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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특집 기획] 고려인 마을 "뿌리를 찾아서"

강은희 | 기사입력 2023/04/01 [07:39]
"다문화"는 함께 모여 "더 문화"가 되는 것이다!

[다문화 특집 기획] 고려인 마을 "뿌리를 찾아서"

"다문화"는 함께 모여 "더 문화"가 되는 것이다!

강은희 | 입력 : 2023/04/01 [07:39]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을 지켜 온 대한민국도 점점 다문화 사회로 전환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세계 1일 생활권이 가능해지고, 취업, 이민, 여행 등 세계가 하나의 사회체계를 이어가며 다문화는 또 하나의 문화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최근 저 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는 우리나라 전반적인 문제기도 하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그 심각성은 더 하다. 귀농귀촌을 통해 지자체에서 힘을 쓰고 있으나 역부족이다.

 

이러한 문제 해결의 중심은 다문화.

다문화 인구 유입을 통한 지역 인구의 증가와 노동력 생산, 학교, 병원 등을 세움으로 다문화인들의 지역 정착화를 추진하고 그들을 동등한 입장과 차별 없이 지역주민으로 인정하며 하나가 되어 지역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이에 제천 시는 고려인 1000을 선정하여 제천시 안에 고려인 마을을 형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법무부에서 주관한 지역 특화형 비자 시범사업 공모에서 제천시가 선정됐고, 지역의 인구감소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합법적으로 입국, 체류하는 외국인과 동포의 지역정착을 촉진하는 것을 사업의 목적으로 한다.

 

지역 특화형 비자 시범사업의 대상은 키르키즈스탄 고려인으로,

토픽(TOPIK) 3급 수준의 한국어 능력과 범죄경력, 출입국관리법령 위반 등에 적법한 경우, 소득수준이 국민 1인당 GNI 70%이상이거나 학사 학위 이상의 학력 수준, 인구감소지역 내 일자리에 취업이 확정되었을 경우, 해당 인구감소지역에 5년 이상 취업하며 거주하는 조건으로 비자를 발급하게 된다.

 

적지 않은 규모의 고려인 다문화 인구 유입이 쉽진 않겠지만,

산업단지 확장 및 도심권에서 가까운 위치에 대규모 스마트팜 조성으로 신규 고용에 대한 기업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데 반해, 생산가능인구는 현저히 부족한 상황을 고려할 때, 시급한 도입이 요구될 것으로 보인다.

 

제천 시는 이번 사업을 위해 지방자치단체 간담회, 동포단체 의견조회, 유사 해외사례 분석, 전문가 자문회의 등을 거쳐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앞으로 진행될 제천시의 고려인 다문화 마을 형성에 귀추가 주목된다.

 

 제천 의병모습 (1907년 매킨지 촬영)./ 사진제공=제천시의회  

 

제천시 고려인 마을다문화 사업과 관련하여 취재 중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00년 전 제천 의병의 시작이 훗날 서북 간도를 이루고 러시아 본토 의병까지 전개 후 많은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이주 고려인 후손 중에 이번 제천시 고려인 마을 구성인으로 참여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됐다.

 

이 내용을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제천시 시의회 이재신 부위원장을 극적으로 만나

고려인들의 역사적 뿌리가 제천과 연결이 될 가능성이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이재신 제천시의회 부의장  



이 이야기는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장군으로 부터 시작된다.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장군은 1842125~ 1915129)은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성리학자, 철학자이며 의병장이다.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庵)이다.

 

거유(巨儒)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학통(學統)을 이었고,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과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에 충실했으며, 갑오개혁(甲午改革)과 함께 이루어진 의제(衣制)개혁과 단발령, 그리고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해 등 일련의 사태에 항거해 을미의병(乙未義兵)의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들며 항일 의병 활동을 벌였다.

 

제천의 제천의병의 원류는 지평사람들이다! “

 

나는 제천에서 9대조를 살고 있지만,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제천 호좌의진의 중심인 의암 유인석 장군이나 핵심 참모장인 안승우, 김백선, 이춘영 모두가 지평에서 유인석을 찾아온 지평 사람들이다. 지평 그러니까 양평에는 걸죽 한 인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 시기에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기존의 질서를 위협했고, 지평에서도 즉시 동학농민군에 대항할 만한 유생 중심의 민보군이 조직된다. 바로 제천의 호좌의진의 주역들이 등장하게 되는 시점이 이때이다.

 

                                 의암 유인석 장군 

 

지평의 화석학파는 심이 에 발산인가 에 발산인가 하는 성리학적 논쟁으로 분파 그해 1886년 성재 유중교선생은 의암 유인석과 제천 장담으로 이주하게 된다.

 

의암께서는 전국에 있는 화서문인들에게 전문을 띄워 국모시해와 단발령을 맞은 우리선비들이 취할 행동에 대해 논의하는 향음례 자리를 마련하고 유생들의 중지를 모은다.

 

복수보형의 깃발을 들고 위정척사론을 바탕으로 춘추대의와 존화양이의 기치아래 양반 유생 중심의 제천 의병이 창의 되는 순간이다

 

최초 추대된 의병장이 바로 이순신의 후예 덕수이씨 이필희 장군이다. 역시 유중교 유인석 장군이 문하생이며 단양 출신이다.

 

이필희 장군 휘하 내부 문제로 인해 유인석 선생에게 의병장을 맡아줄 것을 간곡히 주청했지만, 계속 고사 했던 의암선생은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을 잃고 의병장 추대를 수락하게 된다.

 

각지에서 모여든 3,0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한 의암 유인석 장군은 189614() 동서 양방향으로 군사를 나누어 제천을 출발해 다음 날 충주성을 공격했다. 3000여 명의 엄청난 규모의 의병에 기가 죽은 충주성의 관군들은 대항도 못하고 모두 도망쳤다. 충주 관찰사 김규식도 도망쳤으나 이틀 후에 잡아다가 처형됐다.

 

그러나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은 강력한 신식무기로 공격해 왔으며, 결국 충주성에서 패하고 다시 제천 남산에 집결을 해 전투를 준비했으나, 결국 남산 전투에서 중군장 안승우가 전사하고 그의 애제자 홍사구가 뒤를 따른다. 자결하려는 유인석장군을 서상렬이 말려 세운다. 장군은 이미 장군 하나의 몸이 아닙니다. 조선의 2천만 백성들이 장군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장군 살아서 훗날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애환의 서북간도유인석 의병장은 대장정 중 청년 홍범도를 만나다“ ”조선13도의군을 조직하고 도총재에 의암 유인석이 추대! 홍범도, 안중근 합류

 

유인석 의병장은 대장정 중 청년 홍범도를 만난다. 포수 8명을 데리고 와 부대와 합류하려 하였으나 유인석대장은 뜻이 있으니 반드시 훗날 다시 보게 될 것이라 약속하고 장도의 길을 떠난다. 물론 12년 뒤 연해주에서 유인석 장군이 이범윤 이상설 등에 의해 의진 도총재로 추대될 때 군 총사령관이 홍범도이다.

 

1910621일 선생을 비롯해 조선13도의군에는 이범윤·이상설·안창호·우병렬·이진룡·홍범도·정재관·이종호·최우익·이갑·정순만·김정규 등 당대의 당당한 애국지사들이 참여했다. 창립 당시 이범윤 휘하의 의병이 3000여 명이었고, 홍범도 휘하의 의병이 1000여 명이었다.

 

그러나 ‘13도의군의 창설과 성명회 활동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가하자 러시아 정부는 고려인 의병 지도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1910911일 이상설을 비롯한 13도의 군의 핵심 간부 20여 명이 체포됐다. 의암 선생은 이때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일제는 선생의 검거에 혈안이 됐다.

 

19112(), 유정구를 거처 첩첩산중인 운현(雲峴)으로 들어가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들은 19111219일 그들의 권익단체인 권업회를 조직하고 대표자로 의암 선생을 선출했다.

 

그러나 간악한 일본은 독립군에게 당하면, 바로 이곳에 거주하는 무고한 한인들에게 복수하였다. 그 보복의 최고점이 바로 경신 대학살 즉 간도참변인 것이다.

 

독립운동부대들은 민가인 대학살의 원인 제공자라는 죄책감에 더 이상 이곳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운다면 우리교포들에게 큰 짐을 지워주는 것 이라고 판단하고 당시 러시아의 적군인 볼세비키군과 연합해 대일 항쟁을 전개하고자 하바로브스크위의 자유시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 필자가 거론하기조차 부끄러운 민족상잔의 대참사가 일어나고 3천여 독립군이 적군파와 동족들에 의해 죽어갔다. ‘서일은 죽음으로 죄를 씻었고, 홍범도는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 이동휘도 시베리아땅에서 전사하고 만다. 동북쪽의 항일독립운동은 사살 상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일명 자유시참변이다 해방 이후의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던 젊은 독립운동가들은 이렇게 이역의 땅에서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1915314(. 1. 29) 꿈에도 의암 유인석 선생도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 한 채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시베리아 벌판, 블라디보스톡, 동유럽 강제이주 고려인(의병들의)의 처참한 생활 “ ” ‘왕의 귀환’ 100년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후손들의 귀환’ “

 

2023년 중요한 역사다.202310100년 제천 땅에서 의병을 일으켜 만주벌판, 시베리아 벌판을 누리던 자랑스러운 우리 한민족 고려인들을 제천 땅 고려인 마을로 모시게 된 것이다.

 

의암 유인석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제천의병 활동이 간도와 연해주 등 러시아까지 이어져 강제 이주되었던 고려인들의 삶과도 연결이 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이번 사업을 통해 100여 년 전, 강제 이주되어진 고려인들의 후손들 중에 이번에 제천으로 다시 그 뿌리를 찾아서 올 후손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걸어 본다.

 

topoftheworld1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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