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⑤ 아소카 대왕 불탑과 사원 건설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01/31 [08:31]
8만 4천개의 사리탑을 세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비폭력 아힘사 운동 전개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⑤ 아소카 대왕 불탑과 사원 건설

8만 4천개의 사리탑을 세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비폭력 아힘사 운동 전개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01/31 [08:31]

84천개의 사리탑을 세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비폭력 아힘사 운동 전개

 

부처님은 45년간 자신의 깨달음을 펴고 나이 80세에 이르러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 당시 인도는 16개의 강대국이 세력 균형을 이루면서 인도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16 강대국 중에서도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을 왕래하면서 전법(傳法)을 펼쳤다. 인도 역사에서 16대국을 마하자나파다스라고 하는데, ‘마하는 크다는 의미이고, ‘자나파다스사람들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나라가 된다. 기원전 16세기부터 아소카 대왕이 통일할 때까지의 기원전 4세기동안 12백여 년을 인도 아 대륙을 분점 하면서 각축을 벌인 역사를 말한다.

▲ 아소카 대왕이 세운 마하보디(大覺) 사원.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룬 금강보좌(金剛寶座).   

 

16대국 가운데서도 코살라와 마가다가 막상막하의 라이벌로서 쌍벽을 이루면서 인도 아 대륙의 천하통일을 꿈꾸면서 정복 전쟁을 일삼았다. 부처님은 바로 이런 시대를 살다가 열반에 들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가다와 코살라를 오가면서 전법 활동을 펼치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 삶을 전개해 나갔다. 부처님 당시에는 인도 대륙에서는 집을 떠나 자신을 바로 보고자하는 구도적 열망이 넘쳐흐르던 시대였다. 이것은 아마도 전쟁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 비참함에 대한 염세적 허무주의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삶의 의미가 그 어때 보다도 더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부처님은 코살라와 마가다를 왕래하면서 왕과 거부 장자들인 패자(覇者)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깨달음을 일체 중생들에게 베푸는 성자의 삶을 살았다. 불경(佛經)의 기록에 따르면 마가다 보다는 코살라 쪽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처님은 전쟁을 극도로 싫어했고, 자비와 평화를 사랑했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은 지혜와 자비이다. 지혜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앎이며 자비는 실천적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불교의 생명은 바로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롭게 실천에 옮기느냐에 있다.

 

부처님은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하여 지혜를 가졌지만, 자비를 실천하느냐에 대해서는 무척 고민을 많이 했다. 진리의 궁극적 깨달음을 체득했으며 구도적 열망의 목적은 달성했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지만, 이런 진리의 내용을 베풀음에는 자비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뱀을 장난감으로 생각하여 만지듯이 자비실천에는 어떤 조건이나 계산이 전제되면 안 되는 것이다. 자비실천의 길은 엄청나게 험난한 길이기도 하다. 어쩌면 깨달음은 쉬울지 몰라도 자비실천은 더 어려운 수행과정일 수도 있다. 평화운동을 하는 것도 자비구현의 한 방편이다.

 

지혜와 자비를 갖춘 성자에게 제자들은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제자들에게도 차별하지 않고 똑 같이 대했다. 16강대국이 여기저기 진을 치고 있었지만, 부처님은 전쟁을 독려하지 않았다. 모든 나라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세속의 삶과 사람들은 욕망과 권력투쟁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부처님은 자비를 강조했고, 지혜를 설파해서 사람들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담마(Dhamma,)를 입이 아프도록 열변을 토하셨던 것이다.

▲ 부처님 당시의 인도 아 대륙의 16 강대국 지도. 부처님은 주로 코살라와 마가다국을 오가면서 진리를 설파하셨다.  

 

이제 다시 아소카 대왕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인도 아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 한숨을 돌린 아소카 대왕은 지나간 처절했던 전쟁의 참화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만 명이 죽고 15만 명의 포로를 노예로 삼았던 전쟁의 결과는 전쟁 영웅에게는 정신적 참회와 감당할 수 없는 억누름으로 다가왔다.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탈출구가 없었지 않을까.

 

아소카 대왕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압박해오는 공포를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찾았다. 부처님의 자비정신은 바로 비폭력(아힘사)이었다. 자신은 폭력을 너무 행사한 바람에 10만 명이 죽고 15만 명이 노예가 되어 고통 받는 것에 진정으로 참회하면서 부처님의 자비정신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이러던 차에 친 조카가 출가하여 비구가 되어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또 얼마 후에는 어머니가 다른 형제 중에 한 명이 비구로서 승가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음을 인지하게 됐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방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 일이었고, 동시에 자신의 참회문을 표출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탑을 세우는 일이었다. 부처님은 열반(죽음)에 들면서 수많은 사리를 남겼는데, 당시 강대국가인 8명의 왕들이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분배해서 각자 자신들의 국토에 사리탑을 세워서 봉안했었다. 아소카 대왕은 인도 아 대륙을 천하 통일했기 때문에 8곳 중 7곳의 사리탑을 해체 한 후, 모든 사리를 한데 모아서 분골(粉骨)하여 84천개의 사리탑(사원 포함)을 인도 전역에 건립해서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런 기록은 마하왕서 大史아소카와다나, 阿育王傳에서 자세하게 참고할 수 있다. 아소카와다나의 기록에서는 84천개의 탑을 세웠는데, 이 사리들은 금, , 묘안석(금록석), 수정으로 만든 상자에 보관했다고 한다. 스리랑카에서 편찬한 마하왕서에 따르면 이 활동은 재위 5~7년 동안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아소카 대왕은 왕위에 오르면서 초기에 불탑과 사원을 세워서 모든 백성이 부처님의 아힘사 즉 자비사상을 실천하고 따르도록 했다.

▲ 스리랑카의 한 사원에서 인도 아소카 대왕의 절에 세웠던 스투파(불 사리탑)를 상상하여 건립한 탑으로 비구들과 불자들이 의식을 집전하고 있다.  

 

아소카와다나의 기록에 의하면 84천개의 사리탑을 인구 10만 명이 사는 여러 도시에 세우도록 했으며, 똑 같은 날에 완성하도록 당대의 가장 큰 스님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아소카 대왕은 스스로가 아소카라마 비하라(사원)를 직접 건립해서 예불을 드릴 정도로 불심이 지극했다. 84천이라는 숫자는 명백한 과장이며 많은 탑들이 후기에 세워진 사리탑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오래된 사리탑 대부분은 아소카 대왕에 의해서 건설된 것으로 묘사된 측면이 있다 할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많은 사찰이 통일신라시대 원효 대사 창건으로 되어 있듯이 말이다.

 

불탑은 부처님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붓다 입멸 후 초기에는 진흙으로 지어졌으나, 아소카 대왕 시기에 벽돌로 다시 재건축되었다. 아소카 왕대에 지어진 가장 유명한 불탑은 마디아 프라데시 주의 산치 대탑이다. 산치 대탑이 세워진 곳에서 아소카 대왕의 부인 데비가 태어났다고 한다.

 

마우리아 시대의 예술은 왕조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이상을 실현하는 정책과 연결되어 발전했다. 대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예술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이 같은 연유에서이다. 아소카 석주는 세계의 중심축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며 석주의 형태와 규모는 대개 유사하다. 마우리아 건축 예술은 그리스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아소카 석주는 다양한 인도 종교를 배경으로 하지만, 아소카 석주의 중심사상은 붓다의 담마(가르침)이며, 동물은 주로 사자가 조각되어 있다. 사자는 즉 석가모니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법문을 사자후로 표현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