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에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나가사키의 참상과 공포를 알려 핵무기가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호소가 담겨 있다. 나가사키 폭심지에서 약 800 m 떨어진 민가에 있던 괘종시계는 11시 2분을 가리키며 파손된 채 영원히 멈춰있다. 피폭 전 야마자토마치 일대는 집이 촘촘히 박힌 활발한 도시였으나 폐허로 변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상공에서 한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에 있었다. 태양 바로 곁에 있는 듯한 열기와 초속 340 m의 열풍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를 집어삼켰다. 폭심지 근처의 건물은 다 사라졌지만, 병원 일부는 남았다.
한순간에 병원은 생지옥으로 변해 버렸고 황폐해진 땅바닥에는 벌거숭이가 된 몸뚱이들이 조각난 파편과 뒤엉켜 있었다. 모두가 절망하던 그 순간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환자들을 옮겨주세요” 그 목소리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방사선학 교수이자 바오로라는 이름의 천주교 신자인 나가이 다카시 박사였다. 그는 머리에서 쏟아진 피를 추스르고, 급하게 임시 병원을 세웠다.
나가이 박사는 3일 후 아내 미도리를 찾아 집으로 향했다. 모든 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부서진 건물 더미에서 아내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으로 생각되는 곳에서 타다만 검은 덩어리가 뭉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피폭당한 아내 미도리의 뼈마디 사이에 타다만 묵주가 사탕처럼 녹아 엉켜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추스르고 그을린 양동이에 아내 미도리의 유골을 담았다. 두개골, 엉덩이뼈, 척추 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는 세포가 절여지는 아픔을 당했지만, 원자폭탄 후유증으로 피해당한 사람들을 위해 의료인으로서 봉사에 힘을 다했다.
원자폭탄은 우라카미 상공 500 m에서 투하되었다. 우라카미 성당은 그 즉시 무너져 내렸고 신부 2명과 수십 명의 신도가 무너져 내린 건물 더미에 깔려 사망하였다. 우라카미 신자 약 8,500 명이 그때 사망했다. 우라카미 천주당에는 종탑이 세워져 있었다. 종탑 밑으로 떨어진 종은 돌무더기에 묻히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찾아낸 종을 울리며 원폭 사망자의 추모 기도를 올리고 있다.
기획전시실에는 나가사키 원폭투하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놓고 있다. 원자폭탄 ‘팻맨’의 실물 크기 고래 모형이 세워져 있으며 내부를 상세히 볼 수 있게 전시되어 있다. 길이가 3.25 m, 지름 1.52 m, 무게는 4.5 t으로 폭발력이 TNT 화약 21 kt로 폭발 시 폭심지 부근 건물들은 완전히 전소되었다. 누렇게 변한 미군기가 투하한 전단지도 보인다. 1945년에 들어서면서 미군기에 의한 일본 본토의 폭격은 심해졌다. 전단에는 원폭의 위력과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는 사실을 고지, 나가사키 시민에게 피난을 호소하며 일본군의 전쟁 중지 권고가 적혀있다.
연합군은 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연합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과 추축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사이에 벌어진 경제권 쟁탈 전쟁이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서구 열강의 수많은 함대가 독일 나치군과 전투를 하던 중 그사이 태평양에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 나라가 있었다. 태평양을 노리는 일본을 막기 위해 미국은 캘리포니아 기지에 있어야 할 함대를 하와이에 주둔시켰다. 일본에게 태평양에서의 영역을 확대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냈지만, 일본은 1940년 9월 북베트남 국경을 넘어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인도차이나 쪽으로 눈을 돌려 점령해 갔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고무와 쌀이 풍부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이시 섬까지 차지하게 된다.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시작하면서 긴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이 철저히 준비한 진주만 공격에서 미국은 이길 수 없었고 패배를 당한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 승리 이후 지하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팽창을 본 미국은 복수전을 준비해 오키나와섬을 점령했다. 이때, 미군의 희생을 끝내고 싶어 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미군 주도하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인 평화헌법에는 「일본 국민은 전쟁과 폭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는 영구히 포기한다. 육해공군과 그 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연합군과의 포츠담 선언 제10항 중에는 「우리는 일본인을 인종적으로 노예화하려거나 국가적으로 멸망시키려는 의도는 없으나, 우리 포로를 학대하는 자를 포함한 일체 전쟁 범죄인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을 할 것이다.」 내용을 보면 유독 포로 학대를 정확히 명시하고 있다. 범죄의 죄명은 포로 학대나 주민 학살, 성폭력, 도시파괴로 굉장히 다양했다. 일본이 연합군의 큰 분노를 산 것이 포로 학대 범죄였다.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전쟁 범죄인의 처벌은 식민지 지배를 받던 조선인이 일본의 소유라고 판단했고 한국은 전쟁 피해에 대해 일본에 추궁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포로로 생포되어 죽음을 맞이한 군인, 원자폭탄의 투하로 무고하게 희생된 일본인, 조선인, 우리는 먼저 그 영혼들의 구원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류의 모든 생명은 존귀하고 소중하다. 국가의 전쟁에 생명을 이용하는 그 전쟁을 구경하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 현재의 지구상의 핵은 유익하게 사용하면 다량의 에너지를 제공해 주지만 방사능이 조금만 누출되면 인간에게 결정적인 손상을 가져오며 자연의 생태계는 막대한 오염에 이르게 된다. 핵무기 제조, 보유, 배치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결정적인 무기가 되므로 보유는 분명 포기해야 한다.
핵보유국은 평화를 원하는 인류의 ‘멈추라’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야망으로 핵을 계속 보유하고 관리하면 자국도 위험하고 지구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핵보유국의 야만을 깨우쳐 인류의 평화와 안녕이 지속될 수 있도록 국가 지도자들은 힘을 모아야 한다. ‘핵전쟁에 승자는 없으며, 영원히 일어나서도 안 된다’
* 포츠담 선언 - 1945년 7월 미국, 영국, 중국 대표가 독일의 포츠담에 모여 일본 의 항복 조건과 일본 점령지 처리를 발표한 선언
* 태평양 전쟁 –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동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를 강탈 태평양 지배 세력이 되고자 함.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군 해군 기지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하면서 생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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