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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기행⑦타클라마칸사막과 오아시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6/03/10 [07:00]
살아서 돌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막, 오아시스로의 전성기는 당나라 때

실크로드기행⑦타클라마칸사막과 오아시스

살아서 돌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막, 오아시스로의 전성기는 당나라 때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6/03/10 [07:00]

▲ 타림분지 타클라마칸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쿠처(庫車) 버스터미널에서 허텐(和田)행 버스 앞에선 필자 이치란 박사.     © 매일종교신문
 
살아서 돌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막, 오아시스로의 전성기는 당나라 때
 
실크로드선상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은 참으로 신묘(神妙)한 곳이라고 할 것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타림분지의 대표적인 사막지대이다. 몽골의 고비사막이 있지만, 타림분지의 사막들에 비교하면 그 범위와 위험도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정도로 타림분지의 사막들은 광대하고 험하기 그지없는 사막의 바다이다.
 
신장성 타림분지의 사막은 3대 사막으로 나눠진다. 타클라마칸사막,구얼반퉁구터사막과 고모찹격사막이 큰 사막이고, 민족에 따라서 다른 이름이 붙은 조그마한 사막들이 많다. 투르크어로 모래산이란 뜻을 갖고 있는 고모찹격사막은 타림분지의 동북부에서 둔황일대까지의 사막을 말한다. 구얼반퉁구터사막은 신장북부의 중가리아 분지의 일부분으로서의 사막이다. 타클라마칸사막은 타림분지의 대부분을 커버하는 광대한 그야말로 타림분지의 사막이다.
 
필자가 우루무치에서 이닝(伊寧)을 갔다가 버스로 이닝에서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넘어서 쿠처(高車)로 간 적이 있다. 정말 어마 어마한 광경이 펼쳐지고 산맥이 험하기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보지 않고서는 여기가 과연 천산산맥인가 할 정도로 험한 지역이었다. 일생에 이런 경험을 한다는 것은 흔치 않는 일이 아닐까 싶고, 아무리 필설로써 설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사람과 동물은 살고 있었고, 식물 또한 자기 종(種)을 분출하고 있었다. 다만 고대나 중세시대에 이런 험한 산을 넘어서 정복하고 무역을 하면서 역사가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상상하면서 천산을 넘어서 쿠처에 도달하자, 너무나 감회가 새로웠다. 쿠처는 고대 시대에는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국가로서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종족이 살았다고 하며 중국에 와서 많은 불경을 번역한 쿠마라지바(Kumārajīva 鸠摩罗什 344–413 CE)의 고향이기도 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쿠마라지바는 인도의 명문 귀족인 아버지 쿠마라야나(Kumārāyana)의 아들로 어머니는 쿠차국 왕의 누이동생인 지바카이며, 쿠차국에서 태어난 그는 7세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인도의 카슈미르와 서역에서 대승·소승을 배우고 고국에 돌아와 열심히 대승을 설파, 그 명성은 중국 내부에까지 퍼졌다고 한다. 그는 384년 쿠처로 쳐들어온 중국 후량(後涼)의 장군 여광(呂光)의 포로가 되어서 군사(軍師)로서 18년 동안 여광과 양주(涼州)에서 살았다고 하며, 401년 후진의 황제 요흥(姚興)에게 국사(國師)로서 영접되었다고 한다. 쿠마라지바는 경전 번역에 종사하여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 쿠처의 키질동굴사원 입구에 있는 쿠마라지바의 동상.     ©매일종교신문
▲ 많은 비구들이 은거하면서 수행했던 쿠처의 키질 동굴사원.     ©매일종교신문
▲ 쿠처 버스 터미널     ©이치란
쿠마라지바의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으나 그가 한역한 불경가운데《법화경》이나《아미타경》의 역문은 너무나 뛰어나다는 평가이다. 그는《반야경》과 《대지도론(大智度論)》등의 대승논부(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소개하였고, 불교 본연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하면서 당시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폐단이 비로소 극복되었다는 정평이다. 다시 타클라마칸사막 이야기로 돌아가자.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으로는 쿤룬 산맥(곤륜산), 남서쪽으로는 파미르 고원, 서쪽과 북쪽으로는 톈산 산맥(천산)에 의해 경계가 정해지는, 길이 1,000km, 폭 400km의 면적은 27만km²에 달한다. 필자가 쿠처에서 버스를 타고 사막을 가로질러서 곤륜산 아래에 있는 허텐(和田)까지 갔는데, 12시간이 소요되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을 횡단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필자가 가장 관심 가는 분야는 중국의 서역인도구법승들이다. 그들은 이 사막의 오아시스 나라들을 경유해서 사막 서쪽의 카슈가르에 도착해서 한혈마로 유명한 페르가나 계곡의 곡창지대를 지나서 서역의 사마르칸트나 부하라를 거쳐 힌두쿠시산맥을 넘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서 인도로 들어갔다. 무역상들은 서진해서 페르시아와 시리아 그리스 로마까지 연결되었다. 구법승들이나 무역상들은 카슈가르에서 파미르고원을 넘고 와한 계곡이나 카이버 고개를 지나서 지금의 파키스탄의 길기트 계곡을 거쳐서 간다라와 페샤와르에 도달했던 것이다.
 
옛날 실크로드의 오아시스로인 천산남로(天山南路)는 둔황에서 옥문관을 지나 하미-투루판-카랴사르-쿠처-아커쑤-카슈가르의 오아시스 나라들을 지나갔는데, 가장 많이 다닌 길이다. 천산남로 쿠처에서 사막을 횡단하여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곤륜산 밑에 있는 호탄으로 가서 야르칸드를 거쳐 카슈가르로 들어가기도 했다. 둔황에서 사라진 오아시스 도시 누란을 거쳐서 쿠를라와 쿠처를 가로질러서 가는 길이 있기도 했다. 또 둔황에서 양관을 나서서 곤륜산 북쪽 산 밑의 사막을 따라서 조그마한 오아시스 타운인 곤륜산 뤄창(若羌 약강)을 지나서 호탄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나라 때 중국의 현장법사는 쿠처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인도에 들어갔다가 귀국길에는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카슈가르에서 호탄을 거쳐서 약강을 경유하여 둔황에 이르렀다.
 
옛날에는 타클라마칸 사막은 너무나 광대하고 모래뿐이어서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스웨덴의 고고 탐험가 스벤 헤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 오아시스로의 전성기는 한나라 때부터 개척되어서 당나라 때, 최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후 이슬람의 침입으로 중앙아시아가 이들의 영역으로 들어가자 실크로드는 서서히 쇠퇴하다가 13세기 초, 몽골제국이 성립하면서는 초원로가 뜨기 시작해서 상대적으로 오아시스로는 기능을 점차 잃어가기 시작했다.
 
몽골초원에서 흉노의 뒤를 이어서 돌궐족 위구르족 티베트족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위구르족이 하서회랑과 둔황으로 밀리면서 결국 신장성일대에 정주하게 되어서 오늘날, 위구르족들의 고향이 되었다. 13세기에 출몰한 몽골제국은 초원로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일부는 곤륜산과 천산의 초지(草地)에도 근거지를 갖게 되었다. 또한 고비사막을 가로질러서 계속 서진해서 타클라마칸 사막지역에도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인지 신장성 군데군데에는 몽골족들이 있다. 지금도 타클라마칸 사막의 4분의 1 정도는 바인골린 몽골 자치주를 몽골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 곤륜산 밑 오아시스 허텐은 이슬람도시이다. 모스크가 우뚝하게 솟아 있다     © 이치란

한때 불교 도시였던 허텐은 이제 무슬림들의 도시이다. 투르크계의 위구르 족들이 대부분이지만, 인도 카슈미르에서 온 인도계 사람들도 제법 되는 듯했고, 도시 분위기는 인도 카슈미르 풍이 다소 섞여 있었다. 허텐은 처음엔 소승불교가 들어왔지만, 현장법사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대승이 더 많았다고 그의《대당서역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옛날에는 이곳을 우전국이라고도 했는데, 카슈미르에서 카라코룸 산맥을 넘어서 대승불교가 들어왔고, 당나라 때는 중국 절까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허텐(우전국) 출신 실차난타(Śikṣānanda 實叉難陀, 652–710)삼장이《화엄경》을 한역했는데, 이 경은 인도의 카슈미르와 이곳 허텐에서 성립했다는 설이 나올 정도로 한 때는 불교가 왕성했던 오아시스 타운이었지만, 지금은 이슬람 타운이 되어 있었다. 
 
▲ 허텐 시의 거리에서 음식을 팔고 있는 위구르족들     © 이치란

허텐은 중국에 화전옥(和田玉)으로 널리 알려진 곳인데, 지금도 옥이 많이 산출되는지 옥 가게가 매우 많았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허텐은 중국에 불교를 전파해준 가교역할을 한 곳이다. 앞에는 어머 어마한 타클라마칸 사막이 펼쳐져 있지만, 뒤에는 곤륜산맥이 길게 뻗어 있고,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풍부해서 농작물 재배에 어려움이 없다. 곤륜산에서 흘러내리는 강에서는 옥(玉)이 산출되어서 중국 등지에 반출한 것은 유명하다. 지금도 시안에 가면 화전옥(和田玉) 가게들이 즐비할 정도이다. 호탄연옥(軟玉)은 칼슘과 마그네슘이 풍부한 각섬석, 녹섬석이다. 허텐 근처의 강가에서는 옥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허텐 카슈가르의 시장에서는 옥이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었다. 호탄은 직물과 카펫 또한 유명하다. 
 
▲ 허텐 부근의 백옥강(白玉江)에서 사람들이 옥을 채취하고 있다.     © 매일종교신문
 
허텐은 고대시대에는 인근의 야르칸드나 카슈가르와 마찬가지로 이란계의 언어인 사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대개의 왕실 이름은 인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하는데, 인도의 카슈미르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7세기 현장(Xuanzang玄奘, 600–64)법사가 이곳을 찾았을 때, 100여개의 사원이 있었는데, 9-10세기에 이르면 4백 개의 사찰로 확장됐다고 하며, 한나라 이래 당나라 때까지 중국의 영향권에 놓였다고 한다. 이곳 허텐에서는 카슈미르의 라닥의 레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려있으며, 지금은 티베트 서쪽으로 통하는 길이 개척되어 있다. 허텐은 둔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허텐 귀족들은 둔황의 양반들과 혼사를 맺기도 하는 등, 둔황의 동굴사원의 큰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는 기록이다. 둔황석굴의 벽면에는 허텐의 왕실과 귀족들의 초상화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10세기에 이르면 그 수가 많이 증가했다는 연구이다. 10세기부터 허텐은 서쪽으로 밀려난 서요(西遼)와 투르크계의 나라들과 분쟁을 일으키면서 차츰 차츰 불교국가에서 이슬람 국가로 바뀌면서 무슬림으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 허텐에서 야르칸드와 카슈가르로 가는 사막 길에는 이런 소형 오토바이 택시들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막에는 조그마한 오아시스 마을들이 있어서 이런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나르고 있다. 모래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 이치란
▲ 이곳 사막에서 자란 석류와 복숭아.     © 매일종교신문
▲ 버스 의자 뒤에 붙어 있는 광고.     © 매일종교신문
중세의 분위기가 완연하고, 중국령 위구르 자치구이지만, 중국과는 문화가 전연 다른 이국적인 환경이었다. 사실, 중앙아시아인 우주베키스탄이나 키리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주요 도시들을 가보면 소련 냄새가 물씬 풍긴다. 중앙아시아란 중세적 분위기는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신장성은 달랐다.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와 습속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이를 놔두려고 하지 않는다. 중국식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얼마가지 않으면 중세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중국식으로 사회구조가 변화하지 않을까 한다.(계속)
(이치란 해동 세계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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