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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시론/‘和而不同’과 ‘相生’ (강명구)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3/15 [16:25]

종교시론/‘和而不同’과 ‘相生’ (강명구)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3/15 [16:25]

종교시론/강명구 종교청년협의회 사무총장


‘和而不同’과 ‘相生’


내가 요즘 즐겨 인용하는 영어 표현이 있다. ‘동의(同議)하지 않는 데 동의한다(agree to disagee)’이다. 궤변(詭辯)일 수밖에 없는 이 표현이 점점 내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상대편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지만 서로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세계종교신문의 블로그 소개에 나오는 ‘화이부동’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세종시, 4대강 등의 문제를 놓고 각자의 입장을 고수하며 외면하는가 하면 끝간 데 없이 막말비난까지 치닫는 정치계에서 벌이는 다툼을 볼 때 더욱 절실히 느껴지는 말이다. 극단적 편가르기로 세종시, 4대강을 세트로 묶어 투쟁을 벌이는 상황이 국민들을 불안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지난 번 칼럼(12호)에서 거론했듯이 ‘생각의 다름= 불의(不義)’라고 치부한다. 상대를 상종(相從)하지 못할 나쁜 편으로 몰지 말고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것에 동의하면 협상과 타협을 이룰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평행선을 달려 합일점을 찾지 못하거나 격한 충돌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다. 어느 누가 세상을 망하게 하려고 정치를 하겠는가. 동의한다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첫걸음이다.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면 논쟁은 하되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 관용(寬容)이 필요하다.

윗물이 맑지 못하면 아랫물도 흐려지기 마련이다. 정치지도자들이 이 모양이니 우리네 국민생활도 극단적 배타심이 도사려 있다.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것이다. 일례가 이혼율에서 드러난다. 정치문화가 저질이듯이 OECD국가 중 이혼율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다. 부부가 극렬하게 충동하거나 상종하지 않는 평행선을 그릴 때 이혼하게 된다. 성별, 성장환경, 가치관이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어떻게 갈라설 수 있겠는가. ‘서로 다름에 동의(agree to differ)’한 다음에도 갈등이 풀리지 않는다면 ‘동의하지 않음에 동의’하면 된다. 

종교계에서도 이런 혼탁한 정치다툼, 이혼실태를 보게 된다. 내 종교가 아니면, 그리고 내방식의 신앙관이 아니면 미신(迷信)이고 그릇된 신앙형태라고 매도하는 모습이 꼭 세속(世俗)의 정치와 부부생활을 닮았다.

나 역시 관용의 정신이 부족해 그런 행태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반성하고 있다. 근래 나는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었다. 대형교회들이 공동체를 통한 나눔과 봉사의 정신을 키우기보다는 교세확장에 열을 올린다고 보았다. 최일도 목사의 말처럼 “1만명 모이는 교회 1개보다는 1천명 모이는 교회 10개가 건강하다. 그러나 현 풍토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가 아니라 ‘큰 것이 성공이다(Big is success)’가 됐다”는 주장에는 크게 공감했다. 그리고 지금도 내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기 위해서는 인프라에 투자하고, 그 인프라를 바탕으로 축적된 힘을 발휘해 사회와 가난한 자, 선교와 다음 세대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옥한음 목사)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신축중지, 예배 수 고정 선언, 교인 수 제한, 교인 수평이동 포기, 영상예배 포기 선언, 교회당 확장 금지, 원거리 차량운행 금지’를 바란다. 그들은 서로 자신의 주장을 평행선으로 펼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감히 동의하지 않음에 동의하고자 한다. 세상에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하길 원하지 않는 성직자가 있겠는가.

이겼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결국 둘 다 상처가 된다. 여러 종교들이 모여 자선과 봉사활동, 환경운동을 펼치는 기사가 지난 호 세계종교신문에 1면에 실렸다. 그렇다고 그들이 타종교를 믿거나 그들의 신앙에 동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화이부동’, ‘agree to disagree'의 정신으로 서로 상생하는 길을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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