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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기행⑨인도구법승들 파미르고원을 넘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6/03/28 [07:49]
떠날 때는 불법이었지만, 금의환향한 현장법사의 길

실크로드기행⑨인도구법승들 파미르고원을 넘다

떠날 때는 불법이었지만, 금의환향한 현장법사의 길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6/03/28 [07:49]
▲ 현장법사가 인도구법을 마치고 귀국길에 들렸다는 파미르고원 오아시스 읍성 타쉬쿠르간의 석두성터 앞에선 필자 이치란 박사.     © 매일종교신문

떠날 때는 불법이었지만, 금의환향한 현장법사의 길
 
인도에서 불교가 동점(東漸)하는 데는, 중앙아시아의 승려들이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국의 서역인도구법승(西域印度求法僧)들 또한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는데 상당한 활력소가 된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불교가 중국 한나라에 전해진 것은 전적으로 실크로드를 경유해서이다. 중국에 불교를 전파해준 나라는 인도가 아니라 북부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걸쳐 있었고, 한때 타림분지와 하서회랑에 있었던 월지였다. 월지는 흉노에게 밀려서 중앙아시아 서쪽으로 이동해 가서, 그리스 식민지였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250-125BC)을 물리치고 쿠샨제국(135BC-248CE)을 세우게 된다. 박트리아는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야 강 사이에 있는 나라로서 인도이란어파와 인도유럽어족 계통이었다. 박트리아인들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남부에 거주하고 있는 타지크 족 선조들의 일파였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지배했던 고대 왕국으로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북인도까지 뻗어나갔으며 인도-그리스 왕국(180BC-10CE)을 세웠고, 이는 기원후 10년까지 지속되었다.
 
▲ 1993년에 발견된 박트리아어로 된 라바탁 비문(Rabatak inscription)에 새겨진 쿠샨제국(카니슈카 왕 2세기CE)의 영토.     © 매일종교신문

쿠샨 왕조는 타지키스탄, 카스피 해, 아프가니스탄, 갠지스 강 상류를 가로지르던 제국이었고, 중국, 로마 제국,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등과 교역했다. 쿠샨왕조는 처음엔 유목민이었으나, 점차 정주민이 되면서 그들이 정복한 박트리아의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리스 문자를 썼고, 그리스를 모방해서 동전을 만들어서 사용했다. 쿠샨 왕조는 인도양을 통한 무역과 실크 로드를 연결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쿠샨 왕조는 동서양의 문화를 포용하여 그리스 문화와 불교문화가 융합된 이른바 그레코 불교가 발달하게 하였는데, 이는 사방으로 퍼져 중국에는 대승불교로서 전해졌다. 쿠샨의 카니슈카 1세(재위127-140CE)는 인도의 아소카(304-232 BC), 하르샤(590–647CE북인도)와 메난더 1세(재위165–130 BC)와 함께 불교를 부흥시킨 왕 가운데 하나로 칭송되고 있다. 카니슈카 왕은 카슈미르에서 불교 회의를 후원했는데, 이를 제3차 경전결집회의라고 부른다. 쿠샨제국은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나라들까지 지배할 정도였고, 동쪽으로는 한나라와 접경을 이루었다.
 
▲ 그레코(그리스)-박트리아 왕국(256-125 BC)의 영토.     © 매일종교신문
▲ BC 100년경의 인도-그리스왕국.     © 매일종교신문
중앙아시아 승려들이 중국에 일방적으로 전해준 불교가 쉽게 중국에 정착된 것은 아니고, 몇 세기에 걸친 씨 뿌리기 과정이 지나서야 불교란 종교가 그것도 대승불교가 중국 땅에서 자라게 되었다. 중국출신 불교승려들이 중앙아시아인 서역 승려들과 직접 접촉한 것은 3세기경부터인데, 7세기에 이르면 현장법사 같은 중국 출신 승려가 서역과 천축(인도)으로 구법여행을 떠나게 된다.
 
▲ 법현법사와 현장법사 신라의 혜초법사가 넘었던 해발 6천 미터의 파미르고원으로 여름인데도 만년설이 쌓여있다     © 이치란

가장 먼저 이 길을 떠난 승려는 동진(東晉)의 법현(法顯:337-422CE) 법사였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지 3백년이 지났지만, 법현법사가 생각하는 인도불교가 궁금했고, 한역된 경율(經律)도 한계가 있어서 직접 인도구법여행을 하기로 작정하고 먼 길을 나섰다. 법현 법사는 399년에 혜경, 혜응, 혜외, 도정 등의 승려와 함께 장안을 출발해 서역으로 떠났다. 법현법사는 둔황을 벗어나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서 곤륜산 아래 호탄 왕국을 거쳐 파미르(총령)고원을 넘어서 中인도에 도착해서 산스크리트어를 학습하고 라자그리하(왕사성)의 불적지를 순례하고 산스크리트어로 된《마하승기율=대중부율장》과《잡아비담심론》을 구하고, 스리랑카에서는《오분률(五分律)=상좌부 화지부 율장》,《장아함경》등의 불서를 구해서, 413년 15년 만에 천신만고 끝에 남해 항로를 따라 청주(지금의 산둥 성)로 귀국하였다. 함께 출발했던 도반들은 도중에 포기하거나 죽고 귀국한 것은 법현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둔황을 벗어나서 타클라마칸사막에 들어서자, “땅에는 기어 다니는 짐승도 없고, 공중에는 나는 새도 없을 정도로 막막한 사막뿐이다“라고 그의 여행기《법현전》에서 토로하고 있다. 동행했던 다른 승려들은 가기를 포기했고, 같이 파미르를 넘던 도정스님은 카라코룸산맥(K2봉)의 한 고개에서 숨을 거두기도 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법현법사는 몇 권의 경전을 더 번역하고 85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 법현법사가 인도에 도착, 아소카 궁전을 방문한 상상도.     © 매일종교신문

다음은 중국 북위(386-534)시대, 승관(僧官)이었던 송운(宋雲 생몰미상)은 혜생이란 스님과 함께 경전을 구하기 위해서 주로 서역(중앙아시아)과 북인도를 갔다 와서《위국이서11국사(魏国以西十一国事)》와《송운가기(宋雲家記)》를 남겼다. 송운법사는 인도본토에는 깊숙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오늘 날의 신장성, 중앙아시아, 이란과 북부인도 지역이었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파미르고원등지를 다니면서 경전을 구해서 북위로 가져왔다.
 
인도서역구법승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분은 현장법사이다. 현장(玄奘, 602-664)은 당나라 초기의 고승이며 역경승(譯經僧)이었다. 현장삼장은 당시의 한문 불교 경전의 내용과 계율에 대한 의문점을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의거하여 연구하려고 627년에 천축(인도)에 들어가 645년에 귀국하였다. 현장법사의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현장은 천축 여행의 견문기를《대당서역기》에 통합 정리하여 태종에게 진상하였다. 이 책은 당시의 인도나 중앙아시아(서역)를 알기 위한 제1급의 사료이다. 또한 문학적으로는 현장의 천축 여행을 모티브로 하여 명나라 시대에《서유기》라는 소설이 생겨났다.
 
현장은 출가한 후, 항상 법현법사의《불국기》를 읽으면서, 인도구법의 꿈을 키워오다가 627년에, 관부의 허가도 받지 않고 결행에 옮겨 천신만고 끝에 인도에 다다르게 된다. 인도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과 인도에서의 고행과 학업과정 그리고 인도의 이곳저곳을 순례하고 17년 만에 금의환향하게 되는 극적 스토리가 그의《대당서역기》에 잘 나타나 있다. 현장법사는 고비사막을 지나고 둔황 옥문관을 벗어나서, 하미 투루판 쿠처(고차)를 경유하여 천산남로의 오아시스를 따라서 가는 도중에 왕실의 공양도 받으면서 법문 요청도 받고 그곳에 계속 머물러 달라는 청을 받았지만, 머릿속에는 인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현장법사시대에 이르면 중국불교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인도불교의 신사상(新思想)을 수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현장법사가 지나간 천산남로의 오아시스 나라들은 소승(상좌부)이 우세했다. 현장법사는 카슈가르를 지나서 총령을 바로 넘지 않고, 천산의 베델고개를 넘어서 지금의 키리기스스탄의 이식쿨 호수를 지나고 페르시아(이란)의 영향아래 있던 현재의 우주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를 경과했다. 현장은 남쪽으로 향해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서, 3천명의 소승 비구들이 있는 사원에서 마하비바사(Mahāvibhāṣa 大毗婆沙論=논장)를 공부하고, 2001년 3월 8일과 9일 이슬람 국가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운 탈레반 정권에 의해 로켓탄으로 파괴되어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인 바미안 석굴사원에서도 머물렀다.
 
▲ 2001년 파괴되기 전의 바미안 석굴의 대불.     © 매일종교신문

현장법사가 지나가던 중앙아시아(서역)나 아프가니스탄 등지는 불교가 생생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때이며, 오아시스 타운마다 수천 명의 승려들이 수행하고 있었다. 현장법사는 인도에 다다르기 전에 서역의 여러 나라에서 날란다 사원대학에 가서 유학할 수 있는 예비과정을 마스터하고 현장법사는 카불을 지나고 카이버 고개를 넘어서 인도에 들어갔다.
 
▲ 파키스탄 쪽의 페샤와르로 내려가는 카이버 고개. 법현과 현장법사는 이 고개를 넘어서 인도 간다라에 들어갔다.     © 매일종교신문

현장법사 이야기를 하려면 몇 회에 걸쳐서도 부족할 정도이다. 이 글이 실크로드 기행이기에 이 정도 선에서 현장법사의 인도구법과정은 마무리하면서 다만,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공부를 마치고 중국으로 귀향하는 과정은 실크로드와 관련해서 상세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으나, 차회로 미루고자한다. 현장은 645년 약 17년간의 서역과 인도구법을 마치고, 파미르고원의 오아시스 읍성인 타쉬쿠르간의 석두성을 지나서 카슈가르에 도착, 천산남로를 택하지 않고, 곤륜산 루트를 따라서 호탄을 경유하여 둔황에 이르렀다. 현장이 중국을 떠날 때는 불법(不法) 출국이었지만, 귀국길은 그야말로 금의환향의 길이었다. 당조에는 그때 까지도 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 599-649. 재위 :626-649)의 치하에 있었다.
 
당 태종은 현장법사의 귀환 길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신하들로 하여금 호탄까지 가서 영접해오도록 명령하고, 현장법사가 장안(시안)에 이르자 궁궐 밖까지 나가서 귀국을 환영할 정도였다. 현장법사가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한역하도록 역경장(譯經場)을 설치하도록 했다. 신라출신 원측(圓測, 613-696)법사가 현장문하에서 역경에 참여했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배워온 신 불교학은 중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두고두고 동아시아 불교학 연구 방향에 분수령이 되었다. 하지만 현장법사에 의해서 세워졌던 불교학파(종파)인 법상종(法相宗)은 계속되지 못하고 말았다. 중국적인 학파와 종파(13종파)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주류종파인 선종불교(禪宗佛敎)도 중국의 13종파 가운데 하나이다.
 
▲ 당 태종 이세민.     © 매일종교신문
▲ 시안 대안탑(大雁塔)에 모셔진 삼장법사 현장 상.     © 매일종교신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는 삼장법사 현장의 17년간(629-645)의 구법 행적을 정리한 것이다. 현장이 구술한 내용을 제자 변기가 정리한 것인데, 현장의 사후, 646년에 완성되었다. 모두 12권 총10만 여자로 현장의 직접적, 간접적 경험들을 집대성한, 138개국의 풍토와 전설, 관습 등이 정리되어 있는 방대한 서적이다. 이 책으로 인하여 수백 명의 동아시아(한중일) 승려들이 서역과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나게 한 책이다. 또한 명대, 오승은(1500-1582)의 소설《서유기》를 탄생케 했다.
 
▲ 서역으로 불경을 가지러 떠나는 삼장법사 일행(서유기의 한 장면).     © 매일종교신문

서역인도구법승들 가운데서도 현장법사가 뛰어난 것은 그의 학승으로서의 업적이라고 하겠다. 구법여행기인《대당서역기》에 대한 사료적 가치뿐 아니라, 당시 인도 사상계의 최고의 학문전당인 날란다 사원대학에서 최신 학문과 사상을 배워서 중국에 도입했다는 점일 것이다.
 
현장의 불교사상은 법상종(法相宗)으로 대변되는데,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본적으로 다루는 불교철학(심리학)이다. 중국에서는 유식종(唯識宗), 유가종(瑜伽宗) 또는 자은종(慈恩宗)이라고도 불리었다. 법상종은 중국의 법상종과 한국의 법상종이 있고, 인도에서는 미륵(彌勒270-350)·무착(無着300-370)·세친(320-400)의 유가유식파에 기원한다. 인도불교의 유가유식파에 대응하는 중국·한국 또는 일본 불교의 종파는《십지경론》을 소의 논서로 하는 지론종,《섭대승론》을 소의 논서로 하는 섭론종과《성유식론》을 소의 논서로 하는 법상종으로 대별된다.
 
중국의 법상종의 시조는 현장의 제자였던 규기(632-682)이다. 한국의 법상종의 시조는 신라 경덕왕 때의 진표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원측(圓測: 613-696)은 현장에게 직접 사사하였으며 현장의 제자이자 중국 법상종의 제1조(祖)인 규기와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원측은 신라에 돌아오지 않고 당나라에서 입적하였는데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은 692년에 신라로 귀국, 원측의 유식학을 신라에 전했다. 원측과 그 제자들에 의해 유식학 연구가 시작되었다.이런 학풍은 현금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현장 이후, 수많은 서역인도구법승들이 있는데, 이런 자료는 의정(義淨, 635-713) 법사에 의해서이다. 의정법사는 당나라 때의 학승으로 37세 때 광주를 떠나 수마트라·팔렘방 등을 거쳐 인도에 갔다. 의정법사는《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서 당시의 유학승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는데, 신라출신의 인도유학승 명단도 있다. 의정법사는 육상 실크로드가 아닌 해상실크로드를 통해서 동남아 인도구법여행을 떠난 분이이어서 차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신라출신의 혜초(704-787)는 신라 성덕왕 때의 고승으로, 787년에 중국의 오대산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입적하였는데, 그의 인도기행문인《왕오천축국전》이 1908년 발견되어 동서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혜초법사가 언제 중국으로 건너갔는지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나, 혜초는 20대(723년경)에 당나라의 광저우로 가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수마트라와 스리랑카를 거쳐서 인도에 들어가서 구법여행을 하고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인 서역 등지를 둘러보고,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미르 고원 부근의 와한 계곡을 지나서 지금의 신장성 카슈가르에 도달했고, 천산남로 오아시스 나라인 쿠처를 지나서 투루판과 옥문관을 지나고 둔황을 거쳐 장안으로 귀환하여《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혜초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이슬람 문명권을 다녀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 현장법사와 혜초법사가 지나간 파미르고원의 오아시스 읍성 타쉬쿠르간의 여름풍경.     © 매일종교신문

이제 파미르고원 이야기로 돌아가서 마무리를 짓자. 파미르고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카슈가르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는 길 밖에 없다. 옛날 구법승들은 순전히 도보로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중국정부에서는 지금 카슈가르에서 파미르고원 계곡에 수십 미터의 교각을 세워서 포장도로를 내고 있었다. 파미르고원에 이르면 구소련이 건설한 파미르 하이웨이와 연결된다. 2-3년 내면 자동차로 쉽게 파미르고원에 이르게 되는데, 그 옛날 구법승들이 넘었던 파미르(총령)의 맛은 나지 않을 것 같다.
 
현재 타쉬쿠르간은 신장성 타지크 자치현이다. 타쉬쿠르간 타지크 자치현은 쿤룬 산맥, 카라쿤룬, 힌두쿠시 산맥과 톈산 산맥,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과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 접해 있다. 중심지는 옛날 읍성 석두성이 있었던 타쉬쿠르간인데, 남북길이 178km, 동서 140 km이다. 인구 4만 명의 타지크인들이 살고 있다. 타지크인들의 조상은 박트리아인으로서 이란계로서 3천만 명 정도 되는데,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타지키스탄이란 독립국을 갖게 되었지만, 아프가니스탄에 사는 타지크인이 더 많다.
 
▲ 카슈가르의 구시가지 위구르족들의 중심지에서 소수민족들의 축제가 열리고 있다     © 이치란

파미르 고원은 너무나 험한 곳이었다. 카슈가르에서 타쉬쿠르간으로 갈 때에는 버스도 자주 없었다. 승객이라야 20명 정도 타는 미니 버스였는데, 언제 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수 시간을 터미널에서 기다리다가 겨우 버스를 탈수 있었고, 가는 길은 정말 험한 길었다. 나는 이 파미르(총령)를 넘으면서 서역인도구법승들의 신심과 의지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고원의 오아시스 타운인 타쉬쿠르간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나 평화로운 이상향이었다. 여기서 계속 서남진하면 파키스탄에 이르게 된다. 또한 이 지역은 중국령 신장성 자치구이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란계의 타지키스탄인들이다. 이곳에서 타지키스탄으로 연결되는 버스가 있고, 아프가니스탄의 와한 계곡과도 연결된다. 실크로드시대에는 와한 계곡은 타림분지의 오아시스와 인도와의 통로였다. 신라출신 혜초법사도 이 와한 계곡을 넘어서 파미르고원에 이르고 카슈가르를 경유하여 쿠처를 거쳐서 둔황에 닿았다. 서양의 선교사들도 이 계곡을 넘어서 파미르고원을 지나서 타림분지와 몽골제국(중국)에 도달했다고 한다. 
 
▲ 혜초법사가 통과한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에 있는 와한 계곡.     © 매일종교신문

필자는 15여 년 전에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서 길기트까지 가봤기에 일단 멈춤을 하고 카슈가르로 돌아왔다. 타쉬쿠르간이나 카슈가르는 중국식으로 재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머지않아서 중세적인 모습과 전통은 곧 사라질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계속)
(이치란 해동 세계 불교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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