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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노후…‘자유인’보다 일자리가 더 절실

양형모 | 기사입력 2018/07/19 [18:55]
'명퇴 김부장'의 재취업 분투기…100세 시대 고정수입 없어 걱정

불안한 노후…‘자유인’보다 일자리가 더 절실

'명퇴 김부장'의 재취업 분투기…100세 시대 고정수입 없어 걱정

양형모 | 입력 : 2018/07/19 [18:55]
#대형 시중은행의 부지점장으로 근무하다 4년전 퇴직한 J(58)씨는 퇴직 직후만 하더라도 해방감을 느꼈다. 심장을 쪼여 들게 하는 실적압박과 근무시간 외 각종 온라인 연수 같은 족쇄를 벗어던진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해방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들로 목돈이 빠져나가면서 퇴직 2년 후부터는 슬슬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생활비라도 벌지 않으면 얼마 안 가 퇴직금이 바닥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J씨는 나이제한이 없다는 공공기관 계약직 등에 수십 차례 지원했지만 경험과 연륜이 큰 무기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면접관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좌절에 빠진 J씨에게 LPG충전소의 충전원 일자리 제안이 왔다. 하루 8시간 일하고 18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 게 전부지만 그는 “매월 일정한 금액이 수중에 들어오는 것 자체에 큰 안도감을 느낀다”고 전했다.

#은행 퇴직 후 다른 은행 퇴직자들과 증권 투자에 나섰던 B(62)씨는 퇴직위로금으로 받은 몇억 원의 돈을 순식간에 날렸다. 생활비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여러 중소기업에 지원했지만 재취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절박해진 B씨는 4년 전부터 개인택시기사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택시회사에서 택시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번만 쉬면서 한달내내 12시간 꼬박 일한 뒤 B씨 손에 쥐어진 돈은 150만원 남짓된다.

퇴직 후 30~40년은 더 살아야 하는 100세 시대다. 명예퇴직 대상이 된 60년대생 베이비부머들이 재취업 시장에 몰려들고 있다. 취업에 실패한 자식과 고령 부모를 함께 부양해야 하는 ‘샌드위치 세대’들에게 50대 퇴직은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다. 국민연금공단이 최근 발표한 중고령자의 ‘적정 생활비’는 부부 기준 월 237만원. 향후 30년을 특별한 질병 없이 건강하게 산다고 해도 최소 8억5300만원이 필요하다. 자녀 결혼이나 질병 등으로 목돈이 들어가면 노후 필요자금은 이보다 더 많아야 한다. 수명은 늘어나는데, 재직기간은 오히려 단축되고, 생활물가까지 치솟으면서 노후에 대한 불안은 전 계층으로 확산하고 있다. 저소득층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고소득 화이트칼라로 대변되는 은행원들마저 노후에 대한 불안 등으로 재취업을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2의 직업‘ 찾는 은행원들…콧대 높던 금융맨…블루칼라도 부러웠다    

은행 직원 3명 중 1명은 퇴직 후 재취업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월29일 세계일보가 주요 시중은행 직원 11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6.1%는 퇴직 후 재취업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재취업을 고려하는 이유로는 생활비 마련(61.8%)이 가장 많았다. 자아실현(20.6%), 건강관리(5.9%), 인맥 네트워크 형성(3.9%)이란 답변이 그 뒤를 이었다. 은행원은 고소득 화이트칼라 직업의 전형으로 꼽히지만 직업 안정성은 높지 않다. 명예퇴직이 금융권의 관행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재취업에 대한 의지는 강했다. 경제적 이유와 함께 무료함이나 기존인맥의 상실로 인한 공허함 같은 정신적 이유도 은행원들의 재취업 의지를 높이는 요인인 것으로 조사됐다.    

◆은행 명퇴자들, 블루칼라 직종도 마다하지 않아금융권에 따르면 2017년 주요 시중은행 8곳에서 명예퇴직(명퇴)을 한 직원들은 총 5117명으로 2016년(2326명)의 2배가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올해는 시중은행의 명퇴 바람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이 문재인정부의 일자리 창출 기조에 따라 명퇴 대상을 늘려서라도 신입행원의 일자리를 늘리라고 금융권에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도 명퇴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은행 관계자는 전했다. 임금피크 대상이 되는 직원들은 근속기간에 따른 퇴직금에 더해, 3년 정도의 연봉을 위로금으로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노후 준비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퇴직금을 중간정산해서 자녀 결혼비용 등으로 써버린 경우가 많은 데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노후 필요 자금도 덩달아 늘어나기 때문이다.

재취업을 통해서 생활비에 충당하려는 은행 퇴직자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은행 퇴직자들이 선호하는 재취업 기관은 은행권 경력을 활용할 수 있는 주택금융공사, 서민금융진흥원과 같은 금융기관 등이지만 이곳에 재취업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재무관리나 자산컨설팅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사무직 재취업은 성공 사례가 극소수에 불과했다.

노사발전재단 금융센터의 최근 집계자료(2016년 말 기준)에 따르면 분석대상(노사발전재단, 취업상담인 2081명) 가운데 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전체의 15%가량(311명)이었다. 이들 중 경영회계 사무직으로 취직한 사람들이 30%, 금융보험 관련직이 23%로 절반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나머지는 경비 및 청소 관련직(12%), 영업 및 판매 관련직(7%), 생산단순직·운전·건설 등(28%)으로 다양하다.

도배나 목공, 미장 기술을 익혀 블루칼라로 제2의 인생을 열어가는 사례도 많았다. 시중은행에서 26년간 근무한 후 지난해 1월 명예퇴직을 한 신모(54)씨도 타일도배와 목공 기술을 익혀서 전직에 성공한 사례다. 평소 손재주가 좋았던 신씨는 취미를 살리며 지속적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서 만족감을 나타냈다. 김도영 KB경력컨설팅센터장은 “제2의 직업은 본인이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며 “과거의 직위, 명예, 무용담 등에 얽매여 직업 선택의 폭을 지나치게 줄여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재취업 준비하는 은행원, 10명중 1명꼴도 안돼

대다수 은행원이 재취업을 원하지만 정작 재취업 준비를 하는 직원들은 열에 한 명꼴도 되지 않았다. 세계일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제2의 직업을 갖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9.8%에 불과했다. 대개는 ‘보통이다’(25.9%), ‘그렇지 않다’(36.6%), ‘전혀 그렇지 않다’(27.7%)고 답변했다. 은행원들의 경우에는 퇴직금과 명퇴금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재취업 준비에 소홀할 수 있다는 게 경력 컨설턴트들의 분석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아둔 돈이 줄어드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 퇴직자들이 준비 없이 자영업에 뛰어들거나 고위험 금융투자에 나섰다가 파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실제로 세계일보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퇴직 후 재취업하고 싶은 분야’를 묻는 문항에 요식업·제빵·커피를 비롯해 자영업이라고 답한 경우가 금융업과 부동산 컨설팅 등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은행에서 10여년전 명퇴를 한 후 퇴직금을 쏟아 부어 식당을 개업했던 P(62)씨는 식당이 망하면서 지금은 택시를 몰고 있다. 백씨는 “은행원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시스템 속에서 일하면서 리스크를 방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살아온 사람들”이라며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의외의 변수들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는 것이 서투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본인이 숫자는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남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돌발과 예외가 속출하고 속임수가 판치는 사회에선 오히려 금융기관의 프로세스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제대로 적응하기 어렵다고 P씨는 조언했다. 백씨의 충고는 은행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 큰 직장에서 오랜 시간 근무해 온 화이트칼라 직장인들도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세계일보의 조사에서는 ‘퇴직 후 원하는 분야로의 재취업은 용이하다고 보느냐’는 문항에 29.5%가 ‘그렇지 않다’, 14.3%가 ‘매우 그렇지 않다’고 부정적으로 답변했다. 긍정적으로 답한 비율은 16.1%에 불과했다. 명퇴하면 떠올리는 단어로는 절망, 파산, 불안감이 많았다.    
 
성공적 재취업 전문가 조언 "사무직 집착 내려놓고 ‘평생기술’ 익혀두면 좋아"

“재취업에 성공하기 위해선 ‘화이트칼라 사무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이 정말 원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거나 평생기술을 익히는 게 중요합니다.”김도영 KB경력컨설팅센터장은 재취업을 성공시키는 첫 번째 마음가짐으로 ‘내려놓음’을 꼽았다. 제1의 인생이 남들보다 앞서 달리며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얻고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제2의 인생은 다른 차원의 삶이라는 것이다. 목표가 정해지면 퇴직 전에 관련 자격증을 따고 네트워크를 만들어 놓는 것도 중요하다.2017년 1월 퇴직한 L(55)씨는 3개월 만에 본인이 원하던 아파트관리소장으로 전직할 수 있었다. 그는 주택관리사, 조경, 시설물 안전점검 자격증 등을 미리 따 놓은 후 그 아파트의 입주자 대표를 맡았다.        
▲ 지난 3월 서울 마포구 서울50플러스재단에서 전(前) 금융인을 비롯한 퇴직자들이 서로 아이디어를 나누는 토의시간을 갖고 있다. /서울50플러스재단 제공

김 센터장은 막연한 불안감으로 초조해하기보다는 자신이 각종 연금(국민연금, 개인연금, 주택연금 등)으로 받을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런 다음 노후 적정생활비에서 부족한 부분만큼을 벌겠다는 자세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비수준을 수입에 맞춰 합리화하는 일도 돈을 버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국가가 제공하는 ‘재난적 의료비 지원제도’ 등 노후보장정책 등을 잘 활용하면 적시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서울시 50플러스재단 관계자는 “퇴직하는 순간 사회적 인간관계가 급격히 단절되는 경우가 많고 네트워크에서 완전히 고립돼 우울해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건강유지, 여가생활 및 인맥 네트워크 차원에서도 제2의 직업을 빨리 찾고 적응하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울시 50플러스재단은 사회공공서비스(학교, 복지취약계층 대상) 등을 제공하고 소정의 수고비를 제공하는 ‘보람 일자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2017년 명예퇴직을 한 C(55)씨는 “보람일자리는 일종의 가교형 일자리라고 보면 된다”며 “보람일자리 활동을 통해 각종 사회적기업으로 스카우트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나 역시 사회적기업에서 재무회계 상담 등을 하며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재취업을 원하는 금융권 종사자들은 노사발전재단 금융센터에서 자기소개서 작성법은 물론 전문적인 재취업 상담과 전문적인 교육 등을 받을 수 있다.
양형모(경영학 박사·애원복지재단이사 ·본지 고문·hm18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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