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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⑥ 경전 결집을 통한 승가통일과 청정성 확립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02/07 [08:34]
부처님 가르침의 체계화와 가짜 승려 추방 비문에 새겨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⑥ 경전 결집을 통한 승가통일과 청정성 확립

부처님 가르침의 체계화와 가짜 승려 추방 비문에 새겨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02/07 [08:34]

부처님 가르침의 체계화와 가짜 승려 추방 비문에 새겨

 

오늘날의 불교 현황은 전 세계에 두루 전파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1세기전만해도 불교는 아시아의 종교였을 뿐인데, 지금은 글로벌한 종교로서 지구촌 구석구석에 퍼지지 않는 곳이 없다. 기독교에 비하면 확장성이 좀 떨어지겠지만, 불교역사상 아시아권에 머물러 있던 불교가 유럽과 아메리카대륙에 전파된 것을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의 경우, 선교 역사가 매우 이른 시기에 시작됐고, 국가적인 정책으로서 지원을 받았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반세기전만해도 한국은 불교의 교세가 기독교보다도 훨씬 앞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불교의 교세가 열세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 아소카 대왕이 자신의 딸인 상가미트라 비구니가 스리랑카로 불법을 전파하러 갈 때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우를 증정하면서 배웅하는 하는 모습.    

  

한국 기독교는 미국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선교 대국이 되었다. 동남아시아의 불교국가 오지에 가면 한국 기독교 선교사의 통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아시아의 불교 국가에 가서 기독교 선교사와 마주치는 일은 이제 일상다반사가 되었고, 한국의 주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닌가할 정도로 개신교의 위력은 대단하다. 국내에서도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개신교의 확산은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불교계에서는 대체로 이런 시기가 올 것이라고 예측하는 선각자들이 있었지만, 불교 종단을 이끌어가는 종무행정에 참여하지 못한 관계로 이런 예견이 정책에 반영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결과가 초래됐다.

 

이러다가는 불교 교세가 정말 위축되어서 소수 종교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는 불교계 인사들이 많다는 것을 지적해 두고 싶다. 획기적인 개혁과 변화가 있지 않으면 불교계에 큰 위기가 닥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란 주제로 인도에서 불교가 확산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데, 한국불교의 현실을 생각하면 정말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수 없다.

 

아소카란 위대한 불교도 왕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불자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인연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된다. 불교사상이 아무리 뛰어나고 불교가 고등종교라고 할지라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불교의 전파를 위한 아소카 대왕의 전도승 파견은 불교역사의 획기적인 프로젝트였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어서 혼자만이 간직한 깨달음이 되고 말았다면 이것은 무의미한 깨달음이 되고 말았겠지만, 싯다르타 고오타마는 사르나트(녹야원)에서 깨달음을 사회화하고 중생에게 회향하는 전도(傳道)의 큰 용단을 내렸기에 불교 역사는 시작되었다.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은 불교역사의 시작이면서 불교가 존재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사건이 바로 아소카 대왕의 전도승려 파견이다.

▲ 칼을 든 아소카 대왕, 인도 아 대륙을 통일한 후 참회의 마음으로 칼을 버리고 부처님의 담마(法)를 펴기 위해서 여러 지역에 전도승을 파견했다.  

  

이제 아소카 대왕의 3차 불교 경전 결집 후원 이야기를 해보자. 인도불교 역사를 고구(考究)하기 위해서는 아소카 대왕이 세운 비문들이 1차 자료가 된다. 아소카 대왕은 칙령을 석주나 바위에 새겨서 인도 전역에 세워서 백성들이 알게 했다. 문서상의 자료적 근거는 인도 밖의 스리랑카나 중국 티베트 불교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인도 초기 불교는 스리랑카에서 대승불교는 중국에서 후기 대승 밀교는 티베트 불교전통에서 찾아야 한다. 게다가 인도불교 역사는 12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침입한 이슬람 병사들에 의해서 초토화가 되고 말았다. 당대 최고의 불교대학이었던 날란다사원 불교대학 도서관이 6개월간 화염에 휩싸였을 정도로 많은 도서와 귀중품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인도 아 대륙은 이후 8백년간 불교가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인도 초기불교전통은 스리랑카에서 대승불교는 중국에서 후기 대승 밀교는 티베트 불교 전통과 기록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아소카 대왕과 3차 경전결집(經典結集)의 기록도 바위에 새긴 칙령과 스리랑카의 사서인 마하왕서(大史)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초기불교 교리나 승단의 역사 등을 밝혀내는 데는 스리랑카의 사서(史書)와 빨리어 삼장(三藏)을 참조하여 재구성해야 인도불교사가 보이게 된다.

 

스리랑카 전승에 의하면, 아소카 대왕은 칼을 버리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에 귀의한 후에 승가에 엄청난 국가적인 프로젝트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소카 대왕은 출가 비구(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을 아주 영광으로 생각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죽음)한지 2백여 년이 지날 즈음 불교 승단은 수만 명의 비구들로 증가했다. 물론 아소카 대왕 당시에는 불교 승려만이 아닌 힌두교 자이나교 아지비카교 등의 승려들이 많았다. 이 시대에는 가정을 떠나서 출가하여 무소유의 삶을 사는 많은 유행승(遊行僧)들이 넘쳐나는 시기였다.

 

아소카 대왕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후원을 아끼지 않는 선심을 베풀었는데, 한꺼번에 수 만 명이나 되는 출가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비구들이 보아하니 불교도가 아닌 외도(外道)의 출가승들도 이런 공양(반승) 행사에 무차별적으로 참가해서 공양을 받고 불교비구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공양만 받고 수행이나 전법은 하지 않고 무위도식의 가짜 승려들로서 밥만 축내는 것이었다. 또한 가장 문제점은 제2차 경전 결집 때부터 논란이 되어 왔던 계율(戒律) 준수문제가 100년이 흐른 당대에는 승가에 기강이 해이해 져서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아소카 대왕이야 승가의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없었겠지만 신뢰가 가는 고승의 자문을 들어보니, 경전결집을 다시 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음을 인지하게 됐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인 정법(正法)이 너무 왜곡되어서 잘못 전파되고 있었고, 비구를 가장한 가짜 승려들이 너무 많아서 추려내지 않는다면 승가에 엄청난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는 건의를 받아들여서 부처님의 정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 아소카 대왕 시대의 승가의 최고 고승인 목갈리뿌따 띠사가 지은 《까따와뚜(論事)》.   

 

아소카 대왕은 당대의 고승인 목갈리뿌따 띠싸(기원전 327247) 왕사(王師)에게 모든 것을 위임했다. 수만 명의 비구 가운데 절반이 넘는 비구들이 이단(異端)으로 전락해 있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승단이 존립하느냐 소멸하느냐의 기로에 설 정도로 심각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정법(正法)을 다시 체계화하는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이다. 2차 경전결집이 100년 전에 있었지만, 백년이 경과한 다음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많이 변질되고 승단이 비정통으로 타락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목갈리뿌따 띠싸 왕사는 까따와뚜(Kathāvatthu 論事)를 저작하여 불교승단의 정통 텍스트로 삼도록 한 것이다. 아소카 대왕도 승가의 통일과 청정성에 동의하여 경전결집 프로젝트에 적극 후원하여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힘을 실어 주었다.

 

목갈리뿌따 띠싸 왕사는 분별설부(Vibhajjavāda 分別說部)를 세운 고승이다. 분별설부는 상좌부의 오리지널 부파라고 할 수 있으며 대중부, 독자부, 설일체유부와 함께 초기 불교 승단의 최대 4대분파라 할 수 있다. 분별설부는 상좌부 적통의 계보를 계속해서 이어가면서 2천년 이상 남방 상좌부의 지남(指南)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소카 작은 바위 칙령 3’에 의하면, 아소카 대왕은 승가의 구성원들인 비구()들에게 텍스트(까따와뚜)를 공부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또한 산치, 사르나트와 코삼비의 비문에서 승가의 반체제 구성원인 가짜 비구들이 추방되어야 한다고 명령하고 승가가 단결하고 번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

 

이로 미루어 추정해 본다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든 다음 2백여 년이 흐른 시점에서는 인도 아 대륙 곳곳에 부처님의 정법이 왜곡되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 다수의 가짜 비구들이 횡행하고 있었음을 상정할 수 있다. 경전결집은 바로 승가의 청정성 회복과 통일을 위한 불교정화운동이었고, 부처님 정법회복 운동이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정법을 체계화한 다음에 인도 아 대륙과 헬레니즘 국가(박트리아), 실론, 수반나부미(하버마와 태국남부)에 부처님의 정법을 전파하는 불교 전도단을 파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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