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설교
아브람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이 마중을 나옵니다.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면서 제사장이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형성되기 전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신앙형태가 완성되기도 전입니다. 그 기원과 흐름이 어떻게 이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이어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멜기세덱의 등장기사를 보면 무척 뜬금없이 보입니다. 하지만 아브람 당시의 사악한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들 중에 참 신에게 충성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 역량의 직무도 수행한 지방 통치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진정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충성스러운 자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소수의 무리였지만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지상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성경은 또한 보여줍니다. 아무리 시기가 어두웠을지라도, 아무리 백성들이 사악했을지라도 충성스러운 증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의 뜻은 왕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멜레크”와 의를 의미하는 “체데크”의 합성어로서 “의의 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었으며, 당시 우상숭배가 팽배한 가나안 땅에서 이례적으로 순수하고 바른 신앙을 지닌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아론의 반차를 초월하여 제사장직을 수행한 그리스도의 예표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 14:19)
여기서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멜기세덱은 그와 같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여기에 묘사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 엘룐”이라고 하는데 이 명칭은 14장에서 4번 등장하지만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칭호입니다. 이 칭호가 내표하는 개념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지극히 높으신 존재”로서의 하나님입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 14:20)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아브람은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립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을 인정했다는 것과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거룩한 요구사항으로 반복하여 강조된 십일조 헌납의 최초의 언급입니다.
하나님이 그에 대해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다고 증거한 아브람은 그의 모든 종교적 의무를 양심적으로 이행하였습니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그의 증식된 재물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행위를 통해 믿음의 조상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받기를 갈망하는 모든 자들을 위한 모본을 세웠습니다.
히브리서 7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을 설명하면서 멜기세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론에서 시작되는 제사장직에 연결된 분이 아니라 7장 3절 말씀처럼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히 7:3) 있는 멜기세덱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시편 110편 4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는 아론의 반차 이전에 있었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하는 것은 아래와 같은 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유대인들의 제사제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왕과 제사장의 이중 직무 (2) 당시 부패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와 평강으로 백성을 다스린 태도 (3) 출생과 족보가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신비적 출현
이런 의미에서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모두 혈통을 따라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반면 멜기세덱은 혈통에 따른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또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이는 왕으로 뿐만 아니라 제사장 직분으로 나아온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제사장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고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그의 직분에 합당하게 아브람에게 축복을 선언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복받은 사람이자 만민에게 복을 받게 할 근원으로서 자신을 축복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칩니다. 승리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며,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쫒아 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과의 영적 싸움으로 피곤한 우리의 짐을 들어주시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적 역할을 하시는 대제사장이시며,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정착시키실 평강의 왕이라는 사실을 이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창 12:6,7)
가나안 땅에 들어간 아브람은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러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던 곳에 제단을 쌓고,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친 뒤에도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레 상수리나무”라고 했는데, 이 “모레”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 “모레”라는 말의 원어는 “가르치는 자”라는 뜻입니다. 상수리나무 앞에 “모레”라는 말이 붙은 것은 이 상수리나무가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가나안 사람들은 우상을 섬겼고 그 우상의 가르침을 상수리나무에게서 얻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 아무도 그 땅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 다 상수리나무 아래서 우상 숭배를 할 때에 아브람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아브람의 삶의 특징을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제단을 쌓았다’고 기록합니다.
창세기 11장 10절로 26절은 노아의 아들 셈의 족보가 나옵니다. 셈의 족보는 셈-아르박삿-셀라-에벨-벨렉-르우-스룩-나홀-데라-아브람으로 이어집니다. 이중에 데라의 고조부인 벨렉은 이름의 뜻이 “분열”입니다. 벨렉이 태어날 때 즈음에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의 대혼잡이 생기며, 국가와 민족이 나뉘어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리고 벨렉에서 데라에 이르기까지 이 가문이 어디에 정착을 합니까? 갈대아 우르에 정착하여 살아가는데, 갈대아 우르는 바로 바벨탑이 세워진 지역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와 그 조상들의 세대는 바벨탑을 쌓은 세대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람은 바벨탑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의 삶에는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문화, 제단문화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오늘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자신들만의 바벨탑을 쌓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사회적 성공을 위해,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무엇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디서든 하나님을 높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제단을 쌓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죄란 입으로는 하나님을 높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같지만, 동시에 자기 것을 절묘하게 빼먹고자 유혹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그리스도인이고, 입을 열면 하나님의 영광을 불러도 중심에 십자가가 없고, 하나님만을 높이려는 마음이 없고 자신이 그 중심에 자리를 차지하기 쉽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문화 속에서 아브람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높이는 문화를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높이는 제단을 쌓고 자기 자신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벗 아브람은 이처럼 우리에게 훌륭한 모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장막을 치는 곳마다 그 근처에 제단을 세우고, 장막에 유하던 모든 사람들을 불러 조석으로 희생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의 장막이 옮겨갔을 때에도 제단은 남았습니다. 후년에 유랑하는 가나안 사람들 중에는 아브람에게서 진리에 대한 교훈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 제단이 있는 곳에 왔을 때는 언제든지 저들 앞에 지나간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그 곳에 장막을 칠 때는 제단을 수리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 우리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믿음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남겨두었던 제단은 다른 이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제단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의 믿음에도 많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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