존의 종교였던 신도와 외래의 불교와 기독교도 모두가 어우러져 공존하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슈겐도가 완성된 것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민족신앙이 더 발달하고 독특한 신앙형태가 태어난 것이다. 이와같은 일본종교 현상을 눈여겨 본 고라이는 불교민속학을 발전시키게 된다.

 

인도불교의 헬레니즘과의 융합과 중국, 한국, 일본에서의 습합 과정

 

인도불교는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융합하고 조로아스터교의 교리와도 절충하면서 대승불교가 형성되어 서역과 중국 한 나라로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한나라에 전해진 대승불교는 교리상으로도 헬레리즘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교의가 섞였지만 예술 면에서도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불교는 중국 당송시대 선종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도의 원형불교나 초기대승불교와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다. 한국불교는 선종불교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여 남방상좌부와는 전연 다른 모습이고, 초기 대승불교나 후기 대승불교의 모습을 갖고있는 티베트 불교와도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있다.

 

불교는 토착신앙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였음으로 당대의 사람들은 낯선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토착신앙의 사고방식 내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불교의 입장에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신앙을 이용하는 것이 용이했다.

 

일본에 전래된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어 서민교화에 활용되어가는 과정에서 중국의 고유신앙인 도교 및 유교에서 비롯되는 선조공양 의식 및 민간신앙 등이 불교와 습합하여 불교가 장례의식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불교의 위폐는 유교 장례에 이용되는 신주가 변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어느 정도 중국화한 불교는 6세기 중엽 백제를 통해 아스카 시대에 들어왔다. 불교는 호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극진히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황실과 귀족층에 주로 신앙되던 불교는 가마쿠라 시대에는 서민층에도 불교가 보급되어 서민의 장례에도 불교식 장례법이 침투하였다. 조상공양이라는 것은 이른바 불교에는 없는 것으로 완전히 일본의 민간신앙인 것이다.

 

또 다른 일본불교 특징으로 승려의 결혼과 육식의 허용이다. 다만 육식대처를 하면서 고기도 여자도 본 적이 없는 듯한 얼굴을 하거나 육식대처를 당연한 것처럼 과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본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이다. 말법사상을 배경으로 일어난 정토종,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는 일만 정토왕생의 정정업이라고 설하면서 급속히 교세를 넓히다가 기성종파의 반감을 사고 박해를 받게 되었다.

 

중국 불교의 특징과 일본 불교 전래 과정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북쪽으로 전하여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중국에 전래하였다. 다시 중국을 중심으로 한국, 일본, 베트남 등 광대한 지역에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교리의 조직이 가장 발달한 것은 중국불교였다.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일반서민의 신앙생활에도 도움을 주었다. 송대 이후가 되면 불교는 유교·도교 이교와 더불어 생활의 지혜로써 섭취되어 명대에는 채근담과 같은 인생의 책을 출현시켰다. 또한 일반민중은 관제와 관음을 아무런 모순도 없이 동시에 받아들여 이를 신앙하였다.

 

중국불교는 도교적 불교이며 도교는 불교적 도교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사원내에 관제상이며 진무대제 그 밖의 도교적 신상을 모시고 그 행사 등도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관에도 미타여래며 석가불, 특히 관음상 등이 함께 제사되고 도사는 염불을 외우고 반야심경이며 미타경 등을 독송하고 있는데 이것은 가히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도관내에 도사와 승려가 동거하면서 똑같이 조석예불을 모시고 있으며 거기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도이면서 도교도일지라도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1738년 창건된 타이완 용산사를 살펴보면 불교와 도교, 토속신앙의 혼합된 형태로 경내 좌우에는 용산사를 호위하는 듯 자리한 두 마리 용이 있다. 본전에 관음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현보살, 도교의 마조, 관제,삼신할머니 등의 문무제신을 모시고 있어 신불에 얽매이지 않고 뭐든 숭배하는 타이완의 종교관이 잘 나타나 있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면 북쪽부터 진전, 본전, 후전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로 종루와 고루가 위치한다. 전전 난간에는 소설<삼국지>를 배경으로 한 조각과 그림이 있다.

 

불교의 유력한 거사이면서 한편 도교적인 행사에 관계하고, 염불을 외우면서 개제에 기원하며 여조의 산 가지를 뽑은 사람들이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반적으로 중국의 민간신앙은 불교적이든가 도교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앙하고 있는 대상이 불교의 불보살이든 도교의 여러 신들이든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며, 그것을 따지고 들 필요도 없다. 오직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고 영험이든 무엇이든 확실하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좋은 것이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니혼쇼키에 의하면 긴메이 천황 13년 임신년, 간고지연기상궁쇼토쿠법왕제설에 의하면 긴메이 천황 7년 무오년(538)에라고 전해진다. 이처럼 서력으로 환산할 때 그 차이가 나는 것은 이 시대의 기년에 혼란이 있기 때문이다. 니혼쇼키에 따르면 백제의 성명왕(성왕)이 석가의 불상 한 구와 그 장식인 번개(幡蓋) 그리고 몇 권이 경전과 논서를 전했다고 한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게이타이 천황에서 긴메이 천황까지의 6세기 전반에 관한 니혼쇼키의 기술은 그때의 정치적 혼란을 은폐하기 위해서인지 작위가 많아 신용할 수 없다는 것이 근대의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불교 전래 당시 백제의 성명왕(성왕)이 천황에게 보냈다는 글이 니혼쇼키에 있는데, 거기에는 당시 아직 한역되지 않은 경전의 문구가 사용되고 있어, 더더욱 신뢰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보다는 다른 계통의 오래된 전승에 근거했다고 판된되는 간고지가란엔기의 설이 작위가 적어 신용도가 높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538년설도 다소 문제가 있어, 올바르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최근 한국고대사의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백제 왕의 즉위연도에 14년씩의 차를 갖는 두 가지 계통의 근본사료가 있었다. 이럴 경우 538년과 552년의 14년차는 양 설이 서로 다른 백제 사료에 근거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나오고 있어서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감이 없지 않다.

 

일본 전통적인 '' 관념에 큰 영향을 미친 보편종교 불교-‘신도와 불교는 깊은 유대

 

에도 시대에는 국학이라는 학문이 유행하면서 국학생들이 '신도가 우위'라고 설득하며 신도에서 불교적 요소를 제거하려고 했으며,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그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신불분리가 실시되었다.신불분리는 알기 쉽게 말하면, ·신불습합의 움직임이다. 신도는 종교가 아니라 일본인의 생활정서에 밀착된 전통문화일 따름이며, 귿이 말하자면 종교 이전의 원초적 종교혹은 교조도 경전도 없는 종교라는 식의 정의도 가능할 것이다.

 

일본에서는 신들의 신앙은 원래 소박한 토착신앙이자  공동체의 안녕을 기도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은 특정의  씨족이나 마을과 연결되어 있어, 그 신앙은 매우 폐쇄적이었다보편종교인 불교의 전래는 일본의 전통적인 '' 관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불교가 사회에 침투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신기신앙과의 융화가 벗겨져 고대의 왕권이  천황   아마츠카미의 후손으로 하는 신화의  이데올로기와 도다이지 대불로 상징되는 불교에 의한 진호국가의 사상이 함께 채용되는 등  나라 시대 이후부터 신불관계는 점차 긴밀해졌고헤이안 시대  무렵에는 신전독경, 신궁사가 퍼졌다. 신궁사는 신사와 불교 사찰의 요소를 아울러 갖춘 사원이다. 신불습합의 전통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신도와 불교는 깊은 유대속에 교류하고 있었다.

 

신궁사는 사원 안에 운영되는 신사로 곤겐(權現;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하기 위해 일본 전래의 신의 모습을 빌어 나타낸 것)등 신도의 신이 불교에 귀의하여 사원 속에 들어간 것이다. 일본 고유신앙인 신도는 일본의 전통적인 민속종교를 총칭하는 것으로 원래 일본 각지에 있는 수많은 신들을 다양한 형태로 믿고 있었던 애니미즘이나 조상을 모시는 조령신앙에서 유래되었다. 신도라는 이름은 불교가 유입되고 국가 종교로 채택되면서 그때까지의 신앙을 명확히 확립하기 위해 발생했다고 한다, 김남희는 일본에서는 불교가 민간신앙을 흡수한게 아니라 민간신앙에서 불교가 흡수된 것 같다.

 

일본불교는 교단으로서는 많은 종파로 나뉘어 발전해 왔지만, 그 근저에는 종파에 관계없이 민간신앙이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불교를 이 민간신앙의 양쪽에서 받아 들이고 있기 때문에 형태야 어떻든 신앙 내용에 있어서는 대략 불교와 비슷하지도 않게 되어있는 그런 민간신앙으로서의 일본불교를 그것이 불교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든가 비속해서라든가 자아확립이 철저하지 않기 때문이라든가 하는 이유로 눈감을 수는 없다.

 

대다수 서민들은 그 불교답지 않은 민간신앙적 불교로 일상생활에 안정을 얻었고, 그렇기 때문에 사찰과 승려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고라이 시게루가 민속학을 하게 된 계기는 민속학에 흥미보다는 일본인의 서민생활 속에 불교가 어떤 형태로 녹아 포함되었는지 불교가 서민속에서 어떻게 변용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어느 특정한 집단에 의해 향유되는 것이 아니다. 신분,경제적 여건 등 세속적 기준을 넘어 보편적 상식을 기반으로 성립되었다. 다만 연구자 중심의 결과물은 신앙자 신분, 신앙형태를 통해 왕실불교, 귀족불교, 정토신앙, 법화신앙으로 나누고 있다. 고라이의 서민불교론은 단순히 개인적인 연구 결과보다 그 시대학문 경향성과 함께하고 있다.

 

서민불교란 원래 문헌을 통하여는 구하기 어렵고 서민이 믿는 불교 및 그 학회에 주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요구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민불교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불성을 어떻게 하여 살리게 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경제, 정치평화 속까지 전개하는 것은 종교와 정치를 혼동한 것이다. 일본 서민불교에서는 사후의 멸죄를 염불이든 법화경이든 진언대로 기대하기 때문에 서민들은 오히려 힘의 부처로서 관음의 권력을 추구한 것이다.

 

겸창시대에 이르러 진실의 불교 서민불교으로서 법연, 친란 등의 정토교가 민중의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의 서민불교란 승려의 불교가 아니라 신앙자의 불교로 크게 변화되어진 것이 확인된다. 

▲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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