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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기행⑩사마르칸드와 부하라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6/04/04 [06:30]

실크로드기행⑩사마르칸드와 부하라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6/04/04 [06:30]
▲ 우주베키스탄의 고도 사마르칸드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가 한국에서 노동경험이 있다고 하며 다시 가고 싶다고 했다. (우측 필자 이치란 박사)     © 매일종교신문

불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마니교, 유대교, 경교 등 거쳐간 사마르칸드와
이슬람교의 센터역할 부하라

 
실크로드를 여행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느낀 것은 구소련의 잔재였다. 어디를 가나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신장성 카슈가르에서 국제버스를 타고 키리기스스탄의 오쉬로 가기 위해선 이르케쉬탐 고개를 넘어야 한다. 옛날 실크로드 시대에도 카슈가르에서 서역의 한혈마가 있다는 페르가나로 가기 위해선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전한 때, 무제의 명을 받고 서역 개척의 선봉에 섰던 장건도 이 고개를 넘어서 당시에는 강거라고 하는 이 지역에 가서 천리마인 한혈마의 존재를 알았다. 오쉬는 키리기스스탄의 제2의 도시이다. 수도는 비슈케크이지만, 카슈가르에서 오쉬로 가는 것은 우주베키스탄의 타슈켄트나 사마르칸드로 가기 위해선 오쉬로 들어가야 한다. 의외로 오쉬에서 국제선 항공노선이 잘 연결되고 항공료도 싸서 숙달된 국제여행객들은 오쉬를 경유지나 출발점으로 삼기도 한다.
 
중국 해관(海關)을 벗어나자 키리기스스탄의 영토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어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여권과 비자를 확인하면서도 오직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느냐는 것이 통상적인 질문이었다. 구소련의 잔재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는 키리기스탄에서의 경험이었는데, 이것은 우주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 중국 위구르족 자치구 신장성 카슈가르에서 키리기스스탄의 오쉬로 가는 국제버스.     © 매일종교신문
 
하지만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은 러시아어에서 서툰 영어로 바뀌고 있었다. 승객 대부분이 러시아어와는 상관없는 승객들이라서 그런지 할 수 없이 영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오쉬에서 하룻밤을 자고 페르가나를 거쳐서 타슈켄트로 들어갔다. 같은 투르크계 사람들이지만 중국 신장성의 위구르족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소련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이내 알 수 있었다. 몽골도 외몽골과 내몽골이 차이가 나듯이 이곳 중앙아시아도 이런 문화적 차이와 도시의 모습이 달랐다. 구소련의 영향이란 결국 유럽문화인데, 내가 동경했던 서역의 모습은 아니었다. 타슈켄트에서 하룻밤을 묵고 바로 사마르칸드로 향해 버렸다. 나의 여행 목적이 실크로드 기행이었기에, 현대화된 서역의 모습은 어딘지 나의 구미에 맞지가 않아서 사마르칸드로 향했는데, 나는 사마르칸드에서 희미하나마 서역을 볼 수 있었다.
 
▲ 사마르칸드의 레기스탄 광장 앞에선 필자.     © 매일종교신문

사마르칸드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도의 하나이다.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마라칸다로 알려졌고,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수·당시대에 걸쳐 강국(康國)이라고 불렀다. 1220년 칭기즈칸에 의해 패망되기까지 사마르칸드는 실크로드의 교역기지로 번영을 구가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32년 동방 원정을 하면서 사마르칸드를 점령했을 때, 그리스에서 듣고 상상했던 것 보다 더 화려했다고 할 정도로 눈부신 국제타운이었다. 현장법사도 사마르칸드를 경유해서 인도로 들어갈 정도로 사마르칸드는 실크로드 선상에서 이란계의 파르티아인들의 중요한 무역 중계 및 왕래 교차지점이었다. 신라의 혜초도 귀로에 사마르칸드에 들렸고, 그의《왕오천축국전》에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지역은 기원전에는 파르티아 제국(247BC-224CE)의 영역이었고, 한나라에서는 안식국(安息國)이라고 호칭했다. 중국에 불교를 전한 불교 전도승(傳道僧)들은 처음에 안식국과 쿠샨의 승려들이었는데, 대표적인 역경승은 안세고(安世高An Shigao 중국체류기간 148-180CE)와 로케세마((Lokaksema支婁迦讖 중국체류147CE-183CE)였다. 파르티아에 불교를 전해준 나라는 기원전부터 타림분지에서 활약했던 월지 출신의 쿠샨 왕조(105-250CE)였다.
 
성(姓)에 안(安)자가 붙은 것은 안식국 출신이란 의미인데, 안세고는 특히 소승불교의 전적(典籍)인 아비달마와 선경(禪經)에 정통하였다. 안세고는 148년에 뤄양(洛陽)에 들어와서《안반수의경(安般守義經)》을 비롯하여 34부 40권의 불교 경전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로카세마는 쿠샨제국의 간다라 출신으로서 지루가참의 지(支)는 월지를 뜻하는데, 주로 대승경전인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수릉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아축불국경 등 14부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사마르칸드 지역에는 불교가 널리 퍼져 있었고 ‘그레코 불교’라고 해서 헬레니즘과의 영향으로 대승불교 태동에 동기를 부여했다는 학설이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사마르칸드는 8세기 이슬람이 전해지면서 불교는 도전을 받게 되었다. 14세기에는 티무르 왕조의 수도가 되었고, 뒤에 우즈베크인의 도시가 되었지만, 1868년 러시아령이 되었다가 1925년부터 소련의 공화국이 되었으며 1990년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로카세마(지참)가 낙양에서 역경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 매일종교신문
 
사마르칸드는 소그드어로 ‘바위 도시’, 몽골어로는 ‘딱딱한 바위’를 의미한다. 이곳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실크로드 중간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중국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실크로드 무역의 중간 정거장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면서는 이슬람 연구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그 이전에는 이란의 종교인 조로아스터(배화교)의 센터이기도 했다. 사마르칸드는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이란계 민족이 오아시스 도시로 발전시켰다고 하며, 알렉산더 대왕의 공격에도 끝까지 저항한 곳이고, 한 때는 월지의 자손들이 왕으로 군림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마르칸드와 부하라는 한때,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전성기를 누렸으나 712년에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 장군에 의해 세워진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 연합군에 정복되어 이슬람화가 시작되었다. 8세기 전반 칼리프 정권 하에 들어가 이슬람화가 본격화하였으며, 9-10세기에는 이란계 이슬람 정권인 사만 왕조 하에서 번영하였다. 그 후 카라한 왕조, 카라키타이 왕국, 호라즘 샤 왕조 등의 지배하에 점차 투르크화(터키계)하였다. 하지만 사마르칸드나 부하라의 주민은 이란계인 타지키스탄과 같은 동 이란어를 사용한다. 물론 투르크계 주민도 있지만, 주민 대부분은 소그드인과 파르티아인들의 대를 잇고 있는 것이다.
 
사마르칸드에서 가장 볼만한 구경거리는 유명한 세 개의 마드라사(이슬람신학대학)가 있는 레기스탄 광장이다. 또한 티무르제국의 통치자, 아미르 티무르의 아내 이름을 따서 명명한 비비하눔 사원도 볼거리이다. 필자가 레기스탄 광장을 찾았을 때, 몇 명의 우주베키스탄인들이 나를 둘러싸면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한국에서 5년 이상 노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돈을 벌어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결혼도 했다고 하면서 코리안 드림을 이야기했다. 중국 신장성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친절을 이곳 사마르칸드에서 받았고, 고려인 3세들과의 만남에서는 한국어로 통역까지 해 줄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사마르칸드는 여러 종교들이 거쳐 갔다. 처음엔 불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마니교, 유대교, 경교 등이었다. 하지만 아랍의 공격으로 이슬람이 지배적인 종교가 되면서 다른 종교는 자연스럽게 소멸하고 말았다. 751년 탈라스 전투(당나라 고선지 장군)에서 포로로 잡혀온 두 명의 중국인에 의해서 제지공장이 만들어졌고, 이슬람 세계에 종이가 퍼지게 했으며, 유럽에 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이후 기록문화가 전성을 이루어서 현재에도 300만권의 책이 바그다드도서관, 테헤란국립고서도서관, 이집트도서관, 터키 이스탄불 슐레마니에 고도서관과 튀니지 내셔널 비블리오그라피에 등지에 분산되어 있다. 이런 기록문서에는 런던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쿠쉬나메》라는 페르시아의 서사시가 있는데, 이 서사시 내용이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의 공주의 결혼 내용이고, 처용설화와도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실크로드 선상의 중계 무역지점이었던 사마르칸드도 몽골의 침입에는 불가항력이었다.
 
칭기즈칸의 몽골군대는 1220년 사마르칸드를 공격했고, 주민들을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성채와 사원을 피난지로 삼았고, 3만 명의 젊은 청년들을 군대로 징집했으며, 3만 명의 숙련공들을 취했다고 한다. 차가다이 칸국의 8대 칸인 바락에 의해서 사마르칸드는 치명상을 입었고, 1370년까지 차가다이 칸국의 일부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페르시아의 사가였던 주베이니(1226–1283)의《세계정복자의 역사》에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르코 폴로도 그의 여행기에서 사마르칸드는 매우 크고 화려한 도시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몽골의 지배도 몽골(원) 제국의 붕괴와 함께 도전을 받게 되는데, 1365년에 반란이 일어나고, 1370년에는 티무르가 티무르 제국을 세우게 된다. 티무르의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이슬람과 몽골 지배를 받으면서 육상 실크로드 그 자체가 침체하면서 해상실크로드 시대가 전개되긴 하지만, 실크로드 전 노선이 없어진 것은 아니고 부분적으로는 소규모이지만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마르칸드나 부하라를 여행하면서 고대 실크로드의 유적이나 유물을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분위기는 옛 비단길 시대임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온통 이슬람 문화와 티무르의 존재만이 이런 실크로드의 고대 국제타운을 감싸버리고 있었다.
 
▲ 티무르제국의 영역.     © 매일종교신문

티무르(1336-1405)는 중앙아시아의 몽골·투르크계 군사 지도자로, 티무르 제국(1370–1507)의 창시자(재위1370-1405)이다. 티무르(별명:티무리 랑=절름발이 티무르)는 온갖 역경을 딛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서 티무르 제국을 세웠다. 티무르의 가문은 칭기즈칸 가문과 공통적인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티무르의 아버지 아미르 타라가이는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씨족사람들에게 존중받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티무르.     © 매일종교신문
▲ 소련의 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티무르의 두개골을 토대로 복원한 흉상.     © 매일종교신문
티무르는 칭기즈칸을 흠모하고 칭기즈칸처럼 세계제국의 꿈을 이상으로 삼았다, 티무르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승리를 계속해, 전리품을 휘하의 여러 부족에게 분배해 주어야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대외 원정을 계속 되풀이하였다. 1386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지까지 지배하에 되었다. 1398년 티무르는 인도 원정을 결심, 델리 술탄 왕조를 격파하고 점령했다. 1402년 중앙 아나톨리아에 진출한 티무르군은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여 오스만 제국의 확대를 저지했다. 이 원정을 통해 몽골 제국의 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곳이 티무르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가 티무르에게 명목상 복속하여 티무르의 지배영역은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1404년 말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격파하여 원나라의 옛 영지를 탈환한다는 목표를 갖고 중국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티무르는 원정 도중에 갑자기 병이 나서 1405년 2월 병사했다. 이런 역사적 이유로 사마르칸드는 완전히 티무르의 영광으로 도배될 정도였다. 비록 티무르는 중국도전에 실패했지만, 그의 손자 바부르는 인도 북쪽으로 남하하여 이슬람 왕국 무굴제국을 세워 300년간 인도에서 군림한다,
 
사마르칸드와 티무르에 대해서 소개하려면 끝이 없을 것 같다. 실크로드의 중심도시였고, 중세시대에는 이슬람교의 센터 역할을 하였고, 티무르가 맹활약했던 사마르칸드를 뒤로 하고 부하라로 향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그래도 사마르칸드와 부하라 등지에서 중세시대의 모습을 보고 어떤 역사적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사마르칸드와 부하라의 역사적 유적만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 부하라에 있는 이슬람신학대학 마드라사 앞에선 필자.     © 매일종교신문
 
사마르칸드에서 리서치를 끝내고 부하라로 향했다. 사마르칸드와 부하라는 비슷한 것 같지만, 부하라는 반사막 오아시스지대였다. 계속해서 서진하면 투르크메니스탄에 이르고 카스피 해에 다다른다. 남서진하면 이란 땅에 이르는데, 실크로드 시대에는 사마르칸드 부하라에서 테헤란 이라크 시리아에 이르렀고, 시리아에서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330-1453)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거쳐서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연결되었다.
 
실크로드의 전 노선에서 사마르칸드와 부하라는 중국의 장안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중간 지점의 의미를 갖고 있었고 중계무역 타운이었다. ‘부하라’라는 지명은 본래 산스크리트어의 ‘비하라(사원)’에서 유래했다. 실크로드 시대의 무역상등은 중국이나 지중해에서 이곳에 모여들어서 교역을 하고 나서 동서의 길로 가든지 아니면 인도로 남하하기 위한 교차로였다. 문화전달자들인 종교수행자들도 이런 방식으로 이동하면서 사마르칸드나 부하라에서 휴식을 취했다.
 
파르티아를 이어서 나타난 사산조 페르시아(224-651)는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330-1453)과 300년 전쟁을 하게 되고, 힘이 빠진 사산조는 아랍에게 무너지게 된다. 300년 전쟁기간 실크로드는 이란에서 이라크를 거쳐서 콘스탄티노플로 직행을 못하고 1번 루트가 마비되자, 아라비아로 우회하면서 아랍의 오아시스 메디나와 메카가 실크로드의 중심지가 되고, 메카에서 이미 루트가 개발되어 있던 홍해 해변을 따라서 다마스쿠스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서 로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물류와 사람이 물리면서 메카는 정보와 부가 흐르는 국제타운이 되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무함마드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계시 받고 등장, 페르시아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연유로 부하라는 이슬람교의 센터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한 때 이슬람신학대학인 마드라사가 250개나 있을 정도로 모든 이슬람권의 학생들이 이곳 부하라에 와서 공부하기도 했다.
 
마드라사는 모든 종류의 학교를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로서 이슬람교 신학학교 또는 대학을 특정지어 가리킨다. 신학에 대한 학문만 가르치는 것은 아니며, 현대적 과목들도 가리킨다. 인도 같은 곳의 경우, 마드라사의 모든 학생들이 무슬림인 것은 아니며, 마드라사라는 단어는 ‘배우기’라는 뜻을 가진 셈어 어원이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단어와 결합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마드라사라는 단어는 ‘배우거나 연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마드라사라는 아랍어에서 대학교나 대학원 같은 고등 교육기관을 의미하기도 한다. 근세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서는 마드라사가 초등교육기관과 ‘데니스멘스’라 불리는 학생들이 다니는 고등교육기관 모두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마드라사가 고등교육기관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아랍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고등교육기관을 지칭할 때는 ‘자미아’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히브리어에서 마드라사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는 단어인 미드라샤(midrasha)는 배우는 ‘장소를 의미’하지만, 마드라사와는 달리 반드시 종교적인 내용을 배우는 장소임을 내포하고 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마드라사는 종교 교육을 행하면서 작문, 문법, 통사론, 시문학, 정서법, 자연과학, 정치학, 생활예법을 교육하기도 했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이맘(이슬람지도자)이 되기 위해 마드라사에 입학하는 경우도 많았다. 울라마(이슬람 신학.법학자) 자격은 12년간의 교육을 받아야 취득할 수 있었으며, 수많은 하피즈(꾸란을 전부 암송한 이슬람교도)들은 마드라사 출신이기도하다.
 
이슬람 세계가 형성된 초기부터 마드라사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고 종교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와 같은 장소에서 여러 사람이 만나는 관습에서 마드라사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사람들이 이슬람지식에 정통한 무슬림을 찾아가 종교적 지식을 교육받으려 한 것이 학교로 발전했다고 한다. 파티마 왕조와 맘루크 왕조의 많은 지배계급이 와크프라고 알려진 기금의 형태로 많은 마드라사들을 설립하였다. 마드라사를 설립하는 일은 설립자의 계급적 위치를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를 그들 후손에게 세습할 좋은 방책이었던 것이다. 특히, 맘루크 왕조 시기에는 직접적인 노예의 상속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마드라사를 통한 재산과 노예 상속이 지배계급에서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드라사에서는 특히 신앙과 연관된 교과목에 더하여 여러 ‘과학’과목들도 교육하였는데, 수학, 천문학, 의학, 지리학, 지구과학, 철학, 마술, 오컬트(秘學) 등이 그러한 과목들이다. 여러 교과목은 질문을 통해 교육되었다. 아랍제국의 초창기에, 아랍어와 아랍 문학의 큰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고대 그리스 시대보다도 더 많은 문헌들이 이 시기에 저술되었다. 
 
▲ 인도 카르나타카 주 마이소르에서 가까운 스리랑파트나의 자미아 사원의 마드라사에서 이슬람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매일종교신문

이슬람에 대해서 문외한의 입장인 나에게는 이 지역의 문화와 습관이 조금 낯설었지만, 금방 적응이 되었고, 알라 신의 존재 유무를 떠나서 종교 간의 대화와 이해를 위해서도 타 종교의 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부하라에서 히바(Khiva)도 가보고 싶었지만, 일단 타슈켄트로 가서 키리기스스탄의 비슈케크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가야 하는 일정이서 부하라에서 기차 편으로 타슈켄트로 향했다.(계속)
(이치란 해동 세계 불교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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