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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가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

이길연 | 기사입력 2013/07/02 [09:57]
차별은 구별을 넘어서 상대에 대한 공격과 피해 유발

다문화가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

차별은 구별을 넘어서 상대에 대한 공격과 피해 유발

이길연 | 입력 : 2013/07/02 [09:57]
 
                                                                         

 
▲ 안산 원곡동 마을을 비롯해 종현 마을 등은 외국인 이주자들이 집단 거주하거나 가장 많이 찾는 명소로 알려졌다.     © 매일종교신문

 

 

다문화가정의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에서 뿌리 내리고 정착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난관들이 존재한다. 언어 소통은 물론 경제적 빈곤 나아가 문화적 차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다문화가정에 관한 편견과 차별은 무엇보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편견과 차별은 저개발국가, 특히 동남아 국가 출신의 이주자들에 관해 집중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미주나 유럽 출신의 이주자인 경우 그 숫자도 적을 뿐만 아니라 은연 중 우리의 사고 가운데 그들에 관한 사대의식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어 이와 같은 편견과 차별이 그리 크지 않는 형편이다.

  우리의 현실로 볼 때 동남아 출신의 이주자는 결혼과 노동이주자로 구분할 수 있다. 결혼이주자의 경우 대부분 동남아 출신의 여성들인데 한국의 농촌 총각이나 도시의 근로자와의 결혼을 통해 다문화가정을 형성하고 있다. 농촌에 거주하고 있는 결혼 이주자의 경우 강한 생활력을 바탕으로 가사와 육아는 물론 육체적 노동까지 감당하고 있다. 도시 근로자의 경우 역시 대부분 3D업종에 종사하면서 강인한 생활력을 보이고 있다.

  이들에 관한 편견과 차별은 우선 외모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같은 동양계이면서 그들의 피부색이 다르고 얼굴의 형상이 다른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것은 결국 결국 상대에 관한 이해와 인정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상대에 관한 이해와 인정이 수반되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은 쉽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동일 문화권에서 살지 않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에 서로를 알고자 하는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차이와 차별은 구분돼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당신과 나는 다르다고 얘기한다. 다른 것은 수평적인 개념이지 수직적인 개념은 아니다. 반면 차이는 다르다. 차이는 또 다른 현상에 놓여 있다. 우리는 차이가 난다고 얘기한다. 차이는 수직적인 개념이면서 비교 대상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차이와 차별은 현격히 다르다. 차이란 서로 같지 아니하고 다름을 나타내는데, 예를 들어 성격 차이, 능력 차이, 세대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차별이란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남녀 차별, 학력 차별, 출신 성분 차별, 민족 차별, 인종 차별 등을 들 수 있다. 차이가 난다고 차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차이란 현상적인 상황을 나타내지만 차별은 이와 같은 차이를 넘어서 상대를 향한 공격이나 피해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샤방샤방 샤랄라’ 동영상 가운데 이와 같은 차이나 차별에 관한 대사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왜, 한국으로 결혼 왔어?”

  “싸다 비싸다 알지?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비싼 거 못 먹어”

  “엄마가 한국 사람도 아닌데 아이는 어떻게 공부를 참 잘하네”

  “한국 사람 다 됐네”

  “애는 피부가 하얘서 다행이야”

  “쟤네 엄마 가난한 나라에서 왔어”

  “필리핀은 물고기만 먹냐?”

  “야! 밧줄머리”

 

  위의 대화 가운데는 차별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은 같은 차별은 상대방에게 피해와 상처를 줄 수 있는 공격적 요소가 담겨 있다. 이는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이라고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지 않고는 그들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별에 관한 인식은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도 찾을 수 있다. 2001년 8월, 인권위는 ‘살색’이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한다는 이주노동자 및 김해성 목사의 청원을 받아들여, 한국 기술표준위에 ‘살색’이란 색 이름을 바꿀 것을 권고한 바 있는데, 2002년 11월 살색은 ‘연주황’으로 바꾸었다. 2004년 다시 초ㆍ중등학생 11명이 이를 쉬운 한글로 바꿔달라는 진정서를 제출, 최종적으로는 ‘살구색’이 표준으로 사용되게 됐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크레파스와 수채물감의 특정 색을 ‘살색’으로 이름붙인 것은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기술표준원에 한국산업규격(KS)을 개정토록 권고했다. 인권위는 “기술표준원이 정한이 정한 ‘살색’이란 색깔명은 특정 피부색을 가진 인종에게만 해당되고 황인종이 아닌 인종에 대해 합리적 이유 없이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으며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확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한국경제신문, 2002년 8월 2일자)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이주민에 대한 다문화 수용성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하다. 다문화수용성이란 다문화사회에서 자기와 다른 구성원이나 문화에 대하여 편견을 갖지 않고 자신의 문화와 동등하게 인정하고 그들과 조화로운 관계 설정을 위하여 협력이나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좀더 확대해서 외국인이나 이주민을 대할 때 출신 지역이나 경제적 수준별로 차등을 두지 않으면서 세계 시민의 한 일원으로서 보편적 가치에 입각하여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총체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전국 대표적 표집으로 일반 국민 2,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얻은 다문화 수용성 지수는 전체 평균 51.17점이었다. 향후 우리 국민의 다문화 수용성 향상을 위한 지속적 노력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안상수 외, 2011) 외국 이주민을 얼마나 자주 접촉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다문화 수용성 지수가 달라지기도 했다. 외국인 및 이주자를 자주 목격하거나 대화 빈도가 높을수록 다문화 수용성이 높았으나, ‘매우 자주’ 목격하거나 ‘매우 자주’ 대화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다문화 수용성이 저하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결과는 단순 접촉이나 표면적 접촉이 다문화 수용성 향상에 도움이 되겠지만, 상호 이해관계가 달려있거나 생활공간을 함께 공유하는 실질적 교류가 빈번하여 접촉의 양적 증가할 경우 다문화 수용성 개선의 해법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가족이나 친인척 중에 외국이나 이주민이 있는 경우가 51.81점으로, 친구 중에 있는 경우 57.77점에 비해 다문화 수용성이 오히려 낮았다. 한편 이웃 중에 있는 경우 50.03점이었고, 주변에 없는 경우는 51.33점이었다.

  접촉과 교류가 집단 간 갈등 해소에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첫째, 동등한 사회적 지위에 기반한 접촉, 둘째, 장기적이고 협력적 활동, 셋째, 서로의 운명을 좌우할 공동목표 설정, 넷째, 제도 및 사회적 규범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우리 사회가 다문화 공동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문화가정에 관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선 다문화와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문화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길 연 (한국다문화연구소장, 고려대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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