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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친 일본 불교 민속학의 창시자 고라이 시게루(五來重)(下)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3/10/18 [09:36]
서민들은 불교답지 않은 민간 신앙적 불교로 일상생활에 안정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친 일본 불교 민속학의 창시자 고라이 시게루(五來重)(下)

서민들은 불교답지 않은 민간 신앙적 불교로 일상생활에 안정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3/10/18 [09:36]

<연재순서>

()종파에 관계없이 민간신앙이 습합된 일본 불교

()일본불교의 현주소는 장례불교이며 조상공양 불교

 

한국의 불교에서도 민속적인 또는 정치적인 조건에서 어느 시대에는 유교 등과 손잡은 바 있었으나 일본에서는 백제를 통해 처음 불교가 전래된 이래 또한 직접적으로 불교나 그 문화의 유입에 있어서도 일본고유문화의 저질성은 이들 경전류를 완전히 소화할 수 없어 한역경전은 불교가 백제의 성명왕에 의하여 처음으로 일본에 전해졌다고 한다.

 

한역경전을 통하여 선사(종사)가 득한 불교의 깨달음을 선사(종사)의 언어 체험을 통하여 이를 신자들이 자기 것으로 하여 실천하는 곳에 일본의 불교, 특히 서민이 신봉하는 불교의 특색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 있어 서민불교란 겸창시대 이후의 일본불교이 주류로 되어진 정토문계의 종파를 중심으로 하여 이를 일본 자신의 조상숭배와 결합시켜 종파불교가 성대해진 것은 중국과 같은 염불과 선을 융합한 것 같은 통불교의 수용이 아니라 각 종의 개별적인 움직임이 오늘날 일본불교의 대세이며 단일불교의 조직을 갖지 않고 있다.

 

일본불교의 현주소는 좋든 싫든 장례불교이며 조상공양 불교이다. 이상은 아무리 높아도 좋고 또 불교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어도 좋다. 그러나 일본 불교가 장례식과 조상공양으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또 일반서민들의 종교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현실만큼은 직시해야 할 것이며 이는 일본불교의 최선이다. 고라이는 제사와 장례를 중요시하는 일본불교, 민속종교, 민속신앙에 대해 종교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

 

종교의 생명은 신앙이다. 신앙에는 본질적으로 고급도 저급도 있을 수 없다.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영혼을 구제하자는 종교적 요구는 장례식과 공양으로 나타난다. 이것도 제사의 목적은 원래는 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회적 재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영혼을 진정시키고 부드럽게 하는 진혼의 묘술을 행하는데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어쨋든 영혼의 실재를 믿는다는 신앙이 전제되는 것에 비해 불교철학이나 불교예술의 감상과 연구는 영혼의 실재라는 신앙과는 거의 무관하다.

 

영혼관이나 조상관은 그 민족에 고유한 것이 서민들 사이에 전승되고 있으며, 이것이 민속으로서의 장송이나 공양의 방식을 규정한다.

 

일본인의 불교 이전 서민신앙에서는 사령은 이러한 멸죄, 속죄, 정화를 거듭해 조령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령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나는 영혼승화설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죽은 자가 신이 되는 예는 영웅호걸에게 많다. 그러나 누구나 공양을 받으면 신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 의한 조령공양은 신도에 의한 산신제와 동일 선상에 있으며, 여기에 신불습합의 근본적인 구조가 있다.

 

서민들은 불교답지 않은 민간 신앙적 불교로 일상생활에 안정

 

일본 불교는 교단으로서는 많은 종파로 나뉘어 발전해 왔지만, 그 근저에는 종파에 관계없는 민간 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불교를 이 민간신앙의 양쪽에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형태야 어떻든 신앙내용에 있어서는 대략 불교와 비슷하지도 않게 되어 있는 그런 민간신앙으로서의 일본불교를 그것이 불교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든가, 비속해서라든가, 자아확립이 철저하지 않기 때문이라든가 하는 이유로 눈감을 수는 없다.

 

대다수 서민들은 그 불교답지 않은 민간 신앙적 불교로 일상생활에 안정을 얻었고, 그렇기 때문에 사찰과 승려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장례불교, 기도불교를 믿지않는 것은 영혼불멸과 기도를 믿지않는 소수승려들에 의해 형성된 신앙관이다. 이것을 계속 주장하게 되면 서민들은 종교적 귀의처는 위축되며 결국 불교의 쇠락으로 갈 수 있다.

 

민중 쪽은 농어민 기술자 상인으로서 하루하루 바쁘게 살면서 철학 사상 예술을 향유할 만큼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래도 생활상의 불안이나 고통이나 고민이나 불행이 있다면 그들이 평소 지탱해 온 불교에 구제를 구할 권리는 있다. 그것을 불교는 장례불교가 아니라고 가볍게 여기거나 기도불교가 아니라고 하니 백성들은 설 자리가 없다. 원래 장례불교가 싫은 것은 영혼불멸을 믿지 않는 인텔리승이 장례를 집행하기 때문이고 기도불교가 미움을 받는 것은 스님이 기적의 열매를 믿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 불멸과 기적을 믿지 않는 종교는 거의 종교적 자격이 없다. 서민들의 입장에서 영혼불멸을 믿었기 때문에 장례뿐만 아니라 모든 염불신앙과 열반·피안 등 불교적 연중행사를 즐겼던 것이다. 일본에서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어 서민교화에 활용되어가는 과정에서 중국민족의 고유신앙 도교및 유교에서 비롯되는 선조공양 의식및 민간신앙 등이 불교와 습합하여 불교가 장례의식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불교의 위패는 유교장례에 이용되는 신주(神主)가 변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어느 정도 중국화한 불교는 6세기 중엽 백제를 통해 아스카시대에 들어왔다. 불교는 호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극진히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황실과 귀족층에 주로 신앙되던 불교는 가마쿠라 시대에는 서민층에도 불교가 확대되어 서민의 장례에도 불교식 장례법이 침투하였다. 또 하나 조상공양이라는 것은 이른바 불교에는 없는 것으로 완전히 일본의 민간신앙인 것이다.

 

 

▲ 일본 정토종 총본산 지오닌 사원. 불교를 귀족종교에서 일반 서민의 구원을 위한 서민불교로 전파시켰다.

 

귀족종교에서 일반 서민의 구원을 위한 불교를 전파시킨 정토종(淨土宗)

 

일본에서 자연은 단순히 시각적 의미의 자연이 아니다. 생명유지와 풍요를 가능케 하는 감사와 경외의 대상이다. 자연의 삼라만상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정령숭배를 기반으로 800만의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800만 신이라는 독특한 자연숭배가 뿌리깊게 내려있다.

 

대표적으로 800만 신은 태양신, 아마데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후손인 천황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일상 속에 신사참배를 생활화 했다. 한편 불교는 고대 천황제 중앙집권국가 형성시기인 6세기에 백제로부터 전래됐다. 8세기 나라(奈良)시대에 중국으로부터 화엄종이 들어오고, 중세 헤이안(平安)시대에 천태종(天台宗)과 진언종(眞言宗)이 들어와 일본불교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학승들이 경전과 교리를 연구하며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귀족과 승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귀족종교의 성격이 강해서, 일반 민중에 대한 포교활동은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마쿠라(鎌倉)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반 서민의 구원을 위한 불교, 즉 알기 쉬운 교리와 단순하고 실천 가능한 서민불교가 퍼져나갔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종파가 정토종(淨土宗)이다. 정토종은 아미타불(阿弥陀佛)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기만 하면 정토 왕생한다(一向專修)는 신앙운동을 전개해 대중적 호응을 얻었는데, 그 후 아미타불의 본원 믿음()을 중시하는 정토진종(淨土眞宗, 죠도신슈)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파생되었다. 유일신적인 정토진종은 서민불교로서 오늘날에도 일본불교의 최대 종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신도와 불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일상생활 속에서 융합되고, 상호간에 서로 구분하기 어려운 신불습합이 일본사회와 문화, 일반 민중의 생활 전반에 깊숙이 정착했다.

 

서민들과 함께 수행한 승려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이는 고라이의 민속불교

 

고라이의 불교 민속학의 역사적 시작을 上別府 茂 解說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면 , 불교 민속을 지칭한 것은 고야산 대학에서 일본불교 민속사(1951)라는 제목으로 개강을 하였고, 그 강의 노트가 최근에 발견되었다(미간행). 그리고 1962(1952)에 고라이는 고야산 대학 역사연구회를 주재하고 <불교민속>이라는 이름의 연구 기요를 창간, 그 제1호에 게재된 고라이 논문은 불교와 민속학이라는 제목으로 이형토바를 민속학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2호는 불교 의례의 민속성() 특히 수정회와 슈이회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양회의 일본 쪽 전개를 논했다. 두 논문 모두 불교 민속구상 초기의 견해를 밝히면서 구체적 작업사례로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견해를 발표하여 현재도 유력한 해설로 되어있다.

 

이후 불교 민속의 개념을 공개적으로 보여준 것은 일본민속학대계8(평범사, 1959)에 발표한 불교와 민속이었다. 고라이가 창시하여 세계에 걸쳐 추구한 일본 불교 민속학은 어떤 학문이었을까 그 키워드는 문화변용이다. 즉 외래의 불교가 일본의 기층문화와 접촉하여 문화변용하고 전개하는 발자취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인도의 경전이나 중국의 의궤에도 없는 같은 불교적 민속자료를 수집하여 서민들의 불교 신앙의 내용과 특색, 불교 사회()의 구조, 서민의 불교수용 방식, 수용된 불교의 변화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일본 불교민속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학위논문(문학박사 논문)을 취득한 것은 1962(昭和 3)<일본불교 민속학 논고>라는 제목으로 염불 예능을 연구작업 예로 내고 있지만, 이것은 고라이(五來重)는 불교 민속학의 궁극적인 개념을 규정하는 논문이 되었다. 그 결론에 의하면, 단지 이 논문을 가지고 일본 불교 민속학의 학문 영역의 존재와 그 방법을 제시하고 인류문화와 민족문화 연구를 통해 이러한 기층문화에 명확하게 하는 길을 민속학이 펼쳐진 이상이 일본불교 문화의 연구상 적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결과 기존의 교리적 연구와 철학적 연구와 역사적 연구에서 규명 되지 못한 일본 불교문화 현상이 해명되면 수업 전체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일본 불교 민속학의 제창은 또한 그의 역사관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와 동시대 연구자라 할 수 있는 宮田 登(미야타 노부루)은 불교의 민속화 현상은 일본불교가 도입 당시 이미 여러 문화의 과적(果積)이 있다는 사실 위에 한층 더 정착화의 과정에서의변용이라고 하는 이중의 변용이 있었다고 한다.

 

후지이 마사오(藤井正雄)는 민속의 불교화 관점이 과거에 크게 바뀌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것은 민속에 의해 규제되어 불교가 변용한다고 하는 사고 방식이다. 그리고 불교의 민속화와 민속불교화의 양면을 종합해 불교 민속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방법론으로는 민속학을 중심으로 불교의 연구를 바탕으로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으로의 접근이라는 연구의 다양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일본 불교민속학의 성립은 막연하게 불교권인 동아시아에서 남아시아 나아가 티베트 불교를 포함한 비교불교민속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라이의 민속불교와 함께 그의 사상의 중심에는 서민들에 대한 애정어린 눈길이 있다. 함께 수행한 승려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승려들의 육식과 결혼에 대해 고라이는 단순한 파계행위가 아니라 일본불교의 전통을 유지한 것으로 일본고유의 서민신앙을 불교에서 살린 종교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일본인이 산에 신령의 실재를 믿고 산에 들어가 신을 섬기고 산 속에서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행을 한 것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의 고유한 신앙이었으며 이 일은 불교 전래 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극락은 불교가 가져온 이상세계, 깨끗한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 지옥은 일본인 고유의 사후세계관의 황천에 가까운 고난의 세계 따라서 현실적인 세계의 표현이다.

 

기도와 고행 실천이 결여된 주술은 거짓 종교-주술자체는 기도라는 종교의 본질

 

평범한 사람들에게 불교신앙은 사후 극락에 태어나기를 바라기에 앞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겠다는 현실적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이 때문에 법화경의 멸죄성, 반야경전 기타 경전의 멸죄성, 진언멸박의 멸죄성과 염불의 멸죄성이 강했다.

 

일본 민족에 고유한 영혼관, 타계관은 모두 산과 관계가 있으며, 이것이 불교와 결합함으로써 영산 신앙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영장사찰이 세워졌고 현세이익의 주술신앙과 함께 납골신앙과 죽은 자에 대한 공양신앙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토신앙도 영산을 매개로 일본인들 사이에 정착하게 되었다.

 

일본 사회와 교단의 저변을 지탱해온 평범한 사람들이 받아들인 불교를 외면한 채 일본 불교를 논하고 그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얼마나 편파적인지 밝힌 것이 고라이의 견해다.

 

특히 불교가 사변적인 철학(교리)일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삶에서 절실한 구제(신앙)인 한 서민측 불교를 배제 할 수 없다는 고라이의 연구방법론은 불교민속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민속신앙은 주술과 점술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의 견해는 결국 기도와 고행을 뒷받침하는 주술은 진정한 종교이며 신자들의 심신에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주장을 하게된다.

 

다만 기도와 고행의 실천이 결여된 주술은 아무리 도구가 훌륭해도 거짓 종교라고 말하고 있다. 주술자체는 기도라는 종교의 본질의 표현이지 악이 아니다. 문제는 이를 실천하는 종교인, 주술인의 신앙 내용과 도덕성에 찾고 있다. 연구자를 중심으로 기도불교를 경멸하지만 기도는 본래의 의미에서는 종교의 생명이다. 기도가 일부 귀족이나 권력자를 위해서만 행해지거나 기도가 형식화된 경우에는 비판받아야 한다는 고라이의 불교관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고라이의 불교연구방법론 접근은 일본이란 지역적 한계신앙이 아니다. 인류보편적 신앙 정착방법으로 연구되었다. 그의 접근방법은 서구의 토착화 이론과 비교연구라는 과제를 남겼다.

 

▲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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