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소수민족이 어울려 사는 중국 속 중앙아시아
다양한 소수민족이 어울려 사는 중국 속 중앙아시아
가는 곳마다 검문 실시, 긴장감 도는 휴화산 분위기 중국적인 모습으로 변화, 시키고 있었다. 우루무치는 가는 곳 마다 건설 현장이었고 옛터에 있던 불교와 도교사원도 복원하고 있었다. 공항과 신시가지는 중국적인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지만, 위구르족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우루무치의 구시가지에는 페르시아 풍의 건물인 국제대파(시장)가 있었는데,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이 이곳에서 물건을 사다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나 우주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서 판다고 했다.
실크로드기행에서 타림분지 일대는 아직도 중세시대의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둔황에서 약간의 중세적인 모습을 느끼다가 하미와 투루판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위구르족을 보면서 아, 여기가 신장성이구나 하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新疆维吾尔自治区)는 중화민국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인 위구르무슬림들의 고향이다. 신장성 인구는 2천 5백만 정도 되는데, 위구르족은 45%인 1천만 명 정도 되고, 한족(漢族)도 1천만 명 정도 되며, 나머지는 카자흐족(7%) 회족(5%) 키르기스족(0.9%) 몽골족(0.8%)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중국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남한의 10배 정도가 되는 비교적 큰 지역으로 서유럽과 거의 맞먹는 광대한 지역이다. 위구르족은 이곳이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18세기 이전만 해도 이 지역을 서역이라고 불렀다. 실크로드가 바로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유목민족들인, 흉노족, 돌궐족, 몽골족 등의 지배를 받았다. 한나라나 당나라 때와 같이 중국의 왕조가 강성했던 시기에는 관부를 설치해 직접 지배하기도 했으며 이 지역의 민족들과 나라들을 영향권 아래 두기도 했다. 하지만 당 왕조 이후 중국은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이 지역은 위구르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 위구르인들은 불교를 믿다가 10세기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몽골족이었던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 하에서 급속히 이슬람화 되었다. 18세기 중반 청나라가 몽골을 완전히 정복한 후, 이 지역을 침략하면서 위구르족들의 저항에 직면했고, 19세기 중반 청나라 군대가 철수했다가 1876년 다시 청나라가 장악했고, 1884년에는 신장성을 설치, 중국의 영토로 합병하였다. 하지만 위구르족들은 부단하게 독립운동을 벌인 결과 1933년 동투르키스탄 이슬람공화국을 건국했으나, 3개월의 단명으로 끝나고 1944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성립되었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에 병합되고 1955년에는 신장위구르 자치구가 되었다. 하지만 위구르족들은 이 지역을 동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르고 있다. 위구르족들은 중국뿐 아니라 파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몽골, 우즈베키스탄, 독일, 터키, 러시아 등에도 흩어져 살고 있다. 중국에서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뿐만 아니라 후난성 창더 시의 타오위안 현과 베이징, 상하이와 같은 주요 도시에도 살고 있다.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와 워싱턴 D.C.에도 위구르족 공동체가 있으며, 캐나다의 토론토와 밴쿠버에도 살고 있다. 외모는 다양해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들과 유사한 경우도 있지만, 유럽인처럼 피부가 흰 혼혈 위구르인들도 있다. 고대 실크로드 시대에는 둔황에서 실크로드로 진입하는 길은 두 곳이 있었는데,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阳关)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옥문관은 둔황에서 서북쪽 90km 지점에 있었던 관문(關門)이었는데, 한나라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설치했다. 지금은 유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당나라 때 까지만 해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요즘 같으면 출입국관리소였다.
메소포타미아로와 호박로(琥珀路)가 그것들이다. 마역로는 몽골의 막북에서 카라코룸(13세기 몽골제국 수도)을 지나서 장안이나 베이징에 연결되어 항저우나 광저우의 해로와 접하게 되는데, 북방 유목민족과 한(漢)민족 간의 전쟁로이기도 했다. 군사와 사회.군사적으로 말(馬)은 중요한 교역대상이었으므로 이 길을 마역로라고 부른다. 라마로는 중가리아분지에서 투루판과 곤륜산 뤄창(若羌 약강)을 지나서 티베트의 라싸를 거쳐서 히말라야 산맥의 시킴에 이른 후에, 인도 갠지스 강 어구까지 이어진다. 토번(티베트)이 7-8세기 중국으로 통하는 경로의 라마로를 장악하여 서역 원정로 역할을 했고, 당의 사신이나 구법승들이 이 길을 따라서 인도에 왕래했다. 티베트 불교는 이 길을 따라서 몽골에 전파되었다. 이 길은 또한 당번고도(唐蕃古道)라고 해서 당나라 문성공주가 티베트 왕에게 시집간 길이기도 하다. 불타로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서 출발, 우주베키스탄의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를 거쳐서 아프가니스탄 북부 발흐와 지금의 파키스탄 페샤와르와 간다라를 지난 후, 인더스 강 유역을 따라서 중인도 서해안에 있는 바루가자까지 남하하는 길이다. 이 길은 동서남북 교통로의 중심교차점에서 동서 문명의 교류와 교역상 중요한 길이었다. 기원전 2천년 경 아리아인들과 후세에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과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등 외래인의 인도 침입은 모두 이 길을 지나서 인도에 들어갔고, 불교는 이 길을 따라 북상한 다음,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동북아시아에 전파됐다. 법현 현장 구법승들이 이 길로 천축에 가서 불법을 배워왔다. 메소포타미아로는 흑해와 카스피해 중간지대인 코카서스의 북부에서 티크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지나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메소포타미아를 관통하고 페르시아 만의 바스라까지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수메르문화 바빌론 페르시아 이슬람 문화를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호박로는 북유럽 발트해에서 시작해서 모스크바와 키예프를 거쳐 유럽과 아시아 대륙이 만나는 지점인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을 지나서 지중해 연안을 따라서 이집트와 알렉산드리아 까지 남하하는 길이다. 이 길은 유럽산 호박의 교역로였다.
우루무치 이야기를 먼저하고 타클라마칸 사막이야기를 해보자. 우루무치는 약 3백만 명이 사는 제법 큰 도시이다. 중국의 서부 대 개발 프로젝트에 힘입어서 급속한 발전을 구가하면서 중국 북서부의 교통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우루무치는 중국영역이지만, 실제 가보면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대나 중세시대에 우루무치는 천산북로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청나라 건륭황제는 1763년 중가르지방을 직접 정벌하였고, 성벽을 설치해서 적화성이라고 명명했으며, 1880년대에 신장성이 설치되면서 우루무치가 성도가 되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우루무치에는 다양한 소수민족이 어울려서 살고 있다. 중국 속의 중앙아시아라고 하겠다. 하지만 중국은 중국적인 모습으로 우루무치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우루무치는 가는 곳 마다 건설 현장이었고 옛터에 있던 불교와 도교사원도 복원하고 있었다. 공항과 신시가지는 중국적인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지만, 위구르족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우루무치의 구시가지에는 페르시아 풍의 건물인 국제대파(시장)가 있었는데,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이 이곳에서 물건을 사다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나 우주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서 판다고 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먼 옛날에는 인도-유럽어족이 살았다고 하는데, 이들은 토카라(토하라)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언어는 기원전 37세기경에서 기원후 9세기 까지 거의 5천 년간 사용되었다고 하며, 19세기 말, 이들이 사용한 브라흐미 문자 계통인 토카라 문자가 쿠처에서 발견된 바 있다. 1979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롭 느르(나포박 사막) 호수에서 70km 떨어진 옛날 무덤에서 두개골과 기원전 1800년경의 여성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 시신은 건조지역에 있어서 보존상태가 양호해서 생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 미라는 ‘누란의 미녀’란 별명이 붙여져서 세계 각지를 돌며 전시되었고, 지금은 우루무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신장성은 중국의 6분의1 면적이다. 나포박 사막에서는 핵실험을 했고, 엄청난 천연자원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장성에는 천산과 곤륜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파미르 고원이 있어서 중앙아시아와 인도 파키스탄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위구르족과는 항상 긴장감이 도는 대치를 할 수밖에 없는 휴화산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가는 곳마다 검문이 실시되고 있으며, 여행이 결코 자유스러운 곳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상 이곳이 실크로드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런 불편은 감내할만했고, 또 가고 싶은 강인한 매력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계속) (이치란 해동 세계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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