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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㊱인도 촐라 제국이 스리랑카, 동남아에 미친 영향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09/05 [08:27]
남인도의 장수 제국, 1600년간 존속한 타밀라캄 맹주 중국과 교역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㊱인도 촐라 제국이 스리랑카, 동남아에 미친 영향

남인도의 장수 제국, 1600년간 존속한 타밀라캄 맹주 중국과 교역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09/05 [08:27]

남인도의 장수 제국, 1600년간 존속한 타밀라캄 맹주 중국과 교역

 

인도네시아가 한때 불교가 강세였으나, 남인도의 맹주인 촐라 제국에 한 방을 먹고 휘청거렸지만, 결정타는 이슬람에 당하고 말았다. 촐라제국은 그나마 힌두 왕국이었기 때문에 친불교적이었다. 그렇지만 이슬람은 달랐다. 싹쓸이 정책을 써서 불교의 씨를 말리고 말았다.

▲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탄자부르 힌두사원.

 

촐라제국은 힌두교를 강하게 추종했다. 팔라바와나 판디아 왕조의 왕들처럼 불교와 자이나교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불교나 자이나교를 박해한 것은 아니다. 촐라의 왕들은 시바 신에게 헌정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사원을 지었지만, 그들이 단지 극단적인 시바주의자이거나 다른 종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촐라의 두 번째 왕은 시바와 비쉬누파에 치우치지 않고 양파의 사원을 건축하는 데에서 초종파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촐라왕국의 최전성기인 11세기 무역루트와 동남아의 종속국가 지도   

 

현재는 인도 불교가 소수종교로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만, 한동안은 인도불교는 막강했었고, 자연스럽게 남인도는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고대 남인도는 촐라국, 팔라바국과 빤댜국이 정립하면서 발전해 왔다. 촐라국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279년까지 남인도의 타밀라캄 지역에 존재하던 타밀계 왕국이다. 촐라왕국은 스리랑카와 밀접한 관련 속에 역사를 함께 해 왔다. 이로써 촐라제국의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담론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 한나라의 역사서를 쓴 동한(東漢)의 반고(班固 32〜92).   

 

▲ 《한서(漢書)》는 후한 때의 역사가 반고가 썼다.

  

촐라국은 9세기 후반부터 촐라 제국으로서 다시 부활하여 13세기 초까지 남아시아 남부에서 동남아시아까지 세력을 떨치는 해상 제국으로서 번영하였다. 특히 스리위자야의 막강한 해군을 격파하고 남아시아·동남아시아에서 최강의 해상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1010년부터 1153년까지, 촐라 제국은 남쪽으로는 몰디브와 스리랑카, 북쪽으로는 안드라프라데시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스리랑카 섬의 아누라다푸라 왕국과 인도양의 몰디브 제도를 정벌하였으며, 갠지스강 유역과 동남아시아의 스리위자야를 정벌하였다.

▲ 왕회도(王会图)에 묘사된 인도(촐라국)에서 온 대사(大使). 기원후 650년.   

 

촐라제국은 일찍이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기원전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한시대의 역사가인 반고는 한서에서 한나라가 인도 촐라족의 궁정에 대사를 보냈다고 말했다. 촐라는 대외 무역과 해상 활동에 뛰어났으며 해외에서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영향력을 확장했다.

 

8세기경 인도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아리아바타(476550)의 천문과 수학이론이 중국어로 번역됐다.

▲ 인도의 천문 수학자 아리아바타.  

  

천문 점성술서인 개원점경(開元占經)또한 중국어로 한역됐다. 이런 인도의 천문 수학 책을 번역한 사람은 고오타마 시다인데 그의 조상은 본래 인도 출신으로 오랫동안 장안에서 살아왔는데, 그는 나바그라하를 한역하기도 했다.

▲ 인도 점성술의 9개의 천체. 

 

나바그라하는 인도 천문학과 인도 점성술에서 언급되는 9개의 천체와 그들을 신격화한 신을 가리킨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구요성(九曜星)으로 한역되었다. 태양과 달을 포함 5곳의 행성 즉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과 백도와 황도의 교점인 승교점의 나후와 강교점의 계도를 합한 9곳을 이르는 말이다.

 

9세기 말경, 인도 남부는 광범위한 해상 및 상업 활동을 발전시켰다. 남부 인도 길드는 지역 간 및 해외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남인도 상인 길드(협회)를 동남아시아와 중국으로의 확장을 촉진했다. 인도 반도의 서부와 동부 해안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 촐라는 이러한 모험의 최전선에 있었다. 중국의 당나라, 샤일렌드라의 스리위자야 제국이 주요 교역 파트너였다.

 

촐라 왕조의 시장 구조와 경제 정책은 중국 송 왕조가 제정한 것보다 대규모 지역 간 시장 무역에 더 유리했다. 촐라제국의 기록은 외국 무역에 참여하는 이유를 알려주고 있다. 송나라 보고에 따르면 1077년 촐라의 사절이 중국 궁정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에 대사관설치는 무역 사업을 위해서였으며 방문객들은 유리와 향신료를 포함한 공물 물품과 교환하여 구리 동전을 가지고 돌아갔다.

▲ 촐라 왕조의 옛 수도였던 티루바루르에서 힌두 축제가 열리고 있다.    


최근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탄자부르, 티루바루르와 푸득코타이 등지에서 중국 고대의 동전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와 중국, 주로 수마트라와 태국 반도에서 발견된 타밀어와 문자로 작성된 여러 중세 비문. 이 텍스트는 인도 남부와 동남아시아 및 중국의 특정 지역 사이의 무역 연결에서 직접 생겨났으며, 여기에는 타밀어를 사용하는 인도인의 거주 지역이 포함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해외 타밀어 비문 중 일부는 잘 알려진 중세인도 상인 협회를 언급하고 있다.

 

21세기 현대 불교는 상좌부권인 동남아시아와 스리랑카, 대승불교권인 중국 한국 일본의 동아시아와 베트남, 그리고 티베트 불교권인 히말라야와 몽골이 불교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불교는 아시아를 넘어서 서구권에까지 전파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 인도 불교도 다시 부흥하고 있다.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는 남북방으로 확장되었다. 현재 인도불교는 남북과 티베트로 전개되었던 불교가 다시 인도로 돌아온 것이다. 불교백화점 같은 현상을 목격하려면 붇다가 대각을 성취했던 비하르 주의 보드가야에 가면 한눈에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인도 보드가야 보리수 금강보좌에서 베트남 스님과 조우,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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