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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㊵ 자야와르만 7세와 캄보디아 상좌부 불교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10/03 [09:45]
실론 상좌부 승가 전통 그대로 캄보디아에 전해져, 현재까지 캄보디아에 존속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㊵ 자야와르만 7세와 캄보디아 상좌부 불교

실론 상좌부 승가 전통 그대로 캄보디아에 전해져, 현재까지 캄보디아에 존속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10/03 [09:45]

실론 상좌부 승가 전통 그대로 캄보디아에 전해져, 현재까지 캄보디아에 존속

 

13세기 상좌부 전통 이전의 캄보디아 종교는 힌두-불교 혼합형이었다. 그런데 자야바르만(11811215) 7세가 등장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그는 앙코르 왓 사원을 불교 전용 사원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 웨삭의 날(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축제를 벌이고 있는 미국 플로리다 캄보디아 사원.   


그러므로 힌두 왕에게 바치는 헌공은 생략하고 공양은 바로 불교의 비구(승려)들에게 하는 일상이 전개됐다. 이런 승가의 일상은 실론에서 전해 왔다. 신왕(神王)이라는 힌두교의 관념에서 불교의 승려의 개념으로 관점이 전환되면서 힌두 전통에서 불교 전통으로 완전히 바뀌는 종교혁명이 연출되었다. 이와 같은 국교로의 전환은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왕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국민들에게도 엄청난 가치의 변화였다.

 

엘리트 브라만의 사회 공동체에서 평범한 비구의 사회로 전환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야바르만 7세의 심적 변화와 종교 성향의 급변때문이었다. 따라서 힌두의 사제들을 위한 사원이 아니라 불교사원과 불교 승려들인 비구들을 위한 건축물이 새로 지워졌고,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관점이 바뀐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사회적 변화의 결과로서 자야바르만 7세 왕은 그의 아들 타말린다(Tamalinda)를 스리랑카로 보내 불교 승려로 구족계를 받게 하고 빨리 경전 전통에 따라 상좌부 불교를 공부하도록 했다. 왕자 타말린다는 캄보디아로 돌아와 그가 받은 테라와다 불교와 승가전통을 홍보하였고, ​​수 세기 동안 앙코르 제국 전체에 존재해 온 오랜 테라와다 존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전에도 테라와다 전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타말린다 비구의 활동을 계기로 실론 불교 전통의 상좌부(테라와다)가 국교화되면서 크메르(캄보디아)는 테라와다 불교가 되었다. 

 

타말린다 왕자는 마하비하라(大寺)에서 1180년에서 1190년까지 10년간 공부했다. 마하비하라는 실론 불교의 총본산이었다. 기원전 3세기에 인도에서 전파된 인도의 원형 불교는 천년이 넘도록 역사와 전통이 쌓였다. 그런데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는 남인도의 타밀족과 전쟁을 하면서 불교가 타격을 입었다. 오죽하면 비구계를 줄 계사(戒師)가 없어서 동남아에서 비구를 수입해 와서 계맥을 잇는 상황까지 전개된 적이 있었다. 2백여 년간 실론 불교 승가는 확고하게 강화되었고, 오랜 전통과 역사에 걸맞는 상좌부 불교로 확립된 것이다. 실론불교의 강점은 바로 빨리 경전이다.

▲ 오스트로아시아어를 사용하는 몬-크메르 지도. 

 

캄보디아의 타말린다 왕자가 실론에 갔을 때의 상좌부 불교 승가는 절정을 이루고 있었고, 불교 연구 또한 최고조에 달했다. 이로써 테라와다(상좌부)불교는 회복력을 발전시켜 불교계 전체에 르네상스를 일으켰고 결국 버마, 치앙마이, 몬 왕국, 란나, 수코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전역으로 퍼졌다.

 

13세기에 시암, 버마, 캄보디아, 스리랑카의 몬-크메르어 사용 지역에서 온 유행(遊行) 승려들이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타말린다 왕자가 10년의 실론에서의 수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는 테라와다 정통을 주장하고 탄트라 수행과 같은 대승 혁신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대승불교나 밀교적 성향의 불교 전통을 배격하고 실론 상좌부 정통성을 확보하면서 실론 불교를 확장시켰다.

 

크메르 사회에서 테라와다 불교로의 대규모 개종은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비폭력 혁명에 해당했다. 학자들은 크메르 문명의 이 갑작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테라와다불교는 포용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성공했으며, 엘리트와 궁정뿐만 아니라 마을과 농민 사이에서 제자와 승려를 모집하여 크메르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높였다.

 

앙코르 이후 시대는 동남아시아에서 빨리 상좌부 전통의 극적인 성장과 함께 브라만과 대승불교 종교 전통의 쇠퇴를 보았다. 1423년 태국의 스리랑카 불법전교에 대한 기록에는 싱할라족의 정통 마하비하라(大寺) 종파를 캄푸치아로 다시 가져온 8명의 크메르 승려가 언급되어 있다.

 

승려들은 사원 계율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왓(사원)이 불교 본래의 종교적 도덕적 수행이나 신행(信行)뿐 아니라. 사원을 교육, 사회봉사 및 사람들을 위한 문화 센터로 발전시켰다. (사원)은 학습과 대중 교육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초기 서구 탐험가, 정착민 및 선교사들은 버마, 태국, 캄푸치아, 라오스 및 베트남의 남성 인구 사이에서 광범위한 문맹 퇴치를 보고했다. 이것은 사원에서 교육을 받은 결과였다. 19세기까지 문맹률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럽을 능가했다. 캄푸치아에서 불교는 크메르 언어와 문화의 전달자가 되었다.

▲ 고오타마 부처님의 일생. 캄보디아. 18세기. 프랑스 툴롱 아시아 미술관.    

  

캄보디아의 서쪽은 시암(태국)과 동쪽의 베트남의 부상으로 고전 앙코르 제국은 사라지고 현재의 캄보디아가 시작되었다. 캄보디아는 이때부터 불교 국가가 되었다. 이로써 캄보디아 불교는 실론 불교 불교의 복사판이었다.

 

캄보디아는 물론 태국의 승려들은 실론에 직접 가서 비구계를 받는 것을 선호했다.

▲ 3백 년 간(1292년~1578년) 존재했던 란나 왕국.    

 

란나 왕국의 연대기는 15세기에 캄보디아와 스리랑카 사이의 문화적 연결에 대해 설명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열반 이후, 1967년이 지난 다음 캄보디아의 마하나나싯디가 이끄는 8명의 승려와 태국의 나비스푸라 출신의 25명의 승려가 싱할라 마하테라(고승)의 손에서 비구계를 받기 위해 스리랑카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론의 역사서인 쭐라왕사小史4세기부터 1815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마하왕사 大史에 이어서 기술한 연대기이다. 이 사서에 따르면 실론과 동남아시아의 외교관계와 불교 교류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면 강성했던 앙코르 불교는 왜 사라졌는가?’이다. 앙코르가 밀림 아래로 무너지면서 테라와다 캄보디아의 세력의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프놈펜에 정착했다. 프놈펜은 원래 메콩강과 톤레 샵 강이 만나는 작은 강변 시장 중심지였다.

▲ 프랑스국립극동연구원(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EFEO)은 아시아 연구를 위해 설립된 프랑스의 연구기관이다. 1900년(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하노이에 설립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역사 박물관이 되었다. 

 

▲ 캄보디아 탄트릭 불교를 연구한 프랑스와 비조. 

 

프놈펜은 홍수 기간동안 코키 나무가 강에 떠 있는 "네 얼굴의 부처"를 레이디 펜이 발견했을 때 설립되었다. 그녀는 불상을 되찾았고 불상을 보관할 프놈 왓(사원)을 건축했다. 사면불(四面佛)은 크메르 불교 도상학에서 중요하며, 종종 캄보디아의 부처 왕과 동일시되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왕국의 건국을 의미한다. 중세 캄보디아에서 행해진 불교 유형은 프랑스 국립극동연구원의 프랑스와 비조 교수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널리 연구되었다. 그들은 이 전통에서 밀교적인 난해한 요소를 확인했고 따라서 그것을 "탄트라 상좌부"라고 부른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코리아대표>

▲ 지리산 청학동 박단사 혜민스님과 청학서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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