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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의 깨달음에 기원한 동학과 천도교

문윤홍 대기자 | 기사입력 2023/01/06 [07:45]
“모두가 하늘” 남녀 신분차별 없애…“사람과 사물 죽이지 않는다” 선언

최제우의 깨달음에 기원한 동학과 천도교

“모두가 하늘” 남녀 신분차별 없애…“사람과 사물 죽이지 않는다” 선언

문윤홍 대기자 | 입력 : 2023/01/06 [07:45]

경주시, 최제우 생가 복원...청주시는 손병희 생가에 무궁화동산 조성 사업

 

19세기 조선은 격동의 시대였다. 농민들은 당시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성이 하락하는 경향이 나타나자 다량의 노동력을 투입하거나 경작 작물을 다각화하여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대처해 나갔다. 지대율이 낮아지는 것도 생산성의 위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지배층이 체제 위기를 외면하는 현실 속에서 향촌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혹은 사회적 관계의 변 화속에서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던 노력의 소산으로 해석하는 편이 타당해 보인다.

 

동학은 조선 역사의 산물

 

1862년 충청도, 전라도와 경상도의 삼남 지역을 휩쓴 민란(民亂)이나 1894년 동학농민전쟁도 체제 위기, 생존 위기에 따른 반발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조선사회의 체제와 지배이념 속에서 누적돼 온 경험과 다양한 분야의 변화 속에서 내면화한 나름의 정당성, 즉 인정(仁政)과 민본(民本) 이념을 기반으로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정조(正祖)의 승하 후, 19세기는 정치적으로 사림정치(士林政治) 질서가 무너지고 외척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부터 한양과 지방에서는 전통적 질서의 와해와 함께 다양한 학풍과 종교 운동이 나타났다. 북학(北學)과 서학(西學)이 유행하고 천주교(天主敎)가 교세를 확대해 나갔다. 그중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혜강 최한기 등은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유명 인물들이다.

▲ 경북 경주시 구미산 자락에 있는 천도교 발상지 ‘용담정(龍潭亭)’. 수운 최제우가 1860년 4월 이곳에서 천도교를 창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엇보다 동학(東學)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동학을 일으킨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는 이 우주를 하늘님으로 표현했다.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19세기에 등장한 동학사상을 반봉건 반외세로 국한하거나 19세기의 신흥종교로만 보면 그 역사성을 읽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

 

동학은 남자와 여자, 귀하고 천함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수운은 크게 깨달은 뒤 먼저 자신의 여종 둘을 해방시켰다.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고, 다른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았다. 이는 당시 조선 사회의 노비제 약화 또는 소멸 과정과 겹쳐진다. , 17세기 현종 때부터 ()와 양처(良妻)에게 태어난 자식은 평민이 된다는 법이 만들어져 영조 6(1730)에 확정되어 속대전(續大典)에 실렸다. 노비제에 대한 이러한 사상의 기조와 정책은 1801년 납공(納貢)하던 내수사(內需司)와 각 관청 노비의 양인화(良人化), 1886년 노비세습제의 폐지, 1894년 노비제의 전면 폐지로 이어졌다. 수운의 사상은 조선 역사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1894년 전라도에서 동학농민전쟁을 시작할 때 이들은 4개 조항의 캐치프레이즈(名義)를 내세웠는데, 그중 첫 번째가 사람과 사물을 죽이지 않는다(不殺人, 不殺物)’였다. 이것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긴 병사를 으뜸 공으로 삼는다’ ‘전투를 하더라도 인명을 일절 살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전투 지침으로 이어진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더하여 사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의 대립적 이해를 넘어서는 사상적 지평이 이들의 삶에 확보돼 있었다. 이는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삼경(三敬) 사상으로 체계화됐다. 천지(天地)가 때론 모질듯이 역사 또한 그러하여 조선 사람들은 20세기에 험한 일을 겪었다. 최제우가 읊고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이 간행한 동학의 경전인 용담유사(龍潭遺詞)의 말대로였다. “인심, 풍속 살펴보니, 어쩔 방도 없도다.” ‘서로 돕고 나누기 좋아하던 사람들’(천주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주교)도 피해갈 수 없던 난세를 넘어선 것이었다.

 

최제우의 깨달음과 가르침 그리고 동학과 천도교

 

동학은 186045일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도(創道)되었다. 수운은 경주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지러운 시대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그 구제책을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37세 때에 하늘님의 가르침을 받고 동학을 창도하게 됐다. 수운은 이 종교체험 이후 바로 포교에 들어가지 않고 1년 가량 더 수련에 정진하면서 종교적 신비체험을 내면화시켰다.

 

본래 최제우의 한글 가사인 '용담유사'에서는 하늘님이 '하날님'으로 되어 있으나 이돈화가 '신인철학'에서 신()의 명칭을 한울님으로 표기하여, 이후 천도교(天道敎)에서 한울님으로 통용되고 있다.

 

 

▲ 동학 창도자 수운 최제우 영정

 

최제우는 종교적 체험을 거치면서 하늘님이 저 하늘에 지존하신 초월적 인격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모셔져 있다’(侍天主)는 것을 깨닫는다. 나아가 하늘님 마음이 우리의 본래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하늘님은 우리의 바깥에서는 천지의 지기(至氣)’로서 끊임없이 만물의 생성에 참여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조화의 자취이며 이기(二氣, 陰陽)의 양능(良能)’으로 설명된 귀신(鬼神)이 다름 아닌 바로 하늘님’(鬼神者吾也)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운은 신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석했고, 시천주(侍天主)의 신 이해를 기반으로 모든 사람이 거룩하고 신령한 하늘님을 모신 존재로서 평등할 뿐만 아니라 존귀한 존재라는 인간 이해를 하게 된다.

 

수운은 더 나아가 십이제국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 아닐런가.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國泰民安) 되지마는”(󰡔유담유사󰡕, 안심가(安心歌))이라 하여, 이전의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성세가 필연적으로 다시 돌아오게끔 되어 있다는 시운관(時運觀)을 피력하면서 새 세상의 도래에 대한 희망을 민중들의 가슴에 심어 주었다.

 

이렇듯 최제우는 우리 모두가 하늘님을 모신 시천주의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自覺)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본래의 하늘님 마음을 회복하는 수심정기(守心正氣)’와 내 안에 모신 하늘님을 정성·공경·믿음으로 지극하게 받드는 성경신(誠敬信)’의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제시한 것이 주문수련(呪文修鍊)’이었다.

 

수운은 이러한 자신의 종교체험과 깨달음의 내용을 한문과 한글 두 가지 언어체계로 표현하였다. 그 중에서 한문으로 이루어진 것이 󰡔동경대전(東經大全)󰡕이고 한글 가사체로 이루어진 것이 󰡔용담유사󰡕이다. 수운의 저서 판본은 인제(麟蹄) 경진판(庚辰版), 목천(木川) 계미판(癸未版), 경주(慶州) 계미판(癸未版), 무자판(戊子版) 등이 있었으나 현재 인제 경진판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가장 많이 통용되는 판본은 18836월 경주에서 간행된 계미(癸未) 목각판이다. 하지만 실제 간행한 곳은 경주가 아니라 목천이었으며 공주접(公州接)이 주도하였다. 이후 동학은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에게 전수되어 더욱 구체적으로 민중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해월은 스승의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사람을 하늘님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을 내놓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면서, 당시 핍박받던 민중들, 특히 여성과 어린이까지도 하늘님으로 공경하라고 가르쳤다. 나아가 그는 물건까지도 공경하라는 경물(敬物)’ 사상을 내놓았다.

 

한편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일어난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1894)은 동학의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당시 억압받던 농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새로운 세상 건설의 기치를 한껏 드높였다. 그러나 이 불길은 일본의 개입에 의해 진압되고, 결국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동학은 다시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도통을 전수받은 3세 교조(敎祖)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1922)1905년 동학이라는 명칭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꾸고 교단의 체계를 정비했다. 뛰어난 영도력을 발휘한 의암은 1910년대에 이미 300만 교도를 양성하는 한편, 3·1독립운동을 주도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정신을 계승하기도 했다. 의암의 사후 천도교는 주로 종교단체로서의 성격보다는 사회운동의 주체로서 성격을 띠고, '개벽' '별건곤' '어린이' '혜성' '신인간' 등의 잡지를 출간함으로써 민중에게 근대적 의식을 심어 주는 한편 어린이, 여성, 농민, 노동자, 청년운동 등 이른바 신문화운동을 이끌면서 사회적 실천에 힘써 왔다.

 

내 안에 모신 하늘님

 

동학은 당시의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고 하는 수운 최제우의 보국안민의 열망에서 비롯됐다. 최제우는 당시 세상이 어지러워진 이유를 사람들이 모두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各自爲心)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경전을 살펴보면, 옛날 사람들은 모두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에 순종하며(敬天命順天理)’ 살아왔는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만 살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해결책은 다시 하늘을 공경하고 따르는(敬天順天)’ 삶으로의 회귀이다.

 

그러나 수운에게 있어서 ()’은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요, 상제(上帝)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천은 모든 사람들에게 모셔져 있는 도덕적 원리인 동시에 조화의 주체로서의 귀신이며, 만물을 생성하는 지기(至氣)이자 인간이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받은 허령한 마음이다. 그도 처음에는 하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서로 문답이 열리는 체험을 통하여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천주(天主)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하늘님이 외재적이고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내 몸을 통해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기운이며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것이 나중에 의암 손병희에 와서 인내천(人乃天)’이라는 동학의 가장 핵심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학에서의 경천(敬天)은 저 멀리 하늘에 계신 상제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모신,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안에 모셔져 있는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늘님은 바로 우리의 근본 마음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모든 인간은 그 하늘님의 영기(靈氣)를 모신 거룩한 존재로 이해된다. 이렇게 최제우는 천()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면서 인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고, 이는 당시의 계급모순과 불평등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가져오게 하였다.

 

최제우는 이런 시천주(侍天主)의 자각을 보편화하기 위해서 그의 하늘님 체험에서 받은 주문(呪文)과 영부(靈符)를 통한 수련을 강조했다. 주문은 강령주문(降靈呪文)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8자와 본주문(本呪文)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13자로, 전체 21자로 되어 있다.

 

수련을 통해 본래의 하늘님 마음을 회복하고 하늘님의 덕을 밝혀 늘 생각하여 잊지아니하면 지기(至氣)와 지극히 화합하여 온전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운은 신비적 종교체험으로 동학을 창도하였지만 결코 하늘님의 권능의 힘에 의해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수운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 내면에 모시고 있는 본래의 마음을 깨달아 그것을 지켜내도록 함으로써 자발적인 도덕 실천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것이 그가 새로 제창한 수심정기(守心正氣)’이다. 주자학적 윤리 규범들이 형식화되고 명분을 중시하는 비실제적인 경향이 심해져 더 이상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지도적 이념으로서 기능할 수 없게 되자, 수운은 외재적인 천리(天理)에 근거한 윤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것을 내면화하여 개인의 자각적 수양을 강조한 것이다.

 

최제우는 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오직 내가 다시 정한 것이라”(仁義禮智, 先聖之所敎, 修心正氣, 惟我之更定. '동경대전', 수덕문(修德文))고 하여 수심정기(修心正氣)가 인의예지(仁義禮智)에 앞선 공부이며 더 근본적인 것임을 강조했다. 이는 인의예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의예지가 실제로 시행되기 위한 더 근본적인 실천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최제우는 외재적인 하늘님의 권능을 바라는 타율적인 신앙에서 진일보하여, 본래 나의 마음이 하늘님 마음인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 당시에 멸시받던 백성들도 군자가 되고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 경북 상주 동학교당 유물전시관에 보관돼 있는 『용담유사』 목판.

 

내 또한 두렵게 여겨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즈음에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었는데,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아니하였다.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수심정기하고 물었다.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그러자 하늘님께서 대답하시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사람들은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는데,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는 무궁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라는 것은 존칭으로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 ‘조화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요, ‘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다.

 

영세라는 것은 사람의 평생이요, ‘불망이라는 것은 생각을 보존한다는 뜻이요, ‘만사라는 것은 수가 많은 것이요, ‘라는 것은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는 것이니라.(이상 본주문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말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에 대한 해설) 그러므로 그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에 이르느니라.

수심정기네 글자는 천지가 운절되는 기운을 다시 보충하는 것이니라. 경에 말씀하시기를 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오직 내가 다시 정한 것이라하셨으니, 만일 수심정기가 아니면 인의예지의 도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니라. 내 눈을 붙이기 전에 어찌 감히 수운 대선생님의 가르치심을 잊으리오. 삼가서 조심하기를 밤낮이 없게 하느니라.

 

동학의 개벽 사상

 

최제우의 구도(求道) 동기는 보국안민에 있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한 시대,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 전체에게 새로운 문명,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주 순환의 이치에 비춰 볼 때 필연적으로 오리라고 하였다. “시운(時運)이 둘렀던가 만고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이 세상에 창건하니 이도 역시 시운이라.차차차차 증험하니 윤회시운 분명하다”(󰡔용담유사 󰡕, 권학가(勸學歌)),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 되지마는”(󰡔용담유사󰡕, 안심가(安心歌))이라 하여 최제우는 그것을 개벽(開闢)’이라고 불렀다.

 

이런 개벽 사상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동학에 입도하게 만들었고, 이후 동학혁명의 중요한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에게서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역사적 필연성보다는 주문과 영부를 통한 수련 그리고 성경신(誠敬信)의 실천을 통한 인간의 주체적인 자각이었다.

 

 

▲ 수운 최제우 묘와 묘비.  © 매일종교신문

 

수운은 새 세상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역시 인간이며, 그 변화는 자기 내면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개벽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주체적인 자각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에게 있어 개벽은 하나의 역사적 필연이기보다 인간의 주체적 자각을 통한 생활양식의 전환,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개벽을 물질개벽보다는 정신개벽에 더 초점을 두는 경향은 이후 최시형과 손병희에 오면서 더욱 강화됐다.

 

최제우는 이렇게 깨달음을 개인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항상 사회적 실천과 적극적으로 연결시켰다. 그에게는 항상 초월과 내재가, 깨달음과 사회적 실천이 역동적 긴장 관계 속에 있다.

 

어느 한쪽을 강조하면 극단으로 빠진다. 이것은 그의 독특한 인식론이기도 한 불연기연(不然其然)의 논리 구조와 상통한다. 불연(不然)은 드러나지 않는 세계, 즉 종교적 직관의 세계를 말하고, 기연(其然)은 현상세계를 말한다. 상식과 논리와 추론이 가능한 경험적 현실세계이다.

수운은 이 불연기연장에서 기연만 알고 그것이 전부라고 믿고 의존하는 것도 비판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불연의 세계에만 빠지는 데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는다. 그는 불연과 기연을 함께 살펴서 기연의 드러나는 세계에서의 합리성과 불연의 드러나지 않는 세계에서의 직관의 차원을 함께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이 세상 운수는 천지가 개벽하던 처음의 큰 운수를 회복한 것이니, 세계만물이 다시 포태의 수를 다시 정하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경에 말씀하시기를 산하의 큰 운수가 다 이 도에 돌아오니 그 근원이 가장 깊고 그 이치가 심히 멀도다하셨으니, 이는 이것이 바로 개벽의 운이요 개벽의 이치이기 때문이니라. 새 한울·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질 것이니라.

개벽이란 한울이 떨어지고 땅이 꺼져서 혼돈한 한 덩어리로 모였다가 자(() 두 조각으로 나뉘임을 의미함인가? 아니다. 개벽이란 부패한 것을 맑고 새롭게, 복잡한 것을 간단하고 깨끗하게 함을 말함이니, 천지만물의 개벽은 공기로써 하고 인생만사의 개벽은 정신으로써 하나니, 너의 정신이 곧 천지의 공기이니라. 지금에 그대들은 가히 하지 못할 일을 생각지 말고 먼저 각자가 본래 있는 정신을 개벽하면, 만사의 개벽은 그 다음 차례의 일이니라.

그러나 정신을 개벽하고자 하면 먼저 스스로 높은 체하는 마음을 모실 시()’자로 개벽하고, 스스로 높은 체하는 마음을 개벽하고자 하면 의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정할 정()’자로 개벽하고, 의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개벽하고자 하면 아득하고 망녕된 생각을 알 지()’자로 개벽하고, 아득하고 망녕된 생각을 개벽하고자 하면 먼저 육신 관념을 성령으로 개벽하라. 이러므로 기필키 어려운 것은 불연이요, 판단하기 쉬운 것은 기연이라. 먼 데를 캐어 견주어 생각하면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고 또 그렇지 않은 일이요, 조물자에 붙여 보면 그렇고 그렇고 또 그러한 이치인저. 이 글 보고 저 글 보고 무궁(無窮)한 그 이치를 불연기연(不然其然) 살펴내어 부야흥야(賦也興也) ()해 보면 글도 역시 무궁하고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

 

일상생활에서의 도

 

동학은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에게 계승되었다. 해월은 관에 쫓기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나무를 심고, 새끼를 꼬고, 멍석을 짜며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면서 우리의 일상생활이 모두 도 아닌 것이 없다”(日用行事莫非道也)고 하였다. 해월은 고원(高遠)하게만 느껴지던 도를 일상생활을 통해 가르치고 실천하였다.

 

그는 가부장적 유교사회에서 당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과 어린이에 대해서도 부인이 한 집안의 주인이다”(󰡔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 부화부순(夫和婦順)), “어린아이도 하느님을 모셨으니 아이를 때리는 것은 바로 하늘님을 때리는 것이다”(󰡔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待人接物))라고 하여, 새로운 여성관을 제시함과 동시에 약자에 대한 일체의 폭력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부부 간의 화순함(夫和婦順)이 도()의 으뜸 종지(宗旨)라는 설법을 통하여 남편과 부인의 관계를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닌 서로 화순하기를 힘써야 하는 평등적 상보(相補) 관계임을 선언하였다.

 

해월은 삼경(三敬)사상을 통해 경천(敬天)과 경인(敬人)뿐만 아니라 경물(敬物)까지도 강조하였다. 특히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 같이 하라등의 법설(法說)은 오늘날 환경운동의 헌장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최시형은 제도나 정체(政體)의 변화를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변화와, 그로 인해 새로운 생활양식을 결단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였다. 해월은 이런 개개인의 생활양식의 변화로 말미암아 결국 전체 문명의 변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그의 향아설위(向我設位)’의 법설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유교를 비롯한 동서고금의 대부분의 제사는 벽을 향해 제위(祭位)를 차리는 향벽설위(向壁設位)’이지만, 동학에서는 신(조상)이 저 벽을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모셔져 있다는 인식의 전환에 따라 나를 향해서 상을 차리는 것이다.   

 

▲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이런 제사의 변화는 우리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자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는 인류 문명의 주체가 바로 인간 자신이며,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도 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라는 것을 밝힌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최시형은 구체적인 일상생활에서의 수도를 가장 중시하였고, 이런 생활의 변화를 통해 생명의 문화, ‘모심살림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사람은 첫째로 한울을 공경해야 하나니, 이것이 돌아가신 스승님께서 처음 밝히신 도법이라. 한울을 공경하는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왜 그러냐 하면 한울은 진리의 중심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울을 공경함은 결단코 빈 공중을 향하여 상제를 공경한다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을 공경함이 곧 한울을 공경하는 도를 바르게 아는 길이니, ‘내 마음을 공경치 않는 것이 곧 천지를 공경치 않는 것이라 함은 이를 이름이었다.

 

사람은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알게 될 것이요,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모든 사람과 만물이 다 나의 동포라는 전체의 진리를 깨달을 것이요,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남을 위하여 희생하는 마음과 세상을 위하여 의무를 다할 마음이 생길 수 있나니, 그러므로 한울을 공경함은 모든 진리의 중심이 되는 부분을 움켜잡는 것이니라.셋째는 물건을 공경함이니 사람은 사람을 공경함으로써 도덕의 최고경지가 되지 못하고, 나아가 물건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야 천지 기화의 덕에 합일될 수 있느니라.

 

맑고 밝음이 있으면 그 아는 것이 신과 같으리니, 맑고 밝음이 몸에 있는 근본 마음은 곧 도를 지극히 함에 다하는 것이니라. 일용 행사가 도 아님이 없느니라. 한 사람이 착해짐에 천하가 착해지고, 한 사람이 온화해짐에 한 집안이 화목해지고, 한 집안이 화목해짐에 한 나라가 화목해지고, 한 나라가 화목해짐에 천하가 같이 화목하리니, 비 내리듯 하는 것을 누가 능히 막으리오.‘

 

임규호가 여쭈었다. “나를 향하여 위를 베푸는 이치는 어떤 연고입니까?” 신사께서 대답하셨다. “나의 부모는 첫 조상으로부터 몇만 대에 이르도록 혈기를 계승하여 나에게 이른 것이요, 또 부모의 심령은 한울님으로부터 몇만 대를 이어 나에게 이른 것이니, 부모가 죽은 뒤에도 혈기는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요, 심령과 정신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제사를 받들고 위를 베푸는 것은 그 자손을 위하는 것이 본위이니, 평상시에 식사를 하듯 위를 베푼 뒤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심고하고 부모가 살아 계실 때의 교훈과 남기신 사업의 뜻을 생각하면서 맹세하는 것이 옳으니라.”

 

동학의 사회적 실천운동

 

이처럼 생활의 성화(聖化)’를 추구한 최시형과는 달리 시천주(侍天主)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평등사상에 입각해 민중이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력한 사회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일어난 운동이 전봉준(全琫準, 18531895)이 이끈 갑오동학혁명이다. 이는 민중이 부패한 봉건정부와 외세에 맞서 현실의 모순을 제거하고자 일어난 무장투쟁이었다.

 

동학혁명은 생활 속에서 도()를 실천하고 종교적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던 최시형의 노선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기에, 1차 봉기에서는 동학 지도층 전체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전주협약 이후 청일(淸日)전쟁에 승리한 일제(日帝)의 침략적 야욕이 드러나면서, 2차 봉기에서는 전체 동학도들이 단합하여 반봉건뿐만 아니라 반침략·반외세의 기치까지 높이 들었다. 이런 동학혁명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현실의 모순과 불평등을 개혁하자는 자발적인 근대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마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동학혁명의 실패 이후 교권(敎權)을 이어받은 손병희는 보국안민의 새로운 방법으로 민회를 조직하여 개혁운동을 추진하려고 했다. 이 개혁운동은 단발(斷髮)을 하고 물들인 검은 옷을 입으며 긴 옷고름 대신 단추를 달게 하는 등의 생활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손병희는 합리적인 생활운동을 통해 고루하고 진부했던 낡은 폐습을 뜯어고치고, 나아가 국정 쇄신, 민폐 제거, 잡세 혁파, 교육과 산업의 진흥 등을 주장하는 일대 민중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이 1904년 갑진개화혁신운동으로, 동학교도에 의해 전국적으로 추진된 근대화운동이다.

▲ 동학 3세 교조 의암 손병희

 

나라가 일제에 완전히 넘어가게 되자 손병희는 모든 교회의 힘을 오직 독립에 결집시켜 전국 교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지방대표 500여명을 서울 우이동 봉황각에 모아 7차에 걸쳐 독립정신 고취를 위한 수련회를 개최했다. 이때 결집된 힘을 바탕으로 일으킨 범종교적·범민족적 운동이 바로 기미년 3·1독립운동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천도교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손병희를 비롯한 수많은 간부들이 희생당하고, 교회는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천도교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이러한 보국안민의 정신은 천도교 청년들에게 계승되어 민족자주 정신의 고양과 대중계몽을 위해 전개된 출판문화운동·어린이운동을 비롯한 이른바 신문화운동으로 승화되었다. 출처: 이법사 동학과 최제우, 동학이란 무엇인가일부 인용

 

경주시, 수운 최제우 생가 복원

 

경주시는 동학발상지 성역화사업의 일환인 수운 최제우 생가 복원 준공식을 201477일 현곡면 가정리에서 거행했다. 이 자리에는 최양식 경주시장을 비롯해 박남수 천도교 교령, 시의원, 천도교인,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고 경주시는 밝혔다.

 

경주시는 1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2861부지에 생가와 주차장, 공중화장실 등을 조성했다. 복원사업은 경주시가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의 생애와 동학사상을 조명하고 동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볼거리 제공을 위해 201211월부터 추진했다.

 

 

▲ 복원된 최제우생가

 

수운 최제우는 경주지역의 몰락한 양반으로 태어나 무극대도(無極大道)의 깨달음을 얻은 후 1860년 민족종교인 동학을 창시했으며, 이후 양산의 천성산에서 기도하며 수도하던 중 득도해 자신의 도()는 천도(天道), ()은 동학(東學)이라고 했다. 이후 그의 교리와 이치가 경전인 동경대전용담유사에 담겨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오늘날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 시장은 동학의 발상지이자 천도교의 성지인 경주를 우리나라 근대사상의 핵심인 동학의 중심지로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동학발상지 성역화 사업을 차질없이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청주시, 손병희 생가에 무궁화동산 조성한다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명 중 한 명인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1922) 생가에 무궁화동산이 조성된다. 충북 청주시는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손병희 생가 내부에 5000규모의 무궁화동산을 조성한다.

 

이번 사업은 산림청이 공모한 ‘2023년 무궁화동산 조성사업에 선정돼 추진한다. 청주시는 사업비 1억원을 들여 600~1000그루의 무궁화를 심는다는 계획이다. 벤치 등을 설치해 휴식공간도 마련한다. 이번 사업이 완료되면 손병희 생가 방문객들은 생가 내·외부에서 무궁화를 볼 수 있게 된다.

 

앞서 청주시는 손병희 생가 근처 청원구 북이면에서 내덕동으로 연결되는 도로의 이름을 그의 호를 따 의암로(義菴路)’로 지었다. 의암로 일대 1.5km 구간에는 1875그루의 무궁화가 심어진 무궁화길이 있다.

▲ 무궁화동산이 조성되는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손병희 생가 전경. /청주시 제공.

 

충북 청주 출신인 손병희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좌장으로서 독립선언을 주도하다 일제에 체포됐다. 옥고를 치르던 중 병보석으로 출옥했으나 1922519일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의암이 태어난 생가는 충청북도가 1979929일 기념물 제30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청주시 관계자는 손병희 선생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무궁화동산을 조성하게 됐다앞으로도 많은 시민이 무궁화를 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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