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의존성

이옥용 | 기사입력 2016/11/04 [15:07]
인간에게 필요한 건 의존성 아닌 ‘自存性’

의존성

인간에게 필요한 건 의존성 아닌 ‘自存性’

이옥용 | 입력 : 2016/11/04 [15:07]

▲ 요단강가에서의 필자     © 매일종교신문

인간에게 필요한 건 의존성 아닌 ‘自存性’
 
존경하던 종교지도자와의 대담을 정리한 첫 번째 글 ‘성경의 하나님, 현실의 하나님’에 이어 두 번째 글 ‘인간에게 필요한 건 의존성 아닌 자존성’을 옮겨 적습니다. 기존의 인식과 다른 면이 많습니다. 판단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깁니다.(편집자주)
 
‘세월호참사’에 이어 ‘최순실게이트’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또다시 절망의 늪에 빠뜨렸다. 대한민국은 세계인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어찌하여 이런 충격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 두 사건의 특이점은 원인제공자가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종교지도자들이 신도들을 자신에게 의존케 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샤머니즘과 사이비종교는 물론 고등종교도 모양만 다를 뿐 내용에 있어서는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을 신과 종교의 하수인으로 만들어 자신들이 이용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유난히 종교인 중에 ‘의존성인격장애자’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존’ 조장하고, ‘삶’ 간섭하는 종교
 
종교인들의 의존성인격장애는 ‘신과 종교지도자로부터 위로받고 보호받고자 이들에게 매달리고, 자신의 의존욕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봐 불합리한 요구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다. 자신을 무력하다고 생각하여 자기주장을 잘 펴지 못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도 못한다. 신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의존하여 끊임없이 지지와 격려를 바라며 복종한다. 정신적 어린아이다.
 
이런 장애를 가진 종교인은 자신이 의존하는 믿음의 대상과 함께 있을 때에는 활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 되면 자신감을 잃고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다. 의존할 수 없게 될까 봐 불안해한다.
 
기독교는 어떻게 신도들을 기독교에 의존하게 만들까.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원죄(原罪)를 가진 존재’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해 죄를 짓게 됐는데, 이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 원죄를 가지고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죄로 인해 인간은 힘든 노동을 하게 됐으며, 고통과 죽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원죄는 인간의 생명을 더럽히는 모든 유죄(有罪)의 근원이 되며, 유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는 인류 구원의 열쇠를 유일하게 예수가 쥐고 있다고 가르친다. 예수는 자신은 구원자이며, 자신에게 오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권면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3:16),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타락한 인간(죄인)은 구세주 예수를 믿고 의존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존성(自存性)’이라는 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하나님의 가장 특징적인 속성을 표현하는 말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주장일 뿐 의식 있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미숙한 사람을 하나님의 우리에 가두어 하수인으로 부리기 위한 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존성=타락성
 
기독교의 하나님을 성경 밖에서 살펴본다.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말은 자기의 권위를 높여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의존케 하기 위한 수단이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는 말은 인간들의 자신에 대한 의존성을 높이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능력이 있고,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야 인간들이 의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없다면 인간이 존재조차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의존할 근거가 없다.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거역자들을 무참히 도륙한 것도 그 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유일신’이라는 말은 자기 외에는 없다는 말이다. 자기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런 것이 기독교의 신 하나님의 생존수단이다. 사기치고, 거짓말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신을 통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 또한 인간을 이롭게 해 준다고 말은 하지만, 나중에는 해롭게 하는 존재다. 말뿐이기 때문이다. 신-종교지도자-신도의 관계는 서로 이용하려는 공존관계다.
 
독송이나 기도, 예배 등의 종교적인 행위는 자기최면이 되어 일시적으로 위안이 될 수는 있으나, 의존성에 매여 자기 영혼을 성숙하지 못하게 한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이 된다. 인간은 자연의 기운과 법칙에 의해 생존한다. 기운을 받게 해준다, 복을 받게 해준다, 구원해 준다는 것은 사기꾼의 말이다. 이런 것들을 받으려면 마음가짐과 생활이 올바라야 한다.
 
신앙인이 신앙의 대상에게서 벗어나면 마음이 허전해진다. 약물중독자의 금단현상 같은 것이 온다. 정신이 어리고 약하기 때문이다. 의존성을 버려야 독립할 수 있고, 철이 들고, 성숙한 길로 갈 수 있다. 인간에게 해로운 것들(신과 귀신)은 의존성 있는 인간을 필요로 한다.
 
진리인 자연법칙이 종교 위에 있어야 하지만, 종교가 자연법칙 위에 올라앉아 종교에 진리가 있다며 안하무인이 되어 만사형통집단인양 행세하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종교가 인간에게 해롭지 않은 부분도 있으나 의존성을 강하게 만드니, 결국엔 해롭다. 종교의 욕심은 ‘인간을 주관 하겠다’는 것이다. ‘종교의 울타리에 가두어 하수인으로 부리겠다’는 것이다. 종교 배후에 있는 신과 귀신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음이다. 의존성을 버려야 자존성이 생긴다. 인간이 철없음과 허황됨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신과 종교, 인간과 물질과 쾌락 등에 대한 의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善)은 자연법칙을 알고, 인간과 동식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다. 마귀는 인간의 의존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을 의존케 하는 신은 곧 마귀다. 종교가 인간의 타락성인 의존성을 조장하고 있다. 인간의 자연성인 자존성을 말살하고, 타락성인 의존성을 심어 키워주려고 한다. 자연의 법칙에 반하는 교리를 내세워 인간을 비하하며, 자기 종교의 신과 교주의 우월성을 내세워 인간을 종교에 의존하게 만들려고 한다. 인간은 종교의 늪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의 법칙은 심은 대로 거둔다.
 
의존적이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는 자주적인 존재가 아니다.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면, 그 존재를 떠나면 그의 존재의미가 없어진다. 인간은 신은 물론 다른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의존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지상과제- ‘홀로서기’
 
신과 귀신은 인간과 상극이다. 인간이 신과 귀신에게 의존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인간은 신과 귀신을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 신과 귀신은 생각의 존재다. 인간과 함께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혹한다. 인간과 같이해야 실감이 나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면 무기력해진다. 인간이 받들고, 인간을 움직여야 느낌을 맛본다. 신과 귀신이 거짓말하고, 수단방법을 쓰는 것은 인간과 같이 하기 위함이다. 말로만 한다. 성경에서처럼 말로는 못할 것이 없다. 신과 귀신은 아무 능력이 없다. 인간의 행적과 심리를 알고 이용할 뿐이다.
 
조물주는 신이 아니다. 다만 조물주일 뿐이다. 조물주는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다. 자존하는 분이다. 자신의 존재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인 독립성을 지닌 존재다. 이러한 조물주에 의해 태어난 인간도 조물주처럼 자존해야 한다. 조물주에게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 자연을 보라. 자존하지 않는 것이 없다. 자존하는 존재는 당당하다. 인간에게 필요한 건 의존성이 아니라, 자존성이다. 의존하는 존재는 자기의 정체성이 없다. 자유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다.’
 
자존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고생하고, 실수하고, 깨달아 후회할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 위치와 분수를 알고 사는 것이 인간의 순환법칙이다.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는 ‘자연의 순환을 막는 것(의존케 하여 이용하는 것)’이고, ‘의존하는 것’이다. 저녁이 오면 아침이 오듯이 이 과정에서의 희생은 조물주로서도 어찌 할 수 없다. 인간의 삶에 조물주가 관여하게 되면 인간이 의존성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신의 젖을 받아먹고 살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이 제2조물주가 되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고, 주관 받아서는 안 된다.
 
인생의 정석은 의존성을 버리고 자존성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적이어야 한다.
죄의 뿌리는 의존성이다. 남에게 의존하여 수고하지 않고 먹고, 갖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과 세상의 불행한 일은 모두 의존성 때문이다. 조물주는 자연의 기운과 자연법칙으로 존재한다. 조물주는 간섭하지 않는다. 인간은 조물주의 자연의 기운과 자연의 법칙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은 물론 세상도 인간이 다스리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노력하여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상엔 인간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고 된 것은 없다. 조물주가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간섭하면 인간이 철들 수 없고, 우주질서가 무너진다. 조물주는 인간이 자존하며 살게끔 다 해놓았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복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조물주는 그런 것을 할 수 없다. 전체를 보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어진 환경을 더듬어 찾아나가야 한다. 조물주에게 특별한 인간이란 없다. 인간은 죽을 길을 가는지, 살 길을 가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의 지능이 점차 신과 귀신들보다 높아가고 있다. (매일종교신문 회장) 
 
 
 
 
 

 
 
  • 도배방지 이미지

이옥용 '和平書信' (5분) 유트브 영상 많이 본 기사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