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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㊲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 정체성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09/12 [07:29]
인도불교 승가 공동체 원형성 유지 보존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㊲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 정체성

인도불교 승가 공동체 원형성 유지 보존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09/12 [07:29]

인도불교 승가 공동체 원형성 유지 보존 

 

세계불교는 3대 가족으로 분화되어 있다. 엠티브이(MTV)라고 말한다. 불교 역사 26백 년사에서 불교는 외형적으로는 3대 패밀리인 상좌부(上座部) 마하야나(대승) 바즈라야나(金剛乘)로 분립됐으며, 5대양 6대주에 확장되었다. 상좌부는 현재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스리랑카에, 대승불교는 동아시아와 베트남, 바즈라야나는 티베트와 히말라야 국가들과 몽골. 중국 러시아에 분포되어 있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는 불교의 3대 가족이 다 전파되어 있다. 대승불교가 주류인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종파불교로 세분화되어 있어서 인도의 대승불교와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 상좌부 불교 전통의 가장 핵심인 탁발을 하고 있는 바구들. 

 

앞으로의 담론은 주로 동남아시아 불교인 상좌부 전통을 리서치하면서 소개할 예정이다. 또한 현재의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 전통이 스리랑카에서 확장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담론을 전개해 가려고 한다. 그렇다면 상좌부 불교란 어떤 역사적 배경과 정통성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정착하게 된 연유에 대한 과정 즉 확장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테라와다(theravada)장로들의 길이란 의미인데, 쉽게 말하자면 부처님 당시부터 전해오는 불교의 모습을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승가 공동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좀 더 학술적으로 말한다면 빨리어 경장(經藏)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원리원칙대로 고수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한다. 빨리어는 부처님이 직접 사용했던 언어이면서 상좌부 전통에서는 링구아 프랑카이다.

 

그러므로 상좌부 전통에서는 빨리어가 링구아 프랑카로서 동남아시아나 스리랑카에서 불교 수행이나 연구는 빨리어가 경전어(經典語)이다. 빨리어 경전은 상좌부의 신성한 언어이자 링구아 프랑카 역할을 하는 고전적인 인도 언어인 빨리어로 남아 있는 것이다. 테라와다(상좌부)는 대승(Mahāyāna)및 바즈라야나(Vajrayāna, 금강승)와 대조적으로 교리와 수도원 규율 문제에서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

 

현대의 상좌부는 인도의 스타위라 니까야(상좌부)의 한 분파인 비바자와다(분별설부,分別説部)전통의 스리랑카 분파인 마하위하라(Mahāvihāra, 大寺) 교단에서 파생됐으며, 이 전통은 기원전 3세기부터 스리랑카에서 확립되기 시작했다. 빨리어 경전이 편집되고 문헌이 발전한 곳은 스리랑카였다. 스리랑카에서 테라와다 마하위하라(Theravāda Mahāvihāra) 전통은 이후 동남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으로 퍼졌다. 불교는 스리랑카, 미얀마, 캄보디아에서는 국교나 다름없으며 라오스와 태국에서 상좌부 불교는 지배적인 종교이다.

▲ 미얀마 바간 왕국의 수도인 바간에 11세기와 13세기 사이에 10,000개 이상의 사원, 탑, 수도원이 바간 평원에 건설되었다. 

 

비록 불교가 인도에서 성립했지만, 현대의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는 스리랑카에서 성립된 마하위하라(大寺) 파의 분별설부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분별설부는 거슬러 올라가면 인도 불교의 스타위라 니까야 즉 상좌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는 13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실론(스리랑카) 상좌부의 전통이 확장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동남아시아에는 인도에서도 상좌부가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아니었지만, 정착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13세기 실론 상좌부가 미얀마와 태국에 본격적으로 확장되면서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된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실상 11세기부터 인도 촐라제국 시대에 실론 불교가 미얀마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 650년 중국의 《왕회도》에 그려진 스리랑카의 사절. 오른쪽에 사자국(獅子國)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사자는 오늘날에도 스리랑카의 상징이다.  

 

남인도의 촐라에 의해 아누라다뿌라 왕국이 멸망한 뒤인 1056년 싱할라인들의 두 번째 왕국인 폴론나루와 왕국이 세워졌다. 폴론나루와 왕국은 판디아 내전에 간섭하여 남인도에 거점을 마련하였으며, 1165년부터 1180년까지 미얀마에 원정군을 파견하면서 상좌부 불교를 전파하였다. 이전까지 촐라의 영향력 아래 힌두교를 신봉하던 미얀마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은 이때부터 불교가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불교는 어떻게 보면 중세시대인 11세기에서 15세기의 실론 불교 전통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현재의 스리랑카 불교는 중세시대부터 지속된 실론 불교 전통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16세기 벽두부터 들이닥친 유럽 제국주의는 불교를 쇠퇴하게 만든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실론 불교는 승단이 무너지고 급기야는 계맥(戒脈)이 단절되고 만다. 지금의 스리랑카 승가는 태국과 미얀마에서 역수입한 계맥에 의해서 승가를 재건했다.

 

상좌부 불교의 특색은 빨리어라는 경전어(經典語)와 계맥(戒脈)이다. 상좌부를 지탱하는 양대 기둥이라고 하겠다. 빨리어 대장경이라고도 하는데, 빨리어로 씌어진 불교 경전의 총칭이다. 빨리(Pali)라는 말 자체가 빨리삼장(Tipiṭaka)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전적으로 빨리 문헌은 빨리, 즉 삼장과 앗타까타(aṭṭhakathā), 즉 주석서 둘로 분류하기도 했다.

 

빨리어는 본래 서부 인도의 평민계층에서 쓰던 속어(俗語)이다. 고오타마 붓다는 상류계층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범어)가 아니라, 이 평민계층의 언어인 빨리어로 설법하였다. 고타마 붓다의 입멸(入滅) , 원시불교의 교단이 서부 인도로 확대됨에 따라 성전(聖典) 기록용 언어가 되었다.

▲ 태국 승가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구계 의식.   

 

불교는 기원전 3세기경 아소카왕 시대에 마힌다에 의해 스리랑카에 전해졌다. 이후에 이 전통은 미얀마·타이·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이른바 남방 불교를 형성하였다. 이 계통을 상좌부(上座部)라고 하며 부파 불교중에서 삼장(三藏)을 완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은 빨리 삼장(三藏, tipitaka)뿐이다. 삼장 이외에도 시대에 따라서 많은 강요서(綱要書) ·주석서·사서(史書) 등이 빨리어로 만들어졌고, 이들을 일괄하여 장외(藏外)라고 부른다.

 

우리가 상좌부라고 부르는 것은 이 빨리삼장을 정경(正經)으 삼고 있으며, 삼장은 경율론(經律論)으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율장(律藏)은 승단운영의 규율로써 윤리적 헌법이 된다. 대승불교인 동아시아에서는 계맥보다는 법맥(法脈)을 더 중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현대 세계불교는 3대 패밀리로 분화되어 있다고 했는데, 계맥의 계승에 있어서도 율장 전통이 조금 다르다.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담마굽타카(법장부)의 사분율(四分律), 티베트 불교권에서는 근본설일체유부의 율장전통을, 상좌부는 근본 율장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담론의 핵심을 스리랑카의 불교가 어떻게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는가를 집중해서 추적해 보자.

 

오늘날 인도의 원형불교 승가가 유지되고 있는 주류 상좌부는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이다. 물론 스리랑카 불교가 인도불교의 계승자이긴 하지만, 지금 21세기의 스리랑카 승단은 태국과 미얀마에서 역수입한 승단 전통이란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얀마 불교가 바로 인도-스리랑카로 계승된 불교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주류 적통으로 봐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리랑카 불교사에서 폰론나루와 불교에 주목해야 한다.

 

섬 나라 실론은 아누라다뿌라가 인도불교의 센터 역할을 했다. 아누라다뿌라에 전해진 인도의 원형불교는 천 년 이상 상좌부의 적통성을 유지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기원후 5세기부터 11세기 까지 약 6백 년 간은 왕실 권위가 약화되면서 남인도의 침입을 자주 받게 된다.

▲ 카샤파 왕(477〜495)이 방어에 완벽을 기할 수 있는 새로운 수도로 건설한 바위 요새이자 도시인 시기리야(사자 바위). 수도가 아누라다뿌라로 다시 옮겨진 후, 불교 수도 사원으로도 사용되었다. 

 

남인도 왕조인 촐라, 팔라바와 판디아는 조그마한 섬 나라 왕조를 수시로 괴롭게 하면서 피곤하게 만들었다. 남인도 왕조는 불교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힌두교를 왕실 종교로 간주했기 때문에 때로는 불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남인도 불교는 말살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나마 불교라는 종교적 문화적 고리로 연결되었던 스리랑카와도 적대관계가 되었다.

 

남인도 힌두왕조와의 갈등의 시대는 스리랑카 불교 사원(수도원)의 약탈을 당했고, 종종 불교의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불교 문화, 예술 및 건축의 확장도 보았다. 9세기까지 불교 수도원은 재산, 토지, 재산 및 관개 시설을 소유한 강력한 기관이었다. 그들은 왕으로부터 이러한 영지를 부여받았고 일반적으로 영구히 보유했다. 스리랑카 역사의 이 단계에서 불교 수도원은 기본적으로 싱할라 왕의 보호를 받는 자급자족 경제 단위였다.

 

세나 1(833~853)와 마힌다 4(956~972)의 통치 사이에 아누라다뿌라 시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여러 왕의 거대한 건축 노력을 보았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촐라 제국(993~1077)이 아누라다뿌라 중심부를 침공하고 정복했는데, 이 전쟁은 아누라다뿌라를 황폐화시키고 왕국을 종식시켰다. 폴론나루와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 크코리아 대표>

▲ 양양 낙산사 템플 스테이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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