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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문우답(賢問愚答)·우문현답(愚問賢答)

이옥용 회장 | 기사입력 2015/02/04 [02:45]
“죽어야 천국 가요!”라는 순수한 어린이의 현답

현문우답(賢問愚答)·우문현답(愚問賢答)

“죽어야 천국 가요!”라는 순수한 어린이의 현답

이옥용 회장 | 입력 : 2015/02/04 [02:45]
◈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가 한 어린이에게 물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 천국 가지?” “아니요.” 어린이가 답했습니다. “엄마아빠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면 천국 가나?” 역시 “아니요” 였습니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이웃들에게 착하게 대하면 가는 거지요?” 라고 하자 어린이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천국갈 수 있나?” “죽어야 가요!”
 
◈ 이러한 교리문답(?)이 교회의 목사, 성당의 신부, 절의 스님들을 등장시키며 ‘천당·천국과 어린이’라는 주제로 인터넷에 떠돌고 있습니다. 현문우답(賢問愚答)일까요? 우문현답(愚問賢答)일까요? 분명 현문(賢問)을 던질 성직자들인데 어린이의 현답(賢答)을 듣고 나면 이들의 물음이 여지없이 우문(愚問)이 됩니다. 그리고 ‘우답’일 것 같은 순진한 어린이의 대답이 ‘현답’으로 빛을 발합니다.
 

◈ 자신들의 천국과 신을 내세우며 반목, 테러와 전쟁까지 불사하는 종교의 실상을 보며 어린이의 ‘우문현답’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어린이 현답처럼 ‘죽어야 천국가는 것’이지 천당에 가기 위해 세상 살면서 뻔뻔하게 ‘죽을 죄’를 저지르는 종교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이 ‘천국에 가는 길’이란 생각을 합니다. 천국의 길을 찾아 나설 때는 이미 순수성이 사라진 것입니다. 천국에 가려는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식욕(食慾)ㆍ색욕(色慾)ㆍ재물욕ㆍ명예욕ㆍ수면욕 등 오욕(五慾)보다 더 진한 욕망일 수 있습니다. 그런 욕심으로 채워진 사람들의 천국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런 천국은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곳은 바로 지옥이지요.
 
◈ 한 고승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님, 어떻게 살아야 극락 갑니까?” 노스님이 답했습니다. “극락 가겠다는 욕심을 버리거라. 나는 그 욕심 버리는데 한 평생이 걸렸느니라.” 노스님이 한 평생 살면서 다시 어린이로 돌아 온 것입니다. 이에 어린애 같은 한 중생은 “아예 극락을 모른다면 욕심낼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고승보다 한 수 위인 듯 했습니다. ‘중생이 극락을 모를 수 없다’는 반문을 하자 ‘극락을 안 믿는 중생’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것이 우문·현문, 현답·우답인지 헷갈립니다. 어린이에게 물어 봐야겠습니다. 그러면 ‘그게 뭐 중요해요?’란 현답이 나올 듯 합니다.
 
◈ 특정 종단과 교주가 아닌 창조주신과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무엇일까? 현문일지 우문일지 모를 이러한 소망과 화두를 갖고 지난 2009년 9월 1일부터 신문을 만들어 왔습니다. 2013년 7월 1일부터는 이러한 뜻을 더 전달하기 위해 날마다 기사를 수용하고 많은 독자들에 다가가기 위해 인터넷신문도 개설했습니다. 그사이 화두에 대한 ‘현답’을 찾는 92번의 화평서신을 게재했습니다.
 
◈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구절을 그대로 믿고 하늘만 쳐다보며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 일상이 되어, 뒷목을 아파했던 나를 ‘정신나간 놈, 마냥 하늘만 쳐다보느냐’고 할머니한테 꾸중듣던 부끄러운 신앙고백까지 밝혔습니다. 신령한 모임에 들어가 명산들을 찾아 다니며 기도하던 일, 금식 철야기도하며 다니다가 지하철 계단에 쓰러졌던 일도 고백했습니다. ‘가라지, 쭉정이’같은 나를 누가 알곡으로 만들어 준다는 말인가? 이런 모든 것들이 무지와 욕심에 의해서라고 깨닫게 되었으며 나같은 전철을 밟지 않고 사람들이 미망과 현혹에서 헤어나게 하자는 취지를 담았습니다. 이후 종교간 대화, 종교타락, 종교의 덕목, 종교의 폐해, 종교개조, 종교의 초심, 종교공해론, 종교의 본질, 종교의 미래, 이단과 사이비, 종교인의 자세, 돈과 종교 등 다양한 화두에 대한 현답을 내놓으려 노력했습니다. 창조주신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가졌기에 경영의 어려움을 감수하고 정말 최선을 다해 힘든 작업을 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답(賢答)이었을까, 또 다른 도그마에 대한 욕심은 아니었을까 하는 자문(自問)해 봅니다.
 
◈ 이제 도그마를 벗어나 좀 더 큰 틀에서 어린이의 마음으로 종교세상을 보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제가 발행해 온 신문의 취지를 살리고 신문을 정착시키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더욱 넓은 시야에서 종교세상을 읽고 제 자신의 도그마에서 자유로워질 때 제가 무엇보다 열정을 바친 신문에 대한 자문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발행인의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를 우리 신문을 통해 더욱 굳건히 하리라 믿습니다.(매일종교신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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