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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과 희열, 명상의 방법

정영부 | 기사입력 2023/10/26 [09:26]

명상과 희열, 명상의 방법

정영부 | 입력 : 2023/10/26 [09:26]

 

▲ 140여 회에 걸쳐 연재 중인 「영혼학 그 표준이론」이 ‘지식과감성 출판사’에서 최근 출판되었습니다. 독자 제위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 CRS NEWS

 

명상과 희열

 

삼매지경에 빠져 몇 날 며칠을 보내는 선승(禪僧)들이나 인도의 성자들이 의지력이 강해서 그런 인내력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꿀벌이 꿀맛을 보고 거기에서 나오기 싫은 것뿐이다.1)보통 사람들은 명상에 맛들이지 못하여 지겨움만 느끼고 곧 그만둔다. 그리고 면벽하여 수도하는 명상가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명상은 마치 과일이 왕이라는 두리안과 같다. 한번 맛들이면 왕 같은 과일이 되지만 맛들이기 어렵고 영영 그 맛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이는 기도에 맛들여도 마찬가지다. 성당이나 절에 다니는 할머니들이 자식들과 이웃을 위하여 하루 종일 기도를 바치는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보통 이를 성령의 은혜로 아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도가 좋아서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톨릭이나 불교뿐 아니라 어느 종교의 기도도 마찬가지다. 명상처럼 기도 또한 희열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에 집중하여 다른 마음은 비우는 일이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혼을 자아의 방에서 비우고 영으로 채우는 일21)은 희열이다. 부처님께서도 오욕(五慾)의 만족에서 얻는 즐거움은 선정(禪定)의 즐거움과 애당초 비길 수도 없다고 하셨다.

 

선방(禪房)에서는 안거(安居) 중 기간을 정해 더욱 열성을 내어 선에 임하는 것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 한다. 예를 들어 24시간 잠을 자지 않고 일주일을 참선하는 식이다. 단식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이 정도면 목숨을 거는 참선이니 절대로 따분할 겨를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 의욕과 극기의 의지만 있고 희열이 없다면 목숨을 걸 값어치가 없다.31)명상에도 선에도 기도에도 희열이 없다면 참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선정(四禪定)4)이나 단전호흡, 차크라 같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도, 오히려 누워서, 편히 앉아서, 배부르고 따뜻한 상태에서, 길 가다가 잠시 잠깐 희열을 느끼는 명상에 빠질 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값어치 있다. 그러다가 명상에 맛들여서 가부좌로 몇 시간씩 명상에 빠지거나 이윽고 무문관(無門關)의 폐관정진(閉關精進)이나 신행결사(信行結社)에 이르는 것이 명상의 왕도(王道)이고 참선의 왕도이고 선도(仙道)의 왕도다.

 

▲ 천국의 맛과 지옥의 냄새를 모두 가지고 있는 과일이라는 두리안. 냄새만 맡으면 먹을 수 없을 것 같지만 달콤한 맛은 한번 맛들이면 왕 같은 과일이 되며 영영 그 맛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명상과 기도 또한 맛보기 힘든 희열의 경험이다.

 

명상의 방법

 

명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수행법이나 인도에서 특히 그 기법(技法)이 많이 발달하였고 오늘날 대부분의 명상방법이 인도 명상의 영향을 받았다. 명상의 대표 격인 참선, 요가5), 사념처(四念處), 초월명상 등이 모두 인도에 기원을 둔 명상법이다. 이와는 별도로 우리 고유의 단전호흡과 같은 호흡 명상법과 중국에서 기원한 태극권과 같은 동적 명상법 등도 있다.

자아의 방을 점거하고 날뛰는 혼()을 정숙(靜肅)시키는 기법(技法)’으로서의 명상을 불교에서는 ()와 관()의 수행법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지법(止法, samatha)

 

()’는 특정한 하나의 대상에 의식을 집중(concentration, meditation)하는 훈련이다. 만트라(mantra, 眞言)를 계속 외면서 집중하거나 화두(話頭) 또는 호흡에 의식을 모으는 명상을 말한다. 관법(觀法)에 비하여 높은 주파수(α8~13Hz)의 뇌파가 발생한다. 표준이론으로 볼 때 이는 혼이 주도하는 명상법으로 혼법(魂法)이다. 혼이 스스로의 생각을 하나로 줄이는 명상법이기 때문이다.

 

1) 간화선(看話禪)은 세속의 논리로는 푸는 것이 불가능한 화두6)를 이용하는 명상법으로 12세기 중국 남송의 선승인 대혜종고(大慧宗杲)가 제창하였다. ()은 보는 것을, ()는 화두를 의미한다.7)혼법(魂法)에 속하기는 하나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화두를 참구하고 마침내 이를 타파함으로써 끝내는 마지막 생각마저 없애고 본래의 성품자리인 자성(自性) 또는 본래부처를 견성(見性)하는 방법이다. 또 간화선에서는 중생이 참선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의 자리에서 자기를 보라고 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관법 즉 영안을 발동시켜 영이 혼을 관()하는 명상법이 되니 간화선은 영법(靈法)의 면모를 갖는다.

 

2) 수식관(數息觀)은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는 명상법으로 부처님도 하시던 명상법이다. 호흡의 수를 센다8)하여 수식관이지만 만트라를 읊조릴 수도 있고 이름을 욀 수도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주의가 다른 곳으로 흩어지면 안 된다.

 

3)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 집중명상)은 특정 단어나 만트라를 읊조리는 명상법으로 힌두에서 기원하였다. 1960년대 인도의 마하리시 요기(Maharishi Yogi)가 서양 사람들 취향에 맞게 변형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2. 관법(觀法, vipassanā)

 

()’은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판단하지 않고 고요히 살펴보는 명상법이다. 현재 순간의 마음을 챙긴다는 뜻으로 염처(念處, 四念處)9), 정념(正念), 위빠사나(vipassana)10)등으로 표현한다. 지법(止法)보다 낮은 주파수(θ4~8Hz)의 뇌파를 보인다.

표준이론으로 볼 때 의 주체는 영이요 객체는 혼이다. 영이 혼을 관()하여 이를 더욱 깊은 평정상태(upekkhā)에 들게 하는 영법(靈法) 명상이다. 영이 혼을 관찰하면 우선 혼의 관찰자효과가 나타나 혼은 평정상태에 들게 되고, 그 평정상태가 반복되어 평정이 혼에 스미면 그 혼은 청정무구하게 된다. 바로 혼의 청정효과. 이로써 혼(아뢰야식)은 정신체가 맑아지고 양심체는 크게 자라 이윽고 청정식(아말라식)으로 변화한다.

관법(영법)은 보통 통찰명상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표준이론의 깨어있기는 통찰명상의 평정상태(upekkhā)와 관찰(Sampajañña) 그리고 알아차림(Sati)’의 일상화다. 혼은 관찰당하면 행동이 바뀐다. 성숙해지고 조용해진다. 이윽고 습관이 되면 관찰 없이도 행동이 바뀐다. 그것이 자아수준의 발전이다.11)

 

한편 선종에서 간화선(看話禪)이 지법이라면 묵조선(黙照禪)은 관법에 속한다.12)묵조선은 면벽(面壁)하여 묵묵히 말을 잊고 본성(本性)을 찾아 관찰함으로써 밝은 본성이 깨어나 자아를 장악하게 하는 정좌간심(靜坐看心)의 명상법이다. 선수후오(先修後悟)의 정신으로 갑작스런 대오(大悟)를 바라지 않고 마음을 비워 자기 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청정한 자성을 찾아 거기에 머무는 선법이다.

 

명상의 방법이 하도 분분하여 불설을 빌어 정리하여 보았으나 명상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그 구분은 별 의미 없다. 불교에서도 지와 관을 구분하기는 하나 그 구분이 모호하다. 간화선도 그러하나 수식관 역시 지법이지만 사념처(四念處) 명상으로 사용되어 관법에서도 중요한 수행법이다.13)수식관은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모두 포함되는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명상의 방법과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이 도움은 될 것이나 전부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명상은 깨어있기이고 깨어있기는 명상의 일상화다. 이는 사상마련(事上磨鍊)과 면벽(面壁)의 관계다.

<註釋>

 

1) 명상과 희열

 

1. 불교에서 번뇌를 끊고 불법의 공덕을 발생시키는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禪定)에는 여러 단계가 있는데 우선 색계에는 다음의 네 가지 선정이 있다.

1) 사색과 사려가 있으나 욕심의 세계를 떠나는 데서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이생희락정(離生喜樂定)의 초선정.

2) 마음이 더욱 고요하고 단일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기쁨과 행복으로 마음이 흠뻑 젖는 정생희락정(靜生喜樂定)의 제2선정.

3) 다양한 희락을 버림으로써 묘한 행복(一想)이 생기게 되며 이러한 묘한 행복에 의식이 머무는 이희묘락정(離喜妙樂定)의 제3선정.

4) 즐거움과 괴로움이 소멸되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마음이 평온하여 생각이 청정한 사념청정정(捨念淸淨定)의 제4선정.

그런데 색계와 무색계는 아직 此岸의 세계로 사바의 나라인데도 색계 선정의 경지가 이미 표준이론의 천국인 靈界 수준이다. 불교에서는 인간도에서도 의 수행을 통해 색계와 무색계의 禪定을 추구할 수 있으니 천계의 법열(法悅)을 추구함으로서 다음 생에는 해당 계에 환생할 수 있다고 한다.

 

2. 가톨릭에는 명상의 일종으로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 있다. 관상이란 신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일로서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의 체험이다. 그 체험을 가톨릭에서는 지복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 visio beatifica)의 체험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느님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 직접 뵙는 천국의 행복을 의미한다. 명상을 통해 하느님을 직접 만나면 지극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에서 관상은 모든 신자에게 열려 있다. 소위 관상의 보편성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본성에 참여하여 친밀한 친교를 누리도록 부르시고 있다. 그 친교의 온전한 형태는 천국에서 지복직관을 통하여 이루어지나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직관능력의 씨앗을 받게 된다. 따라서 천국에 가기 전에도 우리는 관상기도를 통해 지복직관의 희열을 누릴 수 있다.’

 

3. 자신의 일부를 몸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훈련시킴으로써, 참된 자신을 아는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런 체험을 창조할 수 있는 최상의 도구들 중 하나가 날마다의 명상이다. 이 도구를 써서 너희는 생명에너지를 정수리 차크라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깨어있는 동안에 몸에서 떠날 수도 있다(닐 도날드 윌쉬, 신과 나눈 이야기).

 

4. 영적인 진보는 바깥으로 드러나는 능력의 현시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명상 가운데서 얻어지는 희열의 깊이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기쁨이 바로 신이다. 그것은 고갈되지 않는다. 네가 명상을 계속함에 따라 신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너로 하여금 시간을 초월하도록 해 줄 것이다. 너처럼 신으로 향하는 길을 이미 찾은 구도자들은 그 즐거움을 다른 어떠한 즐거움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파라마한사 요가난다, 요가난다, 영혼의 자서전, 김정우 옮김, 중에서).

 

5. 크리야요가의 핵심은 빛을 보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見性이라고 하고, 선도에서는 현빈지문(玄牝之門)이라고 한다. 국선도에서는 통기법(通氣法) 과정이다(서창덕, 당신은 길 잃은 신()이다참조).

 

2) 또는 에고를 비우고 초자아로 채우는 일, 정신체를 비우고 양심체로 채우는 일. 모두 같다.

 

3) 희열이 없는 용맹정진은 고문(拷問)이다.

 

4) 불교의 사선정(四禪定)은 번뇌를 끊고 불법의 공덕을 발생시키는 색계의 4단계 근본선정(根本禪定)이다.

 

5) 요가는 사고의 자연적 혼란을 억제하는 방법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참된 본성, 즉 신성(神性)이 발현되도록 촉진시키는 수행 기술이다. 크리야의 단순하고 손쉬운 방법을 차츰 규칙적으로 증가시켜 나감으로써 인간의 육체는 날마다 성좌(星座)상의 변형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마침내 육체는 우주 에너지의 무한한 가능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하게 되며, 그것이야말로 우주정신의 능동적인 표현이 물리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최초의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파라마한사 요가난다, 요가난다, 영혼의 자서전, 김정우 옮김, 중에서).

 

6) 화두(話頭)는 뜬구름 같은 것이지만 아무 의미 없는 말은 아니다. 뜬 구름을 보고 각인이 각색으로 해석할 뿐이다. 그렇다면 영화(靈火)라는 화두는 어떨까?

 

7) 간화선은 唐代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선사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라는 무자(無字)화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큰스님과 제자들이 모여 문답을 통해 의문을 풀어 깨침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8) 요가의 수식관에서는 호흡을 길게 들이쉬며 다섯을 센 다음 숨을 참으며 다섯을 센다. 다시 길게 내쉬면서 다섯을 센다. 숨을 멈춘다고 하여 지식(止息)법이라고 한다. 또 단전호흡에서는 보통 길게 들이쉬며 다섯을 세고 길게 내쉬면서 다섯을 세라고 하는데 연정원에서는 구체적으로 1분간 내쉬고, 1분간 들이쉬라고 권고한다. 원불교는 정전인 좌선법에서 조식법에 대하여 이르기를 호흡을 고르게 하되 들이쉬는 숨은 조금 길고 강하게 하며, 내쉬는 숨은 조금 짧고 약하게 하라고 한다. 대종교는 진리훈에서 성통공완(性通功完)의 비결이자 홍익인간의 지침으로서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의 삼법수행(三法修行)의 수행법을 이야기한다. 고엔카의 위빠사나에서는 위빠사나 전단계로 아나빠나(Ānāpāna)라는 수식관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호흡조절을 금지하고 그저 살펴볼 것을 권한다. 문자 그대로 호흡의 수를 세는 방법도 있다.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보통 8번 이내로 센다. 수식관(數息觀)의 실행 시 짧은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그러나 이 또한 그로 인해 주의가 흩어지면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의 경우 성모송을 약간 변형하여 들숨과 날숨 그리고 그 사이에 배치하여 수()로 사용할 수 있다.

 

9) ()과 감각()과 마음()과 법()4처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명상법으로 수행자의 특성에 따라 적합한 방법을 선택하여 어느 하나만이라도 성취하면 해탈에 이른다. 이 네 가지에 대하여 념(, 관찰, Sampajañña)하는 것은 위빠사나에서도 동일하다.

 

10) 위빠사나(vipassana)

 

1. 위빠사나는 실론, 버어마 등 남방불교의 승려들과 재가자들에 의해 전통을 이어온 명상법으로서 명상법으로서 염처경(Satipaṭṭhāna Sutta)에 그 근거를 둔 수행법으로 부처님이 하시던 정통 수행법이라고 주장된다. 대승의 사념처관(四念處觀)에 해당한다. ‘vipassana’(, Sampajañña)하여 알아차림(Sati, )으로써 밝게 본다깨어있다는 뜻이다.

 

2. 불교에서 위빠사나는 止法인 사마타(samatha)와 더불어 불교 명상법의 하나로서 오랜 역사를 가진다. 소승(Theravada)전통에 따르면 Samatha는 집중명상 즉 지각을 단일 대상에 두는 명상법으로 그 주요 테크닉 중 하나가 호흡관찰(수식관)이다. 사마타의 호흡관찰명상은 아나빠나(ānāpāna)라고 하는데 이는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는 명상법으로서 숨을 세거나, 숨쉬는 코 부위의 신체자극에 마음을 집중하거나 또는 숨 자체에 집중하여 생각을 하나로 줄이는 명상법이다. 이로써 수행자는 五蘊緣起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육체와 감각과 마음 사이에서 어떻게 감각 인식이 일어나는지 알게 되며 또 이러한 감각에 대한 인식과정을 관찰함으로써 자극에 의한 몸과 마음의 충동적인 반응을 조절하여 과잉 반응할 가능성을 줄이게 된다. 나아가 수행자는 호흡과 관련된 끊임없는 감각의 변화와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게 되고 이 알아차림은 연기(緣起)와 고(), 무아(無我), 무상(無常)의 삼법인(三法印)에 대한 통찰(깨달음)로 이어진다. 보통 사마타를 위빠사나의 전 단계 명상법으로 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수행하면 열반 달성을 포함하여 다양한 정신력과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반면, 위빠사나 수행만으로는 열반에 도달할 수는 있으나 정신력이나 지식은 얻을 수 없다고도 한다(Wikipedia, ‘samatha’ 등 참조).

 

3. 고엔카(Satya Narayana Goenka 1924~2013)는 부처님 사후 500년이 자난 후 위빠사나가 인도에서는 실전(失傳)되고 말았는데, 버마 소승에 전해져 오던 위빠사나가 부활하여 오늘날에 다시 전한다고 주장한다.

 

4. 고엔카는 버마 출생의 인도인으로 위빠사나 명상의 큰 지도자였다. 그는 버마의 부유한 인도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젊어서는 성공적인 사업가였으나 더 큰 은총을 받아 위빠사나의 대가가 되었으며 1969년에는 인도로 이주하여 명상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 고엔카는 부처님의 수행법이었던 위빠사나가 특정 종교나 사상과 상관없는 보편적이며 과학적인 수행법이라고 하면서

2) 위빠사나는 마음과 몸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아니짜, Anitya, Anicca, 無常)을 아주 깊은 차원에서 관찰(삼빠잔나, Sampajañña)함으로써 감각이 마음에 주는 영향을 알아차려(사띠, Sati, ) 마음이 평정심(upekkhā)를 유지하게 하고 이로써 몸과 마음의 조화와 평화를 도모하는 명상법으로 종국에는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보면 그의 위빠사나는 불교의  ·느낌·마음상태·현상(···)四念處명상 중 受念處를 강조하는 명상이다.

3) 그는 자유로운 수행자가 되려면 먼저 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즉 지계(持戒, 실라, sila, 계율), 선정(禪定, 집중, 사마디, Samādhi), 지혜(智慧, 般若, 빤냐, paññā)를 닦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4) 또 위빠사나 명상은 일상생활을 깨어 있는 정신으로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수행법이라고 하며 오온(色受想行識)의 메카니즘으로 수행과정을 설명한다. 즉 현재의 색()을 식(, 윈냐나, viññāṇa)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감각(, 웨다나, vēdanā)을 생멸의 무상(無常, 아닛짜, anicca) 측면에서 평정심(우빽카, upekkhā)을 유지하면서 간단없이 관찰(Sampajañña)하여 알아차리면(사띠, Sati) 감각에서 인지(, 산냐, saññā)로 연결되지 않고 끊어져 욕망과 감정(, 상카라, Saṅkhāra,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감각이 지혜로 직통한다고 말한다. 몸의 구성요소인 오온 간의 연결메카니즘이 어느 부분에서 끊어지는 것이다(12.4.1. ‘명상이란?’감정행동공식참조).

5) 뿐만 아니라 수행이 굳고 깊어지면, 더욱 미세한 감각의 생성과 소멸을 관찰할 수 있게 되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6) 깨달음까지 도달하는 것이 어찌 위빠사나(正念) 하나로 해결되겠는가. 그러나 위빠사나가 8정도의 구체적 수행 테크닉의 하나로서 효과적인 求道法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서양을 비롯한 전 세계에 위빠사나 명상법을 통찰명상(insight meditation), 마음챙김명상(mindfulness meditation)이라는 이름으로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오늘날 그가 주창한 위빠사나 10일 명상 코스는 94개 국가, 176개의 센터에서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한국은 위빳사나 명상센터 담마코리아 https://korea.dhamma.org/ko/)

 

11) 표준이론에서는 지()보다 관()의 명상법을 지향한다. 지법(止法)은 결국 관법(觀法)을 위한 전단계의 명상이다. 혼의 관찰자효과는 관법에서 더욱 유효하다. 생각을 하나로 모으려는 지법(止法)의 시도는 노는 아이를 묶어 두려는 방법이고 관법(觀法)은 아이를 이해하고 사랑으로 관찰하여 아이가 스스로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 명령에 복종하게 하려는 방법이다. 관법은 영과 혼의 구조를 이해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인 수행법이 된다.

 

12)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默照禪)은 모두 남종선으로 문자를 쓰지 않고(不立文字), 교설 밖에서 따로 전하며(敎外別傳),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直指人心), 자신의 본래자성을 보아 성불하는(見性成佛) 선법이다. 간화선은 임제종, 묵조선은 조동종의 선법이다.

 

13) 부처가 되는 37가지 수행법인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에서 맨 먼저 하는 수행이 身受心法의 사념처이고, 사념처의 첫 번째가 감각관찰명상인 신념처관이며, 신념처관의 처음이 호흡관찰로 이는 수식관과 대차없다(위키백과, ‘사념처참조). 37조도품의 마지막이 팔정도이고 팔정도의 마지막이 정정(正定)이니 처음과 끝이 모두 명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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