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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육조사 선원장 현웅 스님의 법문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3/12/06 [10:35]
내 안의 부처 등지고 바깥에서 무얼 찾나

서울 육조사 선원장 현웅 스님의 법문

내 안의 부처 등지고 바깥에서 무얼 찾나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3/12/06 [10:35]
 
참으로 큰 법문은 법상에 있는 법사에게 듣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듣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끼리 이야기 할 때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도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진수이고, 가장 큰 법문인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법문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우리 의식구조가 고정관념에 의해 막혀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눈과 귀가 열려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옛 선사가 말하기를 “너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빼앗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이 말이 와 닿아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저런 말씀을 하셨을까 알쏭달쏭 하다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저는 가끔 이런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 ‘네 안의 부처를 만나려거든 네가 알고 있는 부처를 잊어버려라’고 말합니다. 여러 경전을 보고 공부해야 불교를 알 텐데 왜 불교를 잊어버리라고 말하는지 궁금할지 모르나 이것이 선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증득하고 나서 일체 중생을 둘러보니 모든 중생이 자기와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고 자기 안의 부처를 등지고 바깥에서 자기가 만든 부처를 경험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병통이 생깁니다. 그리고 길이 막히는 것이죠. 그래서 옛 선사들은 너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빼앗으리라고 하셨던 겁니다.


불교는 자기관념이 지워져 버릴 때 불씨가 나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지 알아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앎이 필요한 것은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내 안의 자성불을 바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부처인지도 모르고 헛것을 쫓아다니기에 선사들은 허상을 뺏어 버리겠다는 뜻으로 주장자의 비유를 들었던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면도칼보다도 날카롭게 마음의 어리석음을 베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은 언어만 달랐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선과 교를 구별하는 자체가 잘못된 일입니다.


<천수경>에 ‘아약향도산(我若向刀山) 도산자최절(刀山自催折) 아약향화탕(我若向火湯) 화탕자소멸(火湯自消滅) 아약향지옥(我若向地獄) 지옥자고갈(地獄自枯渴)’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칼산지옥에 가면 칼산이 절로 무너지고, 화탕지옥에 가면 화탕이 절로 없어지고, 모든 지옥에 가면 지옥이 절로 말라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법회 때마다 <천수경>을 그냥 외우지만 선승에게는 그대로 선법문입니다. 내 안에 쌓여 있는 어리석음을 없애고 내가 주인임을 깨닫게 되면, 칼산을 만나면 칼산이 없어지고, 지옥도 극락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어있음을 알고 칼산이 비어있음을 알면 칼산은 무너질 수밖에 없지요. 지옥 또한 그렇지요. 내가 만나는 모든 경계가 다 그렇습니다. 공부를 해서 내가 나의 참 주인이 되면 동대문시장의 사람들이 불보살이 춤추는 집단으로 보이게 됩니다. 시끌벅적한 시장이 아니지요. 내가 가는 곳이 극락이고, 그 세계가 바로 불국토이지 나하고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 근본적인 것을 자각하지 못하기에 생활과 불교가 떨어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불교인이 많아 이상에만 치우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불교가 이상향에 묶여 있어서 생활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어요.


불교의 가르침은 인연법입니다. 물을 끓여 차를 달이면 차향이 나서 향기롭지요. 그 차를 마시면 오줌이 되어 나오고, 그 오줌은 땅속으로 들어가 식물이 먹습니다. 강이나 호수의 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 수증기는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고 만물의 근원이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물의 성질이 변했습니까? 형태는 변했지만 본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이 땅에 스며들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안보이니깐 우리는 물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요. 그것은 우리 안의 불성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무명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불성이 있는데 그 의식이 무명으로 덮여져 내 안의 불성을 등져 버리기에 어리석음이 생깁니다. 선사들은 이 어리석음을 빼앗기 위해 주장자 설법을 하신 겁니다.


굳이 12연기니 ‘안이비설신의’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생활 속에서도 인연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연법을 알면 나를 집착하지 않고 순리를 따르기에 본성으로 돌아오기 쉽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인연법을 설파하셨습니다.


불교가 너무 교리에 집착되어 불교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있는 것을 바로 보는 것이 ‘팔정도’입니다. 그렇게 보면 선과 교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 놓아야 공부 시작돼
살아있는 선 생활 속에 있어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선을 가르칠 수 있을까가 저의 화두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20년간 여러 선방에서 수행했고, 이후 서양에서 20년간 포교하며 수행해 왔습니다. 저는 이 문명사회에서 왜 불교가 필요한지 확연히 느꼈습니다.


한국은 서양의 물질문명을 좇고 있지만 서양에서는 물질에 대한 회의를 품고 불교에서 풀려고 합니다. 이렇게 서양의 문화를 무조건 수용하는 사람과 정신적 갈증을 희구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부처가 자신 안에 있다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활 속에 불교가 있음을 확연하게 경험했습니다. 중생의 생활이 불교를 떠나 있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불교를 어렵다고 합니다. 특히 선불교는 현실과 괴리되어 뒷방에 앉아 혼자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올바른 살아있는 선은 생활 속에 있는 것이지 이것을 떠나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은 밥 먹을 때나 시장 갈 때나 친구를 만날 때나 항상 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 혼자 참선할 때도 시끄럽다거나 방해 된다고 주위를 탓하지 마세요.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그렇게 좁고 융통성이 없다면 불자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부처를 붙들고 있는 한 그것이 내 마음을 가려서 조그마한 불교를 만듭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부처를 버리면 내 안에 부처가 있다는 사실을 직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드러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듣고 일하는 그것이 참 불교입니다. 어려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선에 주눅 들지 마세요. 저는 아침·저녁 한 시간씩 참선하는 것 외에 특별히 수행하지 않습니다. 생활 속에 진리가 있음을 경험합니다.


예전 해인사에서 하루 12시간에서 20시간까지 10여 년 동안 정진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늘지 않고 어렵게만 느껴졌어요. 그래서 화두도 버리고, 깨달으려는 생각도 버렸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니까 거기서 공부가 시작되더군요.


수행은 스승을 믿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스승을 믿어야 내 생각을 안 내게 됩니다. 생각을 안내면 아상이 없어져서 공부할 수 있는 기연이 되고, 거기서 조금만 가면 화두를 터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에게 불성이 있으니 나도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혼자 앉아서 수행합니다. 그러면 절대 공부가 늘지 않습니다. 스승을 믿으면 항상 스승이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삿된 생각이나 알음알이를 낼 수 없게 됩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에서 내 안의 싹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모두 깨달음의 씨앗이 있는데 그것이 나오려고 하면 관념들이 뭉개버립니다. 그런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전강 스님이 수원 용주사에 계셨을 때 저는 스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매일 새벽 법문을 하셨습니다. 하루는 육조혜능 스님과 남악회양 스님의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다’는 말을 인용했는데 제가 그 말에 그냥 팍 놓아지군요. 그리고 20년간 제 방에서 공부했던 것을 돌아보니 눈물이 펑펑 났습니다. 스님께서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미국에서도 어느 날 새벽 물 항아리 밑이 깨져 나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거기서 변화가 오더군요. 공부를 이렇게 해야겠다, 보임을 이렇게 해야겠다는 것도 아니었는데 생활 속에서 변화가 와서 어리석음이 자각으로 바꿔지더군요. 그러면서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나고, 그러면서 성격도 고쳐지고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세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지요. 그런 후 세상에 어려운 일들이 적어지더군요.


여러분도 스승을 믿으세요. 제 경험으로는, 믿음이 없을 때는 스승의 법문이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지만 믿고 난 뒤부터는 하찮은 말도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믿음은 내 생각을 없애고 아만을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아만이 없어지니 마음속의 불성이 되살아나 의심이 생기고 화두를 들면 의심이 끊어져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불법 아닌 것이 없다는 이야기죠.


매일 새롭고 생활에 변화가 와요. 날마다 변화가 오기 때문에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도 선사들의 어록을 한번만 봐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자만하지 말고 꾸준히 수행하세요. 그러면 세상 모두가 나와 연결이 되어 있고, 내가 부처라는 믿음이 확연해질 것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생활 속에서 수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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