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각각의 지역과 시대, 민족성에 상응하는 불교로 변화
불교는 말 그대로 붓다에 의해 성립된 종교다.
지금의 인도 어느 지역에서 태어난 아이에 의해서다. 그는 왕자의 몸으로 태어난 고귀한 신분이며 그 자신이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왕자라는 기득권을 내려놓았다는 주장이다.
우리 사회가 여행 자유화되면서 불교 신자들은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인도여행을 떠났다. 그곳을 다녀온 대부분 사람은 실망한다. 붓다의 아버지(정반왕)가 지배한 지역의 규모에 실망했고, 붓다가 깨달았다고 하며 창교한 지역의 불교가 소멸에 가까운 교세에 또 한 번 실망한다.
대웅은 큰 곰,우리 민족 단군을 모셨던 곳-불교 전래되면서 쫓겨났다?
여행 자유화 폐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민족종교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아전인수적 해석으로 드러난다. 절에서 가장 중심에 가장 멋지게 있는 큰 규모의 건물, 대웅전과 관련 대웅은 큰 곰을 말하며 우리 민족 단군을 모셨던 곳이다. 그곳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쫓겨났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중국, 대만, 홍콩, 베트남을 다녀온 이후 그곳에서 흔히 보이는 대웅전이 한국 사찰과 같은 붓다를 모심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이후 대웅과 관련된 거짓된 주장은 하기 어렵게 되었다. 같은 한자문화권에 일본의 경우는 대부분 본당이라고 한다. 그 외는 금당 혹은 불전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베트남이다. 간혹 베트남을 다녀온 분들이 그곳 사찰에는 대웅전이란 문패가 없다고 주장을 한다. 한문 문화권인 베트남은 1624년 포르투갈 선교사 알렉산드로 드로데 신부(프랑스 아비뇽 1591-1660)가 창안한 문자를 사용하고있다. 전통사찰에는 ‘대웅전’, ‘주련’ 등에는 한자로 표기하고 있다.
대웅(大雄)은 법화경에서 위대한 사람,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대웅전은 그 분을 모신 웅장한 건물이란 뜻이다. 붓다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다. 문수는 지혜를, 보현은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는 행원을 상징한다. 본존불을 좌우에 보좌하는 협시보살이다.
대웅전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 할 때는 석존의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시고 다시 각각의 좌우에 보좌하는 보살을 모신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거주하는 사람에 따라 건물의 이름이 정해졌다. 건물은 위로부터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의 8 품계로 나뉘었다.
민간신앙의 전각인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 등 각은 4번째에 해당한다. 결국 불교가 한반도 내 고유신앙을 포용하면서 그 격을 상당히 낮게 평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또 대다수 전각은 대웅전이라고 하는 불교의 주불인 붓다를 모신 곳을 지나도록 하는 방법을 통해 불교와 친숙하게 하는 포교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삼국유사만 본다면 산신은 곧 단군, 대웅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것에 고마움 느껴
대부분 사람은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을 신과 가까이 하는 것으로 인식, 대웅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것에 대해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붓다보다 더 높게 받들고 있다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이와 같은 속 깊은 배려심(?)에 한국불교가 민족 종교화될 수 있었다.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 각지에 전래된 불교는 갖가지 모습의 일부를 답습하면서 거기에 다양한 변이를 더하고 변천이나 전개를 이루어 각각의 지역과 시대와 민족성에 상응하는 불교로 변화가 일어난다.
산신과 단군의 관계를 살펴보면 무왕 즉위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고 그 후 아사달로 돌아와서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 1908세였다. 삼국유사만 본다면 산신은 곧 단군이 된다.
전(殿)은 왕과 왕비의 거처 및 집무실과 붓다, 공자를 모신 곳이다. 근정전(勤政殿), 강녕전(康寧殿), 교태전(交泰殿), 대성전(大成殿) 등이다. 왕을 전하(殿下)라고 하는 이유는 왕을 뵐 때는 왕의 거처인 전의 아래에서 뵙기를 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하라고 부르는 것이다.
당(堂)은 왕의 자녀, 큰 스님 유생들의 공부방으로 자선당(慈善堂), 명륜당(明倫堂)이 예다. 합(閤)은 왕족 중 서열이 높은 사람 또는 전, 당의 부속건물이다. 각(閣)은 왕실 가족, 정승, 판서의 집무실을 말한다. 박정희, 김영삼 대통령까지 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재(齋)는 고급 관리, 헌(軒)은 공무용 건물이며, 누(樓)는 휴식용 2층 건물, 정(亭)은 휴식용 1층 건물이다.
친일 행적과 민족적 행적이 뒤섞인 모습의 조계사
자의반 타의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으로 대한불교 조계종은 선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단으로 중국 선종의 흐름과 그 맥을 같이한다. 따라서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중국 당나라 때의 육조 혜능(638-713) 스님까지 이어지게 된다. 선불교를 처음 연 조주 달마 스님 이후 6조가 되는 혜능 스님은 선종의 사상적 기초를 굳건히 다지면서 조사선을 실질적으로 정착시켰다. 조사선이란 선의 등불을 밝히고 이어온 뛰어난 스승인 조사들이 전한 선이라는 의미로 조사선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애둘러 보여 주지 않고 단박에 일깨운다는 이론으로 무장된 한국 대표종단이다. 조계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 교구 본사이다. 여기서 주목해 살펴볼 건물은 대웅전이다.
조계사의 창건은 각황사에서부터 비롯된다. 각황사는 1910년 옛 중동중학교 자리에 세워진 절이다. 그 전에 원흥사에 있던 ‘조선불교 중앙회’ 사무소를 옮겨와 한국 근대불교의 새 불교 운동을 이어지게 했던 중심 사찰이었다. 당시 일본은 총독부가 ‘조선 사찰령’이라는 것을 선포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사찰을 그들의 일본 사원인 장충단의 박문사에귀속시키려 하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해인사 주지 회광, 마곡사 주지 만공 그리고 만해 한용운 스님 등이 ‘31본산 주지회의’를 열었고 그때 만해 한용운이 ‘조선불교 선교 양종 승려대회’를 열어 종회법을 제정하였고 그 뒤 1937년 각황사를 현재의 조계사로 옮기는 공사를 시작으로 이듬해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여 절 이름을 태고사로 하였다.
박문사는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세운 일제 사찰 조동종 소속사찰이다. 해방 이후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김법린이 박문사 일대를 사원 대신에 선열을 추도하는 기념공원으로 만들자고 주장, 그 결과 박문사는 적산에서 분리되어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지금은 신라호텔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관 계단을 올라 보면 총독부 관저가 바로 내려다 보인다. 정문 뒷에는 비보용 작은 돌무더기가 있다. 다시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찰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인가를 받아 조선불교 조계종이 발족 되었고 제1세 종정에 한암 스님이 취임한다. 그러나 광복 후인 1945년 9월 이곳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사찰령 및 태고사법 폐지를 결의하고 새로이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하여 제1세 교정에 한영, 중앙총무원장에 법린 스님이 각각 취임하였다.
광복 이후인 1954년에는 대처승과 같은 왜색불교 정화 운동의 과정 중 안국동의 선원에 있던 비구승들이 태고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서로 갈등을 빚어 원래의 태고사란 이름과 비구승들의 조계사라는 이름이 같이 붙게 되었는데, 결국 1954년 이러한 감정은 ‘비구승 대 대처승 분규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 정화 담화문’을 통해 간접적인 지원에 힘입어 비구승들의 승리로 끝났다. 비구승의 주도로 1962년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세워지자 태고사 역시 조계사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유지된다. 비록 과정에 문제가 있었지만, 전통적인 비구승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대처승들을 몰아내었음은 불교계가 전통적인 모습으로 부분 회귀하는 데 성공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현재와 같은 전통승가의 모습은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에 의한 개편이다. 그러나 이후 조계종은 내부 분규 사태나 지나치게 순수불교를 지양하면서, 정작 전통불교에서 멀어지거나 무리한 불사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문제는 불교계 구성원들의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조계종과 조계사 그리고 한국 근대불교의 역사는 친일 행적과 민족적 행적이 뒤섞인 모습이다. 전체를 친일이냐, 민족이냐로 규정하기 전에 상당히 불행했던 역사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역사를 창피하게 느끼는지 많은 글에서 조계사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간략하게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조계종/태고종 (혹은 태고종/조계종) 주도로 펴낸 불교 관련 서적과 일반 학자들이 쓴 불교사 책을 비교해 보면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지만, 특히 이 부분에서 차이가 크다. 일반 학자들이 쓴 책이 중도적인 입장에서 서술한다면, 각 종파가 낸 책은 유혈 충돌 부분은 최소화하면서 자기 종파의 정통성 강조에 특히 집중한다.
불교 정화 운동은 비구와 대처 사이의 종권싸움으로 비화되어 치열하고도 오랜 공방 끝에 비구 측이 종권을 확보하고 태고사를 인수하게 되면서 일단락되었다. 1962년 3월 통합종단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양측의 물리적 충돌은 있었지만, 불교 정화 운동이 일단락된 1955년 태고사를 조계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조계사는 현재까지 대한불교 조계종의 행정 중심 사찰이 되고 있다.
본래 조계사 대웅전은 일제시대 증산 계통의 종교 보천교의 본당인 ‘십일전’이었다. 조계사 대웅전 벽에 새겨진 문양들이 한국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문양이 아니라 어딘가 민속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가 있다. 보천교의 교주인 차경석(188?~1936)은 전라북도 정읍에 ‘진정원’이라는 궁궐 같은 집을 지었고, 그 위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차 천자’로 불렸다. 그런 진정원에 경복궁 근정전만큼 큰 건물을 본당으로 지었는데 바로 십일전이다. 십일전 앞의 삼광문도 용머리 조각에 화려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1928년에 완공되었다.
그런데 일제가 보천교를 독립운동 지원 혐의를 빌미로 교단을 해체하면서 보천교의 시설들을 압수해 헐값으로 매각하였고, 이때 진정원의 십일전 목자재들을 불교계에서 매입하여 1937년 11월 26일에 지금의 대웅전을 짓게 되었다. 조계사는 대웅전을 완성한 이듬해에 단청을 칠하고 화엄사 대웅전 편액의 탁본을 떠서 현판을 만들고,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에서 본존불상을 가져와서 대웅전에 안치하였다. 차경석의 아들은 공비 토벌대장 차일혁 경무관이다. 구례 화엄사, 고창 선운사를 비롯 여러 사찰을 지켜냈다. 차일혁의 아들은 예언자 차길진 법사다. 후암정사 회주와 한국불교 태고종 기관지 한국불교신문 사장을 엮임했다.
불교사찰과 무속인들의 굿당, 기도처가 함께 공존하는 인왕사
인왕사는 종로구 무악동 산 3번지에 있는 사찰이다. 이 절은 현재 단일 사찰이 아닌 여러 개의 작은 암자들이 인왕사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인왕사는 본래 조선 태조가 서울에 도읍을 정한 뒤 궁궐에 있던 내원당의 조생 스님을 주지로 삼아 인왕산의 호국 도량으로 창건한 절이다. 1503년에 이 절의 입지가 경복궁을 내려다보고 있는 위치라 하여 한 때 철거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세워졌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에 타 없어지고 복원되지 않다가 그 터에 1912년 박석묵 거사가 ‘선암정사’라는 이름의 암자를 세웠다.
이후로는 1914년 탄옹 스님이 대원암, 1922년 서옹스님이 극락전, 1924년 자인 스님은 안일암, 1927년 춘단 스님이 다시 극락전, 1930년 묘법 스님 치성당을 각각 세우면서 여러 개의 암자가 한 터에 군집되었다.
1942년 이들을 통합하여 인왕사라는 이름으로 등록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미타사(옥수동), 대한불교 보문종 보문사(보문동), 한국불교 태고종 봉원사(서대문구,새절 )의 경우 동일 종단 소속으로 큰 법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암자, 사찰이라면 인왕사는 다수의 종단 사찰과 소속 종단이 없는 무종단 사찰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개인주택형 사설 사암으로 매매가 가능하다. 현재 주지스님이 공석인 사찰도 여럿있다. 단 국가 소유 토지에 건물을 올려 건축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렇게 여러 개로 독립된 암자들은 하나의 절 이름과 또 전체를 대표하는 주지도 한 사람으로 등록하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각각의 암자마다. 따로 주지가 있고 운영도 별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통일된 체계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현재 전통 사찰 인왕사로 등록된 사찰은 본원정사, 관음전, 보광사, 대웅전, 극락정사 등 5개다.
인왕사 경내에 있는 선바위는 인왕산 서쪽 기슭 인왕사 부근에 두 개의 큰 돌를 선바위라고 부른다. 이름을 선바위라고 한 것은 이 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다. 해서 ‘선(禪)’ 자를 따 그렇게 부른다고 하는데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 또는 조선 태조와 왕비의 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측면에서 보면 남성의 성기가 발기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선이 참선 선, 남성의 심볼이 발기된 모습이 서 있다는 말은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자료에서는 부암동 붙임바위와 함께 자손을 바라는 기자 바위로 소개되고 있다. 후자의 주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인왕산 선바위는 계룡산, 태백산과 함께 무속인들이 많이 찾는 기도터다. 이들은 불교색채가 강한 승려의 형상을 한 선바위 그 너머에 있는 부처바위를 찾는 것이 아니라 기자신앙을 통한 소원성취 발원이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남산의 산신을 목면대왕으로 봉하고 호국신으로 모셨다.
조선이 귀속된 이후 국사당은 1925년 일본은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자기들의 신사보다 높은곳에 있는 것이 못 마땅하게 생각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았다. 현재는 무속인들이 주로 찾는곳으로 굿당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불교사찰과 무속인들의 굿당, 기도처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 인왕사의 오늘 모습이다.
참고로 국사당은 남산 팔각정에 신사는 남산 식물원에 있었다. 안중근 기념관에 오르는 계단을 통해 신사로 올라갔다. 김소월의 시비 산유화가 있는 주변에는 단군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왜정때 만들어놓은 방공호를 이용 성전으로 사용했다. 남산주변 정화사업 폐쇄되었다.
‘산신지위’ 등 민간신앙과 불교의 습합 현상 보여주는 옥천암
서대문구 홍은동 산 8번지에 있는 옥천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이때부터 하얗게 칠을 하였다고 한다. 머리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머리카락은 어깨를 따라 팔꿈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비교적 둥근 얼굴은 눈이 가늘고 입이 작게 표현되어 고려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인다. 옷은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옷 주름은 선이 깊지는 않지만, 신체 전반에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아미타불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마애불로서 북한산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보인다.
절에는 큰 바위에 위패 형식으로 ‘산신지위’가 쓰여 있었다. 민간신앙과 불교의 습합 현상이다. 최근, 이 바위에 산신을 조각해 놓고 전각을 세워 밖에서 기도를 올리는 형태로 건축했다.
보천교 건물, 기자신앙과 굿당 그리고 산신이 새겨진 바위-이것이 한국불교 모습
조계사, 인왕사, 옥천암은 건물 주변환경 모두 온전하게 불교만 존재하지 않고 있다. 보천교 건물, 기자신앙과 굿당 그리고 산신이 새겨진 바위 이것이 한국불교의 모습이다. 여기서 순수불교만 고집할 수 없다. 불교가 인도에서 출발해 중국을 거쳐 한반도 전개되면서 도교와 민속신앙이 만나면서 토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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